‘만권독서만리행(萬卷讀書萬里行).’ 세상을 깊이 이해하고 견문을 넓히려면 만권의 책과 만리를 여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책과 여행은 즐거움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외려 낯설고 불편할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폭이 넓어지고 사유도 깊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크로드는 그 길을 걷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만리행’이다. 혹한과 무더위, 갈증과 굶주림, 도적과 맹수들….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극한의 길. 그럼에도 그 길을 통해 동서 문화가 이동했고 온갖 사상이 확산됐다. 지금도 결연한 각오 없이 그 길에 발을 들여놓기는 쉽지 않다. 홍사성 시인이 그 실크로드에 올랐다.
‘사막, 그 너머/ 당신에게 가는 길 너무 멀다// 불화로 같은 땡볕/ 바람의 언덕/ 모래폭풍/ 갈색 전갈/ 까마득한 솔개 그림자/ 백골 화분에 돋아난 풀씨 하나/ 타는 목마름 견뎌야 이를/ 아물아물 오천축국/ 하얀 목숨 하나 짊어지고/ 걷고 또 걷는다/ 사막의 길, 촉루의 길’(나의 왕오천축국전)
시인은 먼 옛날 마른 해골을 이정표 삼아 걷었을 길을 따라갔다. 그 길은 시인에게 고난, 고독, 애틋함, 그리움, 겸손, 아름다움, 너그러움, 통찰을 선사했다.
‘달빛은 쏟아져 샘물이 되고/ 샘물은 고여서 달빛이 되고/ 바람은 젖어서 이슬이 되고/ 이슬은 말라서 바람이 되고/ 시간은 흘러서 모래가 되고/ 모래는 쌓여서 시간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먼지가 되고/ 먼지는, 먼지는 날아가 허공이 되고’(월아천 명상)
월아천은 둔황의 모래산 명사산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다. 이경철 문학평론가의 말마따나 이 시에는 인생이며 우주 운항의 도며 불법의 요체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집착할만한 물건과 현상이 있겠느냐는 근원적인 의문과도 맞닿아있다.
‘우즈베키스탄 사막/ 키질쿰이 귀띔해 주었다// 맑은 날만 계속되면/ 금방 사막이 되고 만다는 것// 고기압만으로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다는 것// 사막이 안 되려면/ 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귀띔)
좋다고 마냥 좋은 게 아니다. 좋지 않다고 정말 안 좋은 것도 아니다. 맑은 날이 좋다하여 맑은 날만 계속되면 결국 사막을 피해갈 수 없다. 허나 사막만 그러할까. 우리 인생도 좋고 싫음에 치우치면 결국 키질쿰사막마냥 황폐해질 것임을 일러준다.
‘해발 마이너스 154미터/ 연간 강수량 30밀리/ 여름 최고기온 48도// 그동안 나는 불평이 너무 많았다’(투루판)
‘고개 들고 나대지 않는다// 햇볕 좋으면 하늘 쳐다보고/ 비 오면 축일 뿐// 잘난 척할 일, 부끄러울 일 없다// 비바람 멎었으니/ 말들에게 뜯어 먹힐 시간// 내일은 거름으로 돌아오리’(들풀로 살아가기)
한두 편이 아니라 시집 곳곳에 성찰과 통찰이 배어있다. 책의 막바지에 이르면 생명에의 경외와 찬탄으로 이어진다.
‘몽골 바얀고비/ 미니 사막에서 배웠다// 사막에도/ 살아가는 생명이 있다는 것// 어떤 극한에서도/ 사는 방법이 있다는 것// 꽃도 벌레도/ 결코 엄살 부리지 않는다는 것’(사막 공부)
요행이 사막으로 떠날 일이 생긴다면,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사방이 온통 모래투성인 곳에 홀로 내버려졌다고 생각된다면, 혹은 짐을 한가득 실은 낙타 방울소리가 그리워진다면, 이 시집을 펼쳐들라. 온갖 지식의 나열보다 깊은, 상념과 그리움 가득한 서역으로 안내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660호 / 2022년 1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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