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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달라이라마

보리심과 공성을 수행 핵심으로 삼으면 삶이 달라집니다 

공성을 알면 대상이 실재하지 않음을 알아 자비심 일어나고
보리심 수행하면 이기심 줄이고 봉사와 희생의 큰마음 생겨
남 이롭게 하는 마음 갖고 수행함이 곧 보리심과 공성 수행

달라이라마는 항상 선한 마음을 잊지 않도록 수행하고 공성에 대해 깊이 사유할 것을 강조했다.
달라이라마는 항상 선한 마음을 잊지 않도록 수행하고 공성에 대해 깊이 사유할 것을 강조했다.

오늘 한국 불자들에게 법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쁩니다.

제가 느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항상 누구를 만나건 어디에 있건 간에 선한 마음을 가지고 남들을 이롭게 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비구로서 모든 종교를 존중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인들을 알고 만남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가 선한 마음을 지니고 모든 이들에게 배려하고 돕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종교의 근본 가르침을 공유합니다. 모든 종교의 근본 가르침은 서로 돕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항상 화합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상이 실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착각으로 인해 집착하고 그 대상을 미워합니다. 만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어떠한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그리고 그것을 사유할 수 있다면 내면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것이라거나 고정되어 있다는 집착 역시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됩니다. 

대상이 실재한다는 생각이 줄어드는 만큼 그 대상을 집착하고 그 대상에 연연하는 마음 역시나 자연히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양자 물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을 통해서 ‘주관과 객관 상호작용에 의해서 비롯된 것일 뿐 대상에서부터 고유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상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 대상을 보는 순간 ‘아름답다’ ‘추하다’라는 마음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대상이 실재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아름답다’라는 분별과 더불어 ‘추하다’라는 분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사유할 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을 보건 무엇이 보여지건 그 대상에 일어나는 다른 감정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이 실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대상을 연연하고 그로 인해서 분별이 일어나고 분별로 인해서 여러 가지 감정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대상을 연연함으로 인해서 분별이 일어나고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를 보고 대상에서 실재한다는 생각이 사라지면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분별과 망상과 번뇌 역시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실재한다는 착각과 실재한다는 생각이 나와 남을 타락하게 하고 나와 남을 끌려다니게 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성을 생각하고 공성에 대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성을 알면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상에서부터 실재하는 것은 없다, 내게 보여지는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와 같은 모든 중생들이 나와 같이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만을 원하고 있고 이들을 위해서 자연히 자비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이 바로 지혜와 방편을 함께 하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공성과 보리심을 수행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이런 방식으로 수행하게 되면 자량도(資糧道), 가행도(加行道),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로 수행자의 단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지혜와 방편을 겸비한 이는 중생을 위해서 나투신 색신의 몸과 중생을 위해서 지혜를 얻은 법신이라는 두 색신과 법신이 궁극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최근 뉴스에서 한국의 이태원 참사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안타까운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기도를 함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소한 다툼이 일어났다고 해도 마음이 불편한데 그렇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사회에 봉사하고 사회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 그리고 우리 불자들은 항상 남들을 이롭게 하고 남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항상 우리가 독송하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인 ‘반야심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형색이 공성이고 공성이 형색이며 형색과 공성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대상이 실재한다고 보지만 그 실재한다는 것을 정작 찾아보면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모든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대상에 연연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저 역시 날마다 보리심과 공성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고 아침에 일어나면 보리심과 공성에 대해서 사유합니다. 이런 수행은 제 삶에 큰 도움이 되었고 제 마음을 변하게 했습니다. 보리심의 수행은 저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기적인 마음들을 줄이게 했고 언제나 남들을 위해서 봉사하겠다, 언제나 남을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큰마음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항상 나는 어디에 있건 언제 어디서건 모든 이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을 낼 수 있게 했습니다. 더불어 그런 마음을 일으키고 보살행을 할 때 여러 가지 내면에 일어나는 복합적인 분별, 망상을 줄이는 데 공성을 사유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면의 분별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남을 위해서 배려하고 남을 위해서 살겠다는 마음만이 가득하기 때문에 마음은 편안하고 몸도 건강합니다.

이것이 보리심 수행의 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도 보리심을 닦고 남을 위해서도 보리심을 닦아야 한다는 보살들의 말씀은 남을 위하는 만큼 나 역시나 편안한 마음을 통해서 심신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위하는 수행을 할 적에 대상에서 무엇도 실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그 대상을 연연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사유할 때 대상에 연연하는 마음이 줄고 대상이 실재한다는 착각과 편견 역시 줄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집착과 성냄과 어리석음 역시나 자연히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날마다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습관을 들일수록 이것이 현생에서만 습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에도 또 다음 생에도 보리심과 공성의 수행이 나의 습이 되어 수많은 중생들을 널리 이롭게 하고 수많은 중생들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보리심 수행을 하면서 체험이 생기고 경험이 쌓이면 그것이 이생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 생과 그 다음 생으로 이어져서 항상 나의 수행은 보리심과 공성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확언하고 스스로 서원하고 맹세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원입니다. 허공과 같은 무수한 중생들을 위해서 내가 세세생생 이들을 위해 이들을 도우면서 살아가겠다는 보살의 서원을 비로소 세우게 될 것입니다. 

‘입보리행론’ 10장에서 보살은 다음과 같은 서원을 하셨습니다. ‘허공계가 존재하는 한 중생이 존재하는 한 저는 그들과 함께 머물러 중생의 고통을 가시게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용기입니다. 보살의 서원입니다. 우리도 이 허공계가 다할 때까지 중생들을 위해서 내가 살겠다는 서원을 세우면, 나의 삶의 목적이 비로소 생긴 것이고 나는 인간으로서 태어나 나의 삶이 충분히 값진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한국 불자들에게 이 점을 다시한번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이 이름과 소리일 뿐입니다. 대상에서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실재한다는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실집(實執,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집착)으로 인해서 대상이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대상에 매이지 않고 항상 남들을 이롭게 하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수행해 가면 그것이 보리심과 공성의 수행이 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나와 같이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만을 원합니다. 종교를 가진 이들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좀 더 비범하고 좀 더 큰마음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종교를 가진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종교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괴롭히고 더 다투고 심지어는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내면의 평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탐‧진‧치 삼독에 끌려가지 않을 때 우리 개개인이 평화로움을 얻게 되고 개개인이 평화를 얻었을 때 비로소 세계의 평화를 우리가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는 항상 선한 마음을 매 순간 가지고 대상에서부터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 나는 더 이상 착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에서 대상을 그와 같이 보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이 나를 힘들게 했을 때 혹은 이웃이 나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할 때도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감정들은 전부 다 내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고 대상에 연연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서 내면의 평온함을 매 순간 유지하고 내면의 평온이 유지될 때 세계의 평화가 비로소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종교들이 다양한 가르침들을 전하고 있지만 그 가르침의 근본은 선한 마음이고 그 선한 마음을 우리 모두 항상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선한 마음을 근간에 두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철학과 사상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는 종교적인 측면과 철학적인 측면 과학적인 측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선한 마음이라는 것은 세속적 윤리법에 해당하고 철학과 사상을 좀 더 배워가면서 공성에 대해서 깊이 사유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정리=윤지홍 대구 지사장

이 법문은 11월25일 인도 다람살라 남걀사원에서 봉행된 ‘2022년 한국인을 위한 법회’ 첫날  법문에서 달라이라마가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661호 / 2022년 1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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