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류문명사에서 지혜 정점은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

  • 인터뷰
  • 입력 2022.12.27 19:21
  • 수정 2022.12.28 18:34
  • 호수 1663
  • 댓글 3

새해에 만난 인물-최병헌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최치원 사산비명 연구로 불교사학자 길…박사제자만 40여명
학문이란 모르는 것 찾아가는 과정…창조성 잃으면 학자 아냐
이제 비로소 한국불교사 전체 그림 그릴 수 있는 단계 이르러

최병헌 명예교수는 “지난 50여년 돌이켜 보면 아는 것이 증가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더 증가하는 연구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사진=정주연 기자
최병헌 명예교수는 “지난 50여년 돌이켜 보면 아는 것이 증가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더 증가하는 연구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사진=정주연 기자

60~70세를 장수로 여기던 시절은 이제 아득한 옛이야기다. 의학 발달로 오늘날 한국인 기대수명은 83세를 넘겼다. ‘100세 시대’ 도래가 머지않았다는 전망들이 나온다. 학계도 일찌감치 고령화 시대를 맞았다. 20~30년 전에는 환갑이나 고희를 축하하는 자리가 많았다. 제자들이 주도해 기념논총을 만들어 헌정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관행을 찾아보기 어렵다. 논문을 게재할 수 있는 학술지가 흔해지기도 했지만 환갑이나 고희의 특별함이 현격히 줄어든 이유가 크다.

그럼에도 대학 강단을 떠난 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모습은 드물다. 30~40년간 매진해왔던 학문의 업을 퇴임과 함께 중단했음을 의미한다. 원로 불교사학자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는 예외적이다. 1943년생으로 팔순이 눈앞이지만 학문에 대한 열의는 젊은 학자들 못지않다. 예나 지금이나 ‘학문이란 모르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새로운 앎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창조성을 잃으면 더 이상 학자가 아니다’라는 학문관이 확고하다.

“소화가 덜 된 상태로 뱉어내는 것은 만용”이라고 말하듯 오랜 연구생활에 비해 최 교수의 저술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러나 한 편 한 편이 학계의 큰 관심을 모아왔다. 불교사상을 불교 내부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일반 사회변화와 접목해 불교사학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구영역이 폭넓고, 해당 시대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972년 학위논문인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을 비롯해 ‘재당(在唐) 신라방의 불교사적 위치’ ‘조선시대 불교법통설의 문제’ ‘일제의 침략과 불교’ ‘대각국사 의천의 불교사적 위치’ ‘혜덕왕사 소현과 귀족불교’ ‘선종 초기전래설의 재검토’ ‘근대 한국불교사학의 전통과 불교사 인식’ ‘한국불교사의 체계적 인식과 이해방법론’ 등 논문 제목들에서 알 수 있듯 연구 주제가 고대불교사에서 근현대, 온갖 연구방법론까지 넘나든다.

최 교수는 지금도 대부분 시간을 책에 묻혀 지낸다. 퇴임 후 연구에 집중할 수 있어 학문성과는 퇴임 전 40년 기간보다 더 컸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년의 나이를 지나서야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가졌고, 이제 비로소 한국불교사의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털어놓는다. 최근 신라의 골품제도를 새롭게 조명한 성과는 국사학계에서도 수정이 불가피할 정도로 각별한 의미가 있으며, 사료에 대한 엄격성과 논리적 체계성을 통해 원효를 종합적으로 드러낸 것도 값진 성과다.

이와 함께 역량 있는 많은 연구자를 배출한 것도 최 교수의 큰 업적이다. 박사학위 제자만 모두 40여명, 이 중 불교 등 종교사를 다루는 역사학자가 20여명에 이른다. 이렇듯 최 교수의 깊은 안목과 후학양성을 통해 한국불교사가 체계화·집대성되고 있다. 12월2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자택에서 최 교수를 만나 학문관과 한국불교계의 방향 등에 대해 얘기를 들어보았다.

▶퇴임 후 어떻게 일과를 보내시나.
“퇴임한 지 벌써 14년이 됐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도 들지만 연구에 집중할 수 있어서 학문적인 성과는 퇴임 전의 40여년보다 더 컸던 것 같다. 이제 비로소 전공분야인 한국불교사에 대한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곧 팔순인데 건강관리나 취미가 있으신지.
“가능한 한 자주 걸으려고 한다. 가끔은 사찰이나 역사유적지를 찾아보고 있다. 취미 생활이라면 식물 가꾸기라고 할 수 있는데, 어릴 적의 농사 경험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각 식물의 특성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식물과의 대화를 통해 자연의 섭리를 배우고 있다. 대학 은사 선생님께서 낚시를 권하신 일이 있었는데, 물고기 죽음을 즐기는 것이 잔인하게 생각돼 그만뒀다.”

▶역사학을 처음 공부하게 된 계기는.
“농촌에서 태어났는데, 선친께서 농사를 지으면서 조그만 서당을 운영하셨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통감강목’ ‘사서’ 등 한문 공부를 하게 됐다. 그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느껴 역사책들을 즐겨 읽었던 기억이 난다. 1962년도 경희대에서 시행한 전국고등학교 학력경시대회에서 역사 과목으로 수석을 차지한 것 등이 자연스럽게 사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사는 역사학에서도 변방의 학문이었을 텐데 어떻게 불교사를 전공하게 됐나.
“처음에는 유학사와 고대사 가운데 전공 분야 선택을 놓고 고심했다. 먼저 유학사 전공을 염두에 두고 철학과의 유학사 강좌들을 열심히 수강했는데, 조선시대 역사를 공부하면서 당시의 유학, 특히 주자학의 교조주의적이고, 사대주의적 성격, 극심한 당쟁의 도구 역할은 매력을 잃게 했다. 그런 이유로 한국고대사를 전공하는 방향으로 최종 기울어지게 됐다.”

▶석사학위 논문에서 학계에선 처음으로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다뤘다. 그것이 불교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였나.
“신라말 선종사에 대한 1차 사료로서 최치원의 사산비명이 전연 이용되지 못한 상태임을 알고 그것을 해석하기로 했다. 이러한 주제는 난해했으나 당시 학계 상황에서는 매우 시의적절했고, 과분한 평가를 받게 됐다. 결과적으로 1960년대 국사학계 상황이 한국불교사 전공의 길로 들어서게 했고, 서울대 불교사 전공의 최초 전임교수가 되어 학부와 대학원에 여러 불교 과목을 개설해 강의하게 됐다.”

▶불교사를 전공하면서도 당대 일반사, 동아시아불교, 인도불교까지 이해의 영역을 넓혀갔는데 어떤 이유에서였나.
“한국불교사 연구에서 평생 일관한 기본적인 관점과 연구방법으로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상응하는 불교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사회변화는 주체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주체세력의 주장이 시대정신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불교계도 주체세력의 교체에 상응해 교단의 주류가 바뀌고 새로운 불교사상의 계발을 통해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사 자체만이 아니고 정치사, 사회사, 사상사, 예술사 등 전 문화 분야에 대한 이해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불교사의 시대구분과 그 시대에 따른 불교의 내용을 설정할 수 있었다. 즉 고대불교-고대왕권과 왕실불교, 고려불교-지배체제와 국가불교, 조선불교-유교정치와 산중불교, 근대불교-일제침략과 식민지불교, 현대불교-불교개혁과 미완의 과제가 그것이다. 나의 한국불교사 이해 체계가 이제 비로소 설정됨으로서 개설서 집필이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둘째는 한국불교사를 한국만의 것으로 고립시켜 이해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시야를 가능한 한 넓혀서 아시아 전체 불교사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추구해온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인도와 중국을 수차례 답사한 것으로 아는데 그것도 이 때문이었나.
“사실 50여년간의 불교사 공부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한국불교보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일본불교였다. 이것은 한국불교사의 국제적 위치나 위상을 밝히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불교사 자체를 자기중심적이 아닌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시아 각국의 불교사에 대한 공부는 일차적으로는 문헌을 통한 것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유적지들을 반복해서 답사하고, 현지 학자들의 비판과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한국불교사에 대한 구체적인 업적을 많이 내놓지 못하게 한 방법이었지만, 결코 잘못된 관점과 방법은 아니었다고 본다.”

▶세 번째는 연구방법론은 무엇인가.
“학생들에 대한 강의를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고 부족한 점을 보충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내게 강의는 학생들과 함께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40여년 동안의 똑같은 내용을 강의한 적이 없으며, 다양한 시각과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았다. 항상 부족한 것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해 왔다. 결론적으로 내 학문연구와 강의는 불교사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가르치는 과정이 아니었고, 나의 무지를 반성하고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는 과정의 연속이었을 뿐이었다.”

▶공부할 여건이 많이 좋아졌는데도 예전보다 대가들이 적게 나오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 학계의 연구 경향은 미시적인 접근방법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특정 사건이나 인물, 저술, 심지어 개념 하나하나의 분석에 치중하는 것은 불교사 연구의 기초적인 연구 단계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작업이다. 그러나 각각의 개별적인 사건이나 인물은 불교사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올바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런데 불교사학계에서 이러한 거시적인 문제는 거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 결과 오랜 시간 사색의 결과물로서 긴 호흡이 요구되는 중후한 논문은 보이지 않고, 단편적인 내용의 가벼운 논문들만 양산되는 것이다. 불교사학 수준의 향상은 개별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미시적인 이해와 함께 그것들을 종합하면서 전체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

최병헌 명예교수는 “불교의 연기설은 사회 구성원의 분열과 대립 갈등을 해소해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사진=정주연 기자
최병헌 명예교수는 “불교의 연기설은 사회 구성원의 분열과 대립 갈등을 해소해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사진=정주연 기자

한국불교 신뢰받으려면 성찰하고 비판하는 자정능력 강화해야
우리 불교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고승 꼽는다면 의상과 지눌
근현대불교 실상·성격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는 연구 꼭 필요
불교 위기 극복하려면 시대 요구하는 불교역할부터 파악해야

▶역사학 연구에 있어 가장 중시하는 점이 있다면.
“사람에게 인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논문이나 저서에도 품격이 있다. 그 기준은 사료 비판, 해석의 엄격성, 논리적 체계성이다. 자의적인 해석이나 확대 해석은 모래 위에 건물을 지으려는 것과 같이 그 해석 위에서 수립되는 논리체계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므로 논문의 평가 기준은 어디까지나 기발한 아이디어나 새로운 주장 여부가 아니라 자료 해석의 엄격성과 논리적 체계성의 성공 여부에 두어야 한다.”

▶오랜 연구 기간에 비해 연구성과가 의외로 적은 편이다. ‘소화가 덜 된 채로 뱉어내는 것은 만용이다’라는 소신과 관련되나.
“나는 부끄럽게도 내세울 만한 업적을 내놓지 못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나의 자질 부족과 게으름 때문이었다. 조금 변명하자면 정년 때에 그동안의 논문들을 모아 10여권의 책으로 편집했었다. 그 가운데는 발표하지 않은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는 출판사에 넘기기도 했으나 결국 회수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충족되지 않았다. 정년 이후 10여년간 전반적으로 재검토한 결과 출간을 보류한 것이 천만번 잘했다는 생각이다.”

▶1700년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 몇 가지를 꼽는다면.
“첫째, 7세기 후반 원효의 불교사상 체계의 수립과 대중불교화, 동시에 의상의 화엄종 창립은 한국불교의 토대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업적이었다. 둘째는 11세기 후반 의천의 국제적인 불교교류 활동과 교장(敎藏)의 간행사업은 고려문화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동아시아불교의 업적을 총정리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셋째 지눌의 선교통합사상과 수선사 창립은 귀족불교를 개혁하고 선종 위주의 불교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업적이었다. 넷째 15세기 후반 세조의 불전 간행과 국역사업은 비록 미완에 그쳤지만 한국어 불전 성립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국불교사에서 안타까운 장면을 꼽는다면 무엇일까.
“첫째는 14세기 후반 태고보우와 신돈 사이에 전개된 갈등 문제였다. 이 두 인물의 갈등은 당시 불교계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윤리적 타락의 문제를 그대로 노출시킨 대표적 사건이었으며, 고려 멸망과 불교 쇠퇴로 이어지는 발단이 됐다. 둘째는 20세기 전반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불교의 성립이라는 불행한 사건이었다. 식민지불교는 해방된 뒤에까지 불교의 세속화와 어용화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한국불교사의 수많은 인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고승을 꼽는다면.
“신라의 의상과 고려의 지눌, 두 분을 우선 꼽고 싶다. 의상은 근엄 성실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화엄종 교단을 조직하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골품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불교의 평등사상을 구현하고 탁발에 의해 교단을 운영하려는 의지는 부처님 당시 교단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고려시대의 지눌은 승려로서 출세가 보장되는 승과에 합격하였으나,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정혜사(뒤에 수선사)를 조직하고 새로운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새로운 교단의 이상을 제시함으로써 평화적이며 종교적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의상과 지눌은 모두 지방에서 작은 규모의 교단과 결사단체로 출발했으나,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해 각각 전체 불교계를 바꾸는 개혁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리고 마침내는 불교계의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사례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오늘날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받고 있는 우리 불교종단에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장 가까웠던 스님이나 좋은 기억으로 남는 스님이 있다면 누구인지.
“첫째는 법정 스님인데, 1987년 송광사에서 보조사상연구원 설립을 계기로 10여년간 자주 뵐 수 있었다.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졌으면서도 불교적인 입장을 떠나신 적이 없으셨다. 맑고 향기롭게 신행운동을 이끌 때에는 종교적인 방법에서 한 치도 벗어나시는 것을 못 보았다. 그분은 무소유라는 대명사 그대로 입적에 드실 때까지 버리고 떠난 삶을 보여주셨다. 내가 무엇보다 그분을 존경한 것은 언행이 일치하는 청정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신 점이다. 또 다른 스님으로서는 수덕사의 주지를 역임하고 총무원장 재직 중 돌연히 입적하신 법장 스님이다. 1990년 말 강남에 한국불교선학연구원을 설립하는 것이 계기가 됐다. 한국근대불교사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내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스님은 한국근대불교사 연구의 방향과 불교학계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계셔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갑자기 열반에 드셨다.”

▶역사학자로서 한국불교의 미래는 어떨 것으로 보나.
“한국불교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하다. 출가자와 신도의 감소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계 전반의 문제로 출생률 저하와 인구 감소라는 사회적인 문제와 맞물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 불교계에서는 이미 승려와 신도 수의 부족으로 빈 사찰이 속출해 그 처리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유럽에서도 성직자 감소로 예식의 집전과 고해성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우리 불교계의 사정은 일본이나 유럽과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 불교계 나름의 정밀한 진단이 요구된다. 그 일환으로 ‘문중사학’ 수준을 넘어 근현대불교의 실상과 성격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는 근현대불교사 연구가 꼭 필요하다.”

▶한국불교가 신뢰받는 종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정능력을 키워야 한다. 자정능력은 자신을 성찰하고 비판하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원래 부처님은 평등한 관계 속에서 민주적인 운영을 통해 완전한 화합을 이룬 집단을 승가의 이상으로 삼으셨다. 종단이 화합하는 집단의 모범을 보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속사회의 분열 대립을 꾸짖을 상황이 돼야 한다. 그리고 종단에 소속된 스님들 한 분 한 분이 청정한 생활로 일관하면서 세속사회의 부정과 부패의 시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종단의 파벌싸움과 스님들의 비행이 세속의 법정 싸움으로 비화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불교가 우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불교의 사회 참여는 정치집단이나 사회단체,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와는 구별돼야 한다.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입장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적인 각성을 통해서 고통을 해소하고 평온을 얻게 하도록 이끌고, 사회적으로는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으로 이끌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점을 ‘역사의식의 부재’라고 한 이유는.
“오늘날 불교계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고승대덕들은 시대적인 문제, 종교와 사상의 문제에 대한 투철한 비판의식을 갖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을 계발하여 역사를 바꾸게 했다. 그러한 고승 대덕들은 시대의 선각자로서 역사의 변화를 꿰뚫어 보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화석화된 수행에 집착하고, 낡은 방식의 교육으로서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진 선지식을 배출할 수 없으며,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새로운 불교사상을 계발할 수도 없다.”

▶앞으로 연구 계획은 어떻게 되나.
“지난 50여년 돌이켜 보면 아는 것이 증가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더 증가하는 연구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하나를 아는가 싶으면 모르는 게 4~5개 새로 생겨나는 식이었다. 때로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우선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는 것이 발전이라고 위안 삼았다. 퇴임 이후 한국불교사의 이해 체계를 설정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루어져온 우리 학계의 연구성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오고 있는데, 법보신문에서 그러한 계기를 마련해 주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미 삼국시대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의 불교 역할에 대한 검토를 마쳤고, 이제 신라통일기 불교사상 체계의 수립과 선문구산의 성립 문제를 정리하고 있다. 그 뒤에는 고려, 조선, 근현대불교사 문제의 정리로 이어질 것이다. 최후의 작업으로서 한국불교사개설로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건강이 허락해 줄지 모르겠다. 그와는 별개로 재정적인 여건만 허락된다면 우리 불교사학계의 숙원사업으로서 한국불교사대계와 아시아불교사대계의 편찬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 되겠다.”

▶먼 훗날 후학들에게 어떤 학자였다고 평가되시길 바라시나.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정직한 학자였다고 평가되기를 바란다. 적어도 나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불교사상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는 인류 정신문명에서 지혜의 정점에 이른 것이 석가부처님의 불교사상이라고 본다. 그분이 발견한 연기적 세계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최상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연기설은 사회 구성원의 분열과 대립 갈등을 해소해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새해를 맞아 불교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대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외적으로는 남북간의 핵무기 갈등과 국가간의 경제적 문화적 경쟁, 대내적으로는 지역간 세대간의 이념적 갈등이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갈등 해소와 화합의 주체로서 불교계에 거는 기대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교계가 청정과 화합의 승가로서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역사의식의 부족으로 식민지불교의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된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교학 연구의 부진과 화석화된 수행에의 집착에서 벗어나 이 시대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불교철학과 수행방법을 계발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청정과 화합의 이상적인 승가로서 인도에서는 부처님 당시의 초기교단, 그리고 한국에서는 의상의 화엄종과 지눌의 수선사의 교단을 되돌아보고 불교개혁의 지침으로 삼기를 권고해 드린다. 새해를 맞이해 덕담보다 고언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충정을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663호 / 2023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