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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특집] 토끼와 세시풍속

토끼날엔 풍년·무병장수 기원하며 청색 실 차고 다녀

조선 여성차별 정당화 수단으로도

신흥사 명부전에 그려진 토끼 한 쌍. [신흥사]
신흥사 명부전에 그려진 토끼 한 쌍. [신흥사]

십이지(十二支) 동물 중 네 번째인 토끼는 정동(正東)을 지키는 방위신(方位神)이자 오전 5시에서 오전 7시(묘시), 음력 2월을 상징하는 시간신(時間神)으로 여겨졌다. 농경사회에서 2월은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였기에 토끼는 풍년을 기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길한 존재였다. 조상들은 매년 음력 정월 첫 번째 묘일(卯日)을 ‘토끼날’ 혹은 ‘상묘일’로 부르며 올 한해 좋은 기운을 기원했다.

상묘일은 특히 무병장수를 비는 날로 알려져 있다. 이날 새로 뽑은 실을 ‘톳실’이라고 하는데, 이 실을 차고 다니거나 옷을 지어 입으면 수명이 길어지고 재앙을 물리친다는 풍속이 있었다. 한 자 정도의 명주실을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이나 주머니 끈에 차면 명이 길어진다고 여겨 상묘일에는 남녀 할 것 없이 청색 실을 차고 다녔다. 같은 이유로 부녀자들은 상묘일에 베를 짜거나 가장의 옷을 지었다.

그러나 여성성을 상징하기도 했던 토끼를 방정맞은 짐승이라고 여기며 상묘일에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기도 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상묘일에는 남의 식구를 집에 들이지 않았는데, 특히 여자가 먼저 들어가는 것을 꺼렸다. 심지어 여자가 남의 집을 방문하면 우환이 발생하거나 초상이 난다고 여겼다. 부득이 갈 사정이 생기더라도 오후에 가거나 남자가 먼저 대문을 들어선 후 여자가 따라 들어갔다. 

이런 풍습은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는데, 강화도는 이날 부득이하게 남의 집에서 잠을 자게 되면 주인과 손님이 거꾸로 자게 해 주인집의 해를 피했다. 경북 고령은 여자가 먼저 방문하는 것을 막고자 남자들끼리 서로 미리 방문해 줄 것을 부탁하는 품앗이를 했다. 경남 통영은 정초에 작대기를 대문 앞에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경북 달성에서는 남자들이 남의 집 대문뿐 아니라 남의 집 솥뚜껑도 열어 주면 좋다고 여겨 솥뚜껑을 열러 다니기도 했다. 

조선시대 토끼를 경망스럽다고 규정하고 세시풍속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차별·인권유린을 정당화한 아픈 역사다.

고민규 기자 mingg@beopbo.com

[1663호 / 2023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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