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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우리는 본래 깨끗한 그릇이기 때문에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본래성불 갖추고 있음에도 자기가 부처인줄 몰라
깨끗이 씻으면 본래 좋은 것 나타나듯 공부해 불성 찾길
한마음 깨달아 번뇌가 무한한 묘용을 일으키는 자가 부처

지유 스님은 “부처, 중생, 미물, 곤충까지 일체가 평등하다는 것은 확실하다”며, 열심히 공부해서 성불의 본래 모습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지유 스님은 “부처, 중생, 미물, 곤충까지 일체가 평등하다는 것은 확실하다”며, 열심히 공부해서 성불의 본래 모습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부처님의 말씀 중에 ‘중생 본래 성불’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을 믿으십니까? 중생 본래 성불, 우리 모두 처음부터 부처님이었다, 이 말을 믿는지 묻는 것입니다.

저는 새해 93세가 됩니다. 출가는 18세에 했습니다. 절에 와서 처음 ‘중생 본래 성불’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 공부도 하지 않았고 수행도 하지 않아서 지금 중생으로 있는데 중생이 본래 성불이라니,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해서 또다시 성불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가? 옛날에 본래 성불이었는데 지금은 중생이니까 공부해서 성불하더라도 또 중생이 된다는 것인가? 다시 중생이 될 바에야 무엇 때문에 성불하는가?’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동산 스님께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 중생 본래 성불인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성불하려고 애를 씁니까?” 노장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본래 성불이기 때문에 지금 애를 쓰는 것이다.” 그때는 이 말씀을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모를 때는 그 말이 의심이 났지만 깨닫고 보면 딱 맞는 말입니다. 어느 날 제가 TV를 통해 한 방송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TV에서 본 이야기는 세속적인 내용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릇을 깨끗이 닦고 있었습니다. “왜 그릇을 깨끗이 닦습니까?” 하고 옆에서 누가 물었습니다. “이 그릇이 본래 깨끗했기 때문에 닦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답이었습니다. 그릇이 본래 깨끗하지 않았다면 닦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본래 깨끗했기 때문에 닦으면 깨끗해진다는 말이었습니다. 본래 깨끗했던 것이니까 무엇이 묻었을 때 닦으면 깨끗해진다, 이 내용을 TV로 보면서 노장님의 말씀이 딱 떠올랐습니다. 

우리 자신을 그릇에 비유하자면, 지금 무엇이 잘못되어서 우리에게 엉망진창으로 때가 묻어 있는 것입니다. 때를 깨끗이 씻어버리면 본래 좋았던 것이 나타납니다. “본래 성불이기 때문에 공부한다.” 노장님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본래 성불, 그러니까 지금 성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성불의 내용 자체를 모릅니다. 성불이라고 하면 대부분 어떤 부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광명이 나오고 지혜와 신통을 구족한 대단한 무엇이라는 이미지입니다. 그것은 환상이지 부처가 아닙니다. 

성불은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라 하고 성불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깨달은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중생이 본래 불성을 갖추고 있다. 본래 알고 있다.’ 이것입니다. 중생은 자기가 부처인 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알아차리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라 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겁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똑같은 점이 있는가 하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중생이나 부처나 똑같은 점은 무엇입니까? 이 주먹으로 누군가의 머리를 한 대 때리면 그 사람은 주먹이 머리에 부딪히자마자 아프다고 압니다. 바늘이라면 따갑고 뜨거운 물이라면 뜨겁고 차가운 것이라면 차갑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너, 나, 어른, 어린아이, 부처, 중생이 똑같습니다. 깨달았기 때문에 아픈 줄 알고 더운 줄 알고 찬 줄 압니까?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처입니다. 

선문(禪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일러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대가 과연 내 말을 믿을지 그것이 걱정이다.” 젊은 납자는 부처를 알고자 아마 먼 곳에서 선사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물어봅니다. “스님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염려 마십시오.” “그렇다면 알겠다. 무엇이 부처냐고 물었지?” “네.” “네가 바로 부처다.” 

이때 “네. 알았습니다”라고 하면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가만히 생각합니다. ‘내가 깨닫지도 못했는데 어찌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아니라고 하면 믿고 왔다는 소리가 거짓말이 되고, 그렇더라도 “예”라고 답을 하려니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네. 그것은 알겠습니다. 그런 줄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알고 나서는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선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티끌이라도 눈에 들어가면 공화가 어지럽게 떨어진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뜻입니다. “금이나 다이아몬드처럼 아무리 좋은 보석이라도 눈에 들어가면 눈병이니라.” 젊은이는 그 말씀에 깨달았습니다. 

선사들께서는 주먹도 들어 보이고 방망이로 치기도 하고 소리도 질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겠습니까? 주먹을 보이고, 방망이로 치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각자 자기를 똑바로 보라. 내가 손을 들었을 때 너희들이 내가 손든 모습을 보고 있는가? 바로 그놈이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소리를 내고 있으면 소리가 아니라 소리를 듣고 있는 이것이 바로 자신인 줄 알아야 합니다. 바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는 각자가 자기 자신이요 부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 관계없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 중생, 미물, 곤충까지 일체가 평등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항상 근심 걱정으로 덮여 있습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 생각, 저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산란심이라고 합니다. 산란심으로 살다보니 피곤합니다. 피곤하니까 쉬어야겠다며 쉬는 방법이 잠밖에 없어서 잠속에 빠지고 맙니다. 그것을 혼침이라고 합니다. 혼침은 어둡다는 뜻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똑똑히 보고 알고 있지만 산란심이 없어서 깨끗합니다. 깨끗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피곤하지 않으니 어두워서 잠이 오는 것조차도 없습니다.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이 다릅니다. 

여러분, 각자 자신을 보십시오. 다시 묻겠습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여기 앉아있는 것이 내가 아니고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면 앞에 벽이 보입니다. 벽이 내가 아니라 벽을 보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바깥에서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종소리는 오고 가지만 종소리를 듣는 이놈은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종소리를 듣는 이놈이 온전한가, 온전치 못한가. 온전치 못하다 함은 이러쿵저러쿵 하는 취사분별, 좋고 나쁘다는 사량분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과 안개가 낀 것 같은 환상 속에 앉아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다음에는 결국 ‘자야지. 피곤해 죽겠다’ 하며 혼침에 빠집니다. 

깨달은 사람은 산란함과 혼침이 없습니다. 산란함이 없는 것을 정(靜)이라 하며 정이기 때문에 알아도 똑똑히, 분명히, 정확하게, 온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함허 스님께서 ‘금강경오가해’를 풀어놓으신 서문의 첫 단어가 ‘일물(一物)’입니다. ‘일물’이라고 하면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일물’입니다. 그렇다면 ‘일물’은 무엇입니까? 차가우면 찬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때리면 때리는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도, 중생도, 너도, 나도, 짐승도, 벌레도 일체가 똑같습니다. 이것이 일물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항상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살아나가면서 답답하고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자살해 죽는 사람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고통, 괴로움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괴롭다고 합니다. 권력이 없어서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명예가 없어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서, 무슨 권리가 없어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출가 전 왕자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셨지만, 세상의 무상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문, 승려가 되셨습니다. 승려는 가진 재산이라고는 몸을 가리는 가사 한 벌, 밥을 얻어먹을 때 사용하는 바리때밖에 없습니다. 가장 가난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불행하셨습니까? 부처님보다 더 행복한 이가 없을 정도로 최고로 행복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깨달았다면 불평불만을 할 필요도, 불안할 것도 없습니다. 더우면 더위에 맞추고 추우면 추운데 맞춰 살면 됩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복잡하면 복잡한 대로, 적적하면 적적한 대로 환경에 맞추면 됩니다. 

깨닫기 전에는 무한한 번뇌를 일으켰던 것이, 한마음을 깨달아서 번뇌가 거꾸로 무한한 묘용을 일으키는 자가 모든 부처님입니다. 중생도 생각하고 부처님도 생각하는데 중생은 생각 자체가 번뇌고, 모든 부처님은 신통 묘용입니다. 웃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통 묘용입니다. 한마음을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해 12월31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보운 스님) 보제루에서 봉행된 ‘함허득통대선사의 금강경 서문 선설(禪說)’ 5회차 회향법회에서 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664호 / 2023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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