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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용화사 주지 종묵 스님

“우리 곁 인연 소중히 여기며 차별 없는 세상 펼치고 싶어!”

참배한 사찰에 깊은 ‘정감’ 
중학교 때 입산 해 삭발

“큰 절로 가라!” 조언에
고산 스님과 은사 인연

“칭찬 못 들었지만 찾아오셔
손잡아 준 순간 평생 기억”

고성 운흥사 사격 일신
대작불사 식견‧추진 탁월

가섭존자 발우 들고 있는
‘벽발산’과 마주한 미륵산

정성 모아 미륵불 안치하면
경전 속 숭고한 이야기 완성

용화세계, ‘선업’ 쌓아야 가능
우리 곁 인연 소중히 여겨야

용화사 주지 종묵 스님은 “생명 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여라는 부처님 말씀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시대”라며 “서로 만나면 기뻐하고, 좋은 말을 나누면 갈등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열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주영미 기자
용화사 주지 종묵 스님은 “생명 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여라는 부처님 말씀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시대”라며 “서로 만나면 기뻐하고, 좋은 말을 나누면 갈등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열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주영미 기자
미륵산은 천혜의 절경을 안고 있다.

 

‘동양의 나폴리’ 통영은 백석(白石‧1912 ~1996)의 시(‘통영 2’)처럼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통영이 품은 150여 개의 섬 중 보물섬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미륵도(彌勒島)다. 이 섬의 미륵산(彌勒山‧458.4m)에서 감상하는 한려해상 풍경은 일품이다. 에메랄드빛 바다에 떠 있는 한산도와 거제도, 소매물도, 그리고 통영항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맑은 날이면 세존도, 연화도, 보리도 등의 불심 깃든 섬들도 안을 수 있다. 

시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이 산문 ‘통영 5’에서 “통영과 한산도 일대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우리가 미륵도 미륵산 상봉에 올라 한려수도 일대를 부감할 때 특별히 통영 포구와 한산도 일폭의 천연미는 다시 있을 수 없을 것이라 단언할 뿐”이라고 했을 정도다. ‘토지(土地)’의 박경리,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을 비롯해 한국의 피카소 전혁림, 시인 유치환, 김춘수, 극작가 유치진이 통영의 천혜 비경을 보고 자랐다.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용화사.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용화사.

불자들에게 미륵도는 보물섬을 넘어 성도(聖島)이다. 그 언젠가 미륵부처님이 내려올 땅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미륵산으로 강림한 미륵부처님이 법을 필 도량도 조성해 놓았다. 용화사(龍華寺)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듯이, 미륵부처님은 용화수 아래에서 깨닫는다고 했다. 미륵산을 오르는 들머리,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恩霑) 스님에 의해 창건된 이 절은 원래 정수사(淨水寺)였다. 고려 원종 원년(1260)에 산사태로 쓸려나가자 3년 뒤 자윤, 성화 스님이 중창하며 천택사(天澤寺)로 개칭했다. 그 후 조선 인조 6년(1628) 절은 갑작스러운 화재로 인해 폐사 지경에 이르렀다. 화마로 전소된 절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벽담(碧潭) 스님은 산(지금의 미륵산) 정상 부근에 올라가 미륵불에게 칠일 기도를 올렸다. 회향 날 밤 신인이 나타나 일렀다.

‘나는 미륵불이다. 이 산은 용화회상(龍華會上) 도량이니 가람을 새로 지어 용화사라 하라. 만세(萬歲)에 전해지리라!’

벽담 스님은 그 가르침에 의지해 절을 짓고 천택사에서 용화사(龍華寺)로 바꿨다. 
 

용화사 보광·명부·용화전.
용화사 보광·명부·용화전.

용화사는 보광전(도 지정 유형문화재), 용화전, 적묵당, 해월루, 탐진당, 설법전, 명부전, 삼성각, 종루, 요사(寮舍) 2동 등이 있다. ‘절구통 수좌’ 효봉 스님의 사리탑과 불사리4사자법륜탑이 있다. 불사리4사자법륜탑은 아쇼카 석주 양식의 원주 석탑으로 조성되어 있어 참배객들의 이목을 끈다. 현재 이 가람을 보존‧관리하는 주지는 종묵 스님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맞은 설날 외갓집에 갔다. 외가댁 가족이 김해의 어느 절을 참배한다기에 무심코 따라갔더랬다. 주지 스님 한 분에 동자승 세 명이 단출하게 살고 있었는데 정감이 갔다. 하산하는 길에도 “절에 들어오면 참 좋겠다”는 주지 스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도 절에 가 살고 싶었다. 부모님께 자신의 바람을 전했으나 아버지의 불호령만 떨어졌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절에 가 있었다. 한겨울 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계셨다. 

“절에 가 살고 싶습니다!”
“이놈! 자꾸 절에 간다고 해. 네 마음대로 해라!”

노기 서린 일언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네 마음대로 해라’를 ‘허락’으로 믿고는 집을 나서 절로 들어섰다. 중학교 1학년 말 때의 일이다. 2년여쯤 머물렀을까. 염불을 배우고 익히는 공부에 제법 재미를 들였을 무렵이다. 지나가다 들렸던 한 스님이 일러 주었다.

“좋은 스님이 되려면 큰 절에서 살아야 한다. 범어사로 가거라!”

걷고 걸어서 범어사에 닿았다. 30여 명의 행자가 있었지만 가장 어렸다. 은사는 고산 혜원(杲山 慧元‧1934∼2021, 조계종 총무원장, 쌍계사 조실 역임) 스님과 맺어졌다.(1969)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후 범어사, 표충사, 마곡사 등의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문경 혜국사와 남해 운대암, 진주 보광사, 거제 세진암의 주지를 맡았다. 특히 고성 운흥사 주지를 맡으며 보제루, 종각, 요사채 등을 지어가며 절을 일신했다. 포교와 도량 불사의 공로를 인정받아 총무원장 표창장을 받았다.(2012) 

용화사 주지를 맡은 후 어려운 사중 살림에도 장학사업과 불우이웃돕기 등의 행사를 끊임없이 이어왔다. 사찰과 주민이 함께 호흡하며 지역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철칙에 따른 것이다. 용화사 템플스테이관은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고 평가될 만큼 유명한데, 스님은 유독 다문화 가정을 보듬으려 애쓰고 있다. 고향에서부터 지켜온 불심을 더욱 돈독히 다져가며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한 통영불교사암연합회장을 맡으며(2017) 종단을 초월한 사부대중의 불심을 응축시켜 통영 불교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 특히 독거노인, 장애인시설 지원 등의 자비나눔 행사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운흥사 불사를 주도하던 중 용화사 주지를 맡았다. 큰 불사 중에는 자리를 잘 옮기지 않는 법인데 이례적이다.

“용화사와는 50년 전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부산 동래 법륜사에서 첫 수계를 받은 후 절을 떠나 당도한 곳이 용화사였습니다. 템플스테이관이 들어선 것을 빼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은사 스님의 언명이 있었기에 왔습니다. ‘종묵은 집을 잘 지으니 용화사 주지를 맡아 절을 정비하라’ 하셨습니다.” 

율사이셨던 고산 스님의 제자 사랑은 무척이나 컸는데 그만큼 엄격히 대했다. 어린 나이에 출가했으니 “특별한 사랑을 받았을 듯싶다”고 하니 미소만 보인다.

“동래 법륜사에 머물 때 큰 스님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내려오시는데 이틀 전부터 전 사중이 비상이었습니다. 처음엔 ‘엄한 스님’께서 오시니 긴장하나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잘 모시려는 정성이 역력히 보였습니다. 2년 가까이 시봉했는데 ‘청정’ 그 자체이셨고, 내외명철 한 큰 스님이셨습니다. 제게 칭찬을 해 주신 적은 없지만 찾아오셔서 지긋이 손을 잡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제 생애 가장 즐거웠던 순간입니다. 지금도 은사 스님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늘 말씀 하셨습니다. ‘시간 허투루 쓰지 마라’, ‘항상 기도하고 정진하여 성불해라.’ 지금도 뼈에 새기고 있습니다.”

용화사 주지 부임 후 삼성각을 신축하고 요사채 2개동을 정비했다. 그간에 보여준 불사 원력과 지휘력을 감안하면 이 정도에 “불사 마쳤다”며 자족할 종묵 스님이 아니다.

“사중의 땅과 시의 땅이 다소 복잡하게 얽혀져 있어 신축 불사를 추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절로 들어서는 일주문을 세워보려 수년에 걸쳐 노력했는데 모두 수포가 되었습니다.” 

일주문 건립에 마음을 쓴 이유가 있다. 번듯한 일주문 하나 없으니 용화사 신도가 아니면 불자들조차 어디로 들어서야 참배할 수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 그래도 한려해상 다도해 풍광에 젖어 보려는 사람들이 미륵산을 오르내리는 중에 애써 절을 찾곤 했는데, ‘미륵산 케이블카’가 개통(2008)되며 등산객의 발길조차 뜸해졌다. 개장 8년 만에 누적 인원 1000만 명을 넘었지만 참배객은 현저히 줄었다. 용화사가 포교의 한계점에 이른 건 이때부터일 것이다. 용화사만의 특성을 살린 ‘그 무엇’이 필요한 시점이다.

재정‧행정 지원 토대가 마련된다면 추진하고 싶은 불사가 있느냐의 질문에 종묵 스님은 “주지 부임 직후 세웠던 원력을  펼쳐보고 싶다”고 했다. 

“미륵산 용화사 미륵대불 조성입니다!” 

종묵 스님이 구상해 본 건 좌불 높이만 15m인 대형 미륵불이다. 좌대까지 합치면 총 21m, 아파트 7층 높이다. 물론 상호나 크기 등은 미륵산의 품을 고려하여 조정할 것이다. 대불을 빚으려는 연유가 궁금하다.

“통영에서 가장 높은 산은 벽방산(碧芳山‧650m)입니다. 거제도와 사량도, 진해‧자란만을 조망할 수 있는 명산입니다. 희유하게도 이 산의 형상은 누군가가 발우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누구일까요?” 

이 산에 자리한 천년고찰 안정사(安靜寺)의 사지(寺誌)가 답을 준다고 했다. 

‘사천왕이 가섭불(迦葉佛)이 지닌 푸른 옥으로 만든 바리때인 벽옥발(碧玉鉢)을 받들어 석가세존에게 헌상하니, 세존이 다시 가섭존자에 전하여 그 바리때를 품고 맞은편 계족산(鷄足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미륵불(彌勒佛)이 현신 도래하기를 기다리시니 그 안정(安靜)된 기품을 사모하여 절 이름을 안정사(安靜寺)라 짓게 되었다.’ 

가섭존자가 미륵불에게 드릴 발우를 들고 있는 산이라는 얘기다. 부처님께서 사천왕으로부터 받은 돌 발우를 가섭존자에게 주고, 훗날 현신할 미륵부처님에게 전하라는 이야기는 경전에 새겨져 있다. 그러고 보니 벽방산의 또 다른 이름이 ‘푸른 발우’의 벽발산(碧鉢山)이다. 

종묵 스님이 구상해 본 미륵대불.
종묵 스님이 구상해 본 미륵대불.

“벽발산과 미륵산은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큰 산의 가섭존자가 전하는 발우를 받아야 할 미륵불이니 제법 커야 한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미륵불을 조성하면 경전 상의 숭고한 이야기를 완성하는 겁니다. 경전(미륵하생경)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강림할 때)의 시절은 조화롭다. 108가지의 우환이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균등하고 평등하여 모두 다 뜻을 같이하여 서로 만나면 기뻐하고, 서로 좋은 말을 하며, 언어는 한 종류여서 서로 차별이 없으니 저 우단월(優單越‧수미산 북쪽의 이상세계) 세계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내려오시는 게 아니라, 미륵부처님을 친견할 만한 풍토가 조성되어야 강림하시는 겁니다. 우리 곁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차별하지 않고, 말 한마디도 부드럽게 하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미륵대불 조성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부처님께서 구현하시려 했던, 우리가 꿈꿔온 세계를 면면히 구축해 가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다지는 불사입니다.” 

미륵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이는 모두 아라한이나 불퇴전에 이른다고 했지만, 친견하려면 청정심을 내어 선업을 쌓아야만 한다. 56억 년 후의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평화로운 세상을 조성해 가자는 제안이자 바람이다.

“우리 사회만 보아도 계층 간의 갈등이 심합니다. 미얀마 군부의 반대 세력 유혈 탄압으로 발생한 피란민이 2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어린 생명까지도 앗아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탐욕에 눈이 먼 어리석음이 일으킨 고통이자 비극입니다. ‘생명 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여라’는 부처님 말씀을 더욱더 절실하게 새기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서로 만나면 기뻐하고, 좋은 말을 나누면 갈등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열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확신하고 또 믿어야 합니다.”

천혜의 절경을 품은 벽발산과 미륵산을 연결하면 두 산은 더 숭고한 불산(佛山)으로 서게 된다. 케이블카를 이용해 산을 오른 사람도 미륵대불을 친견하기 위해 절로 들어설 것이다. 용화사는 활기를 되찾고 통영의 포교 지평은 그만큼 확대될 것이다. 녹록지 않지만, 정토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인연이 닿으면 시작할 수 있는 불사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664호 / 2023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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