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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가산사 주지 지원 스님

"800 승군과 승장(僧將) 영규 대사 명예 회복에 최선 다할 터!"

‘불소행찬’ 읽으며 감동 혜정 스님 은사로 출가

임란 최초 육지전 승리 이끈 건 ‘기허 영규’ 대사
숭고한 승군 희생 도려낸 ‘칠백의총’은 ‘역사 왜곡’

숭유억불 속 승군 봉기 와 활약 이 시대에도 철저 외면
인연 닿아 재정 마련되면 ‘영규 대사 괘불’ 조성

호국문화체험관 적극 활용10월 호국대재 성대 봉행
사찰 중흥 발원 기도정진침체된 가산사에 ‘새 활기’

가산사 주지 지원 스님은 “가산사가 품고 있는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겠다”며 “올해 10월에는 한국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호국대재’를 성대하게 봉행하려 한다”고 전했다.
가산사 주지 지원 스님은 “가산사가 품고 있는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겠다”며 “올해 10월에는 한국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호국대재’를 성대하게 봉행하려 한다”고 전했다.
가산사 전경.
가산사 전경.

충북 옥천 채운산(彩雲山) 자락의 가산사(佳山寺) 새벽 예불에 들어서면 주지 지원 스님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들려 온다.

“청주성, 금산성 전투 전사 호국승병 일체 열명영가…아미타불 사십팔대원 왕생극락 상품상생 하옵소서!”

임진왜란(1592∼1598) 초기 육지전의 첫 승으로 기록된 ‘청주성 탈환(1592. 음력 8.1)’을 이끌었던 승장(僧將)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1592) 대사와 함께한 승군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기도다.

임란 전부터 조선의 기운은 쇠락해 가고 있었다.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 훈구(勳舊)·사림(士林)의 세력 싸움 등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는 실종됐다. 선조(宣祖)가 즉위하며 당쟁은 더욱 격화됐는데 외침에 대비한 국방 체제마저도 무너져 갔다.

부산포 침입 3개월 만에 왜군의 손에 평양성이 떨어졌다. 왜군의 기세에 놀란 관군은 항전은커녕 혼비백산하며 줄행랑을 놓았고, 선조는 개성을 거쳐 의주로 피난 갔다. ‘들도 산도 섬도 모두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시체들은 살쾡이와 이리의 밥이 되고, 까마귀와 솔개가 쪼아댔다.’ 전쟁의 참혹함을 목도한 영규 대사는 승병을 모았다.

“내가 비록 산에 있으면서 솔잎을 먹고, 고사리를 씹고 있지만 국은을 입었으니 티끌만큼이라도 갚는 날이 있어야 한다. 큰 난리를 만났으니 의병장이 되고자 한다. 우리가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마라.”

영규 대사의 호소에 감동한 스님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이내 충청‧전라권의 스님들도 합류해 800명(1300‧2000명 기록도 있다)에 이르렀다고 한다. 승군은 용맹하고 담대했다. 임진왜란의 전쟁을 기록한 ‘쇄미록(鎖尾錄‧보물 제1096호)’ 저자 오희문(吳希文)은 이렇게 말한다.

“공주에 있던 승려 영규가 모집한 승군 800명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입하자 제군(諸軍)이 승세를 타고 수급(首級) 15과를 참획(斬獲) 했습니다. 남은 적은 밤을 틈타 도망쳤습니다.”

승군이 분연히 일어서자 유생인 중봉(重峯) 조헌(趙憲)도 의병을 모았다. 영규 대사의 의승과 조헌의 의병은 공주 갑사‧영은사, 금산 보석사, 옥천 가산사 등에서 훈련하며 전의를 다졌다.

금산성 제1전투에 이어 청주성 전투에서도 대승하자 선조는 묘향산 보현사에 주석하고 있던 청허 휴정 대사를 팔도 도총섭으로 위촉했다. 청허 휴정은 전국 사찰에 봉기를 요청하는 격문을 돌렸다. 그러니 의승군의 전국 봉기 확대를 촉발한 건 영규 대사이다.

금산성 제2전투에서는 전멸당했다.(1592. 음력 8.18)  구국의 충정심만으로 무모하게 돌진한 중봉 조헌의 전략 부족에 따른 패배였다는게 학계의 중론이다. 일설에 따르면 영규 대사는 조헌의 의병을 돕기는커녕 관군의 참전을 방해한 윤선각(공주감영 충청감사)을 단죄하려 큰 부상을 안은 채 계룡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물론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전투에는 승병 800명(‘쇄미록’ 근거)과 의병 700명이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 전승업(全承業) 등이 전사자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했다. 그런데 왜 ‘칠백의총’일까? 조헌과 수하 의병 700명의 공적만을 기렸기 때문이다. 희생된 승군이 통째로 사라진 역사. 지원 스님은 이것을 바로잡으려 한다.

고향은 서울 영등포다. 아버지는 가톨릭 신자이고 어머니는 개신교 신자였다. 고등학교에 이어 채플이 필수인 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불교에 입문하고는 화계사 삼성암을 다녔다. 아버지는 지인이 있는 경기도 송추의 동네 산신각을 짓는데 큰 시주자로 나섰다. 그 후 동생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봄‧가을로 산신각을 찾아 치성을 드렸다.

자신의 주변에 피가 흥건한 꿈을 꾸다 일어났다. 송추 산신각 가는 당일,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켜니 마침 염주를 돌리며 ‘천수경’을 독송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염주를 들고 ‘천수경’ 을 열었다. 국어책 읽듯이 독송했지만 간절함을 담았다.

안개 자욱한 이른 아침.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즈음 택시 한 대가 4인 가족을 탄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차는 도로에서 벗어나 논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살았으니 가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산신각에서 가족의 복을 빌어주던 할머니가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실 날이었다. 네 몸에서 빛이 나와 살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불서를 사 달라” 했고, 아버지는 ‘한글대장경’ 20권을 안겼다. ‘아함경’의 ‘불소행찬’을 마주하니 환희가 차올랐다.  ‘역대 조사 중에 출가 안 한 이가 없다’는 대목을 보고는 서울 선학원 범행 스님을 친견하며 출가의 뜻을 전했다. 범행 스님은 일단 대학 공부를 더 하라는 듯 만류했지만 ‘시민 선방’에 들어가 벽을 보고 앉았다. 다음 날 선학원 청년회에 입회하고는 지관 스님의 ‘금강경’‧‘혈맥론’ 강의와 범행 스님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다.

6개월 후 출가를 단행했다. 장남의 출가를 쉬이 허락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아들의 허리띠를 잡았지만 끝내 놓아야 했다. 동국대 현각 스님의 권유로 법주사 산문을 열었다.(1976) 은사는 혜정(慧淨·1933∼ 2011) 스님과 맺어졌고, 혜정 스님의 율맥을 이었다.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청주불교방송 사장을 역임한 지원 스님은 ‘직지 홍보’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여 왔다. 가산사 주지 소임을 맡은 건 2021년 8월이다.

법주사로 첫걸음 했던 당시의 회고를 청했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설산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정겨웠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머물렀던 숲 같았습니다.”

유독 법주사 관음전에서 수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졌던 지원 스님인데 꿈과 연관 있다고 한다.

“출가한 지 얼마 안 될 때입니다. 꿈에서 제가 관음보살로 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재 동자가 ‘어디로 가시느냐?’ 묻기에 ‘중생의 마음을 고치러 간다. 내 옷자락에 억만 중생이 매달릴 것’이라 답했습니다. 꿈에서 깨자마자 관음전으로 가 108배를 올리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길을 올곧이 걷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영정각에는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영정각에는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조선 숙종 때 호국사찰로 지정된 후  ‘영규 대사‧조헌 선생’ 두 영정을 봉안하는 영정각(충북도 기념물 제115호)이 조성 됐다. 승군을 이끈 영규 대사와 의병을 이끈 조헌 선생의 영정을 함께 봉안해 온 곳은 가산사가 유일하다. 현재의 영정은 ‘원본’이 아니라 새롭게 제작한 것이다. 원래의 영정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강탈해 갔다. 왜구를 상대로 조선에 최초의 승리를 안겨 준 두 '영웅의 영정'을 봉안 한 가산사가 항일투쟁의 근거지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가산사가 근대에 이르러서도 '호국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영규 대사 자신이 쓴 글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쇄미록’, ‘선조실록’, ‘갑사사적시종기’ 등의 여러 사료들을 펼쳐야 여정 속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묘향산의 청허 휴정(서산 대사) 제자로서 사명 유정(사명 대사)과는 동문입니다. 휴정 문하에서 20년 동안 범어를 공부하며 다양한 경전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산할 때 ‘호서 지방으로 가 보라’는 서산 대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갑사에 바랑을 내려놓았습니다. 성품은 장작도 직접 팰 정도로 검소했습니다. 겨울에는 솜도 넣지 않은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대중들이 너무 검박하다고 하니 ‘옷이라는 것은단지 몸을 덮는 것이면 족하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매일 야심한 시각에 산에 올라하늘을 살폈다고 합니다. 전란을 예견하셨으리라 봅니다.”

지원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가 조선의 승군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 시대 유생들은 ‘젊은 승려는 환속시켜라’ ‘여자는 절대 절에 못 간다’ ‘남자가 절에 가면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 ‘사월초파일 등을 달면 스님과 신도를 처벌하라’ 등의 불교 말살 상소를 끝없이 올렸습니다. 그럼에도 전국 사찰의 스님들이 전쟁터로 향했습니다. 당시 승군은 스스로 병기를 제작하고, 식량까지 조달해야 했습니다. 영규 대사의 승군은 칼이 부족해 낫을 들었을 정도입니다. 승군의 용맹은 각종 사료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승병들은 죽음을 두려워 않고 적군 속으로 곧장 진격하여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이 승병을 선봉으로 내세웠다면 왜적과의 모든 전투를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생들은 승군의 고고한 희생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지원 스님은 '칠백의총'이 대표적이라고 짚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금산성 제2전투에 투입된 승군은 적어도 600명에서 1000명은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천삼백의총’ ‘천칠백의총’이라 해야 옳습니다. 이미 제기된 바 있는 ‘승군‧의병의총’도 좋습니다."

‘칠백의총’ 문제를 지원 스님이 처음으로 제기하는 건 아니다. 한때 육‧해‧공 법사들이 ‘칠백의총’에서 800의승제를 수년간 봉행하며 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계 당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북 남원이 '만인의총'이라 명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순절한 의사가 1만 명이어서가 아니라 남원성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을 기억하는 ‘만인’입니다. 조선을 지나 현대에 이른 지금도 ‘칠백의총’이라 하는 건,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려 목탁 대신 칼을 들고 참전해 목숨을 잃은 승군의 공로를 폄훼하는 것이자 역사 왜곡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사실을 인지한 정부가 '칠백의총'만을 고집하는 건 불교계를 우롱, 기만하는 것입니다. 2000만 불자의 염원을 담아 현 정부에도 시정을 촉구합니다. ”

영규 대사와 관련된 사찰과 단체들의 힘이 결집되어야 한다. 종단 차원의 행보도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가산사 ‘호국 충혼탑’.
가산사 ‘호국 충혼탑’.

“가산사에는 영정각 외에도 영규 대사의 승군과 조헌의 의병을 기념하는 ‘호국충혼탑’과 ‘호국문화체험관’이 조성돼 있습니다.(2020) 코로나 국면이 안정된 만큼 올해부터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승군의 호국 정신’을 전하려 합니다. 가산사 주변에는 전적지 15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잇는 20km의 길을 ‘영규 대사‧조헌 호국로’로 지정하려 합니다.”

가산사 영정각.
가산사 영정각.

가산사에는 영정각과 함께 충북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된 산신각이 있다. 우리나라 산신각 중에서 가장 작을 법한 이 산신각은 ‘효험’이 크다 하여 불자들 사이에서도 정평 나 있다. 지원 스님은 이곳에서만도 8개월째 정진하며 가산사의 재도약을 발원하고 있다. 옥천군의 인구 감소 등으로 불자들의 발길이 눈에 띄게 끊어졌는데 이를 다시 잇기 위함이다. 한 동안 중단됐던 각종 법회도 다시 열고 있다.

“청정한 원력을 세우면 부처님 가피가 내려진다고 했습니다. 올해 10월에는 한국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호국대재’를 성대하게 봉행하려 합니다. 가을 산사음악회 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작은 바람 하나가 있다. 영규 대사를 주인공으로 한 괘불을 조성하고 싶다고 한다.

“인연이 닿는다면 10월에 그 괘불을 걸고 호국대재를 봉행하고 싶습니다!”

올해로 법납 47, 세납 71세인 지원 스님은 새롭게 세운 '10년 서원'을 전했다.

"향후 10년은 민족의 아픔을 덜어주고 국가와 민족에게 평화와 평안을 주는 호국의 간성, 이 시대의 승군이 되고자 서원합니다."  

지원 스님은 법보신문 독자들에게 사대부였던 조위한의 시 ‘애영규(哀靈圭‧영규를 애도하다)’를 전했다.

‘석장 날리며 호서로 나가/ 창을 들을 의승들을 모으려하매/ 그 소리에 동참하려 천리에서 응하고/ 칼을 휘두르매 만인이 호응하였네./ 싸움터에 나가서는 영광스런 귀신 되어/ 도망한 겁쟁이를 부끄럽게 하였도다./ 나라 위해 능히 죽은 그대 없었다면/ 육식하는 자들이 몸을 보전했을까?’ (김상일 교수 역)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666호 / 2023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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