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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하게 맞고 찢겼고, 그리고 구원받았다”

  • 출판
  • 입력 2023.02.03 14:39
  • 수정 2023.02.03 20:48
  • 호수 1667
  • 댓글 0

전쟁 휩싸인 베트남 현실 목도한 삼십 대 수행자의 기록
‘동체대비’의 참뜻 실천한 대승보살의 진면목 보여줘

젊은 틱낫한의 일기
​​​​​​​틱낫한 지음·권선아 번역 / 김영사 / 244쪽 / 1만5800원

‘이 일기 모음은 검열을 통과하지 못할 것 같다. 만일 출판이 될 수 없다면 나는 친구들이 서로 돌려보기를 바란다. 나는 내일 베트남을 떠나지만, 벌써 고국이 그립다.’

1966년 5월11일, 이상하리 만치 환한 사이공의 밤하늘 아래서 마흔 살의 틱낫한 스님은 마지막 일기를 썼다.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라 결심했지만, 베트남 정부는
끝내 그의 귀국을 금지시켰다. 고국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닌지 40여년 만인 2007년에야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으로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삼십 대의 틱낫한 스님이 남긴 기록이다. 1962년 미국 뉴저지에서 시작된다. 1957년 베트남 중부 산악지대에 오두막 수행처 프엉보이를 일구기 시작한 틱낫한 스님은 독립 후 혼란에 빠진 베트남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국민들을 위해 불교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동시에 몸을 움츠리는 기득권층의 현실에 가슴 아파했다. 결국 민족의 분열과 대립 속에서 독재 정부의 탄압에 쫓기듯 1961년 베트남을 떠나야 했다. 당시를 회고한 일기에는 급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리는 체포되었고, 나는 사이공으로 피해야 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보호’라는 명목으로 정부군이 세운 근처의 마을로 강제 이주해야만 했다.…나는 남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나의 안전을 위해서 내가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트남을 떠나 미국 프린스턴과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스님은 그리움과 함께 베트남에서 목도해야 했던 가슴 아픈 현실을 일기에 담기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의 고국에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과 허물어져 갈 프엉보이에 대한 절망이 늘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스님은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의 평안과 깨달음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그의 명상은 내면의 평화를 찾고 자신을 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세간의 고통과 혼란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끝없이 자신에게 되뇌였다.

‘우리는 지금 가장 외롭지만, 폭풍우 끝에서 살아남을 때마다 조금씩 성장한다. 이와 같은 폭풍우가 없었다면 나는 오늘의 나일 수 없다.…나는 심하게 맞고 찢겼고, 그리고 구원받았다.’

‘서로가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혼자일 수 없다.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서기를 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끔씩이라도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들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해 생각했으면 하는 것이다.’

전쟁에 휩싸인 고국으로부터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지구 반대편에서 그는 절절하게 고통을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맞섰다. 절망을 떠올리지 않았고, 굴복할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떠한 고통도 외면하지 않는 관세음보살의 자비이며, 모든 중생의 성불을 믿고 경배하는 상불경보살의 미소였다.

하지만 홀로 떨어진 미국에서 겪어야만 했던 지독한 고독의 흔적 또한 곳곳에서 읽혀진다.
‘이곳에선 정말 아프고 싶지 않다. 아픈 나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할 친구나 친척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일기는 스님이 미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돌아온 직후인 1964년 2월 다시 이어진다. 3년 가까이 미국에 있다 돌아온 고국, 전쟁이 이어지고 있던 베트남의 현실은 더욱 암담해져 있었다.

‘시골에서 온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도시로 쏟아져 들어왔다. 친구들과 나는 이 나라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걸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베트남 불교는 2천년의 역사를 가졌건만, 사회를 옥죄고 있는 올가미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암담한 현실 앞에 무릎 꿇기에는 스님의 자비는 너무도 확고한 믿음이었다. 모든 현상이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 고통을 극복하고 마침내 평안을 이룰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 위에서 세상을 향한 스님의 자비는 더욱 샘솟았다. 스님은 한 뼘 더 성장해 있었다.

‘부처님께서 끝도 없는 중생의 고통을 목격할 때, 그는 틀림없이 깊이 염려할 것이다. 어떻게 거기 그냥 앉아서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을 생각해보라. 앉아있고 미소 짓는 모습으로 그를 조각한 것은 바로 우리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30대 수행자의 일기는 보살의 자비가 왜 이 세상에 필요하며 진정한 대승불교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틱낫한 스님의 예상대로 이 책은 베트남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스님이 베트남을 떠나며 남겨둔 원고를 지인들이 돌려 읽으며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98년 미국에서다.

틱낫한 스님의 입적 1주기에 맞춰 책을 번역·출간한 권선아 작가는 세 차례에 걸친 스님의 방한 당시 기획과 통역을 맡았다. 2003년 방한한 스님으로부터 처음 이 책을 받았다.

“스님은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궁극의 세계를 말씀하셨지만, 스님의 열반 소식에 더 이상 스님과 함께 듣고, 걷고, 앉을 수 없다는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스님의 일기를 통해 한없는 스님의 자비, 그리고 그 원천이 무엇이었는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울음을 계속 듣고 고통을 어루만지기 위해 끝없이 찾아 나섰던 스승의 모습과 그 자비가 결코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느낄 것입니다. 스님이 떠나셨을 때 플럼빌리지의 많은 제자들은 슬픔 때문에 울었지만 그 울음 끝에서, 우리의 수행 곁에 스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은 이유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프엉보이는 지금 주춧돌과 기둥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베트남 정부는 지금까지도 그곳이 복원되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곳에 스님이 손수 심었던 종려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나 아름드리가 되었고, 작은 풀꽃들은 올해도 변함없이 피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667호 / 2023년 2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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