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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덕림사 주지 휴완 스님

“우리의 작은 ‘배려’가 모이고 연결되면 ‘안녕’해집니다”

태산 같은 가난서 벗어나려 
홀로 바다 건너 전파사 취직 

여학생, “공부는 때가 있다”
크게 각성…1년 후 고교진학

산사에서 폐결핵 투병 중 
‘배고픈 소크라테스’ 선택

인간의 품위란 무엇인가?
출가 후에도 학문에 매진  

함덕 덕림사 대 중창불사
단아하고 이국적 도심 사찰

종단명 등기‧재정 공개
“절은 내 것 아닌 우리 것”

연로한 신도에게 매년 용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 

제주 노인복지관 12년 운영
“노인 고독 ‘자긍심’이 치유”

오동동에 쾌 넓은 부지 확보
주간보호센터‧요양원 ‘희망’  

10여년 전부터 사찰 재정을 공개해온 덕림사 주지 휴완 스님은 “사찰은 부처님 법을 펴는 공간이자 신심을 쌓아가며 변화해 가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곳”이라며 “누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여년 전부터 사찰 재정을 공개해온 덕림사 주지 휴완 스님은 “사찰은 부처님 법을 펴는 공간이자 신심을 쌓아가며 변화해 가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곳”이라며 “누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덕의 바다는 늘 아름답다.
함덕의 바다는 늘 아름답다.

에메랄드 빛깔 품은 파도가 출렁이는 제주 조천읍의 함덕해수욕장(올레길 19코스)은 사계절 내내 활기 넘치는 곳이다. 여름이면 서핑,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봄‧가을‧겨울에도 소나무 무성한  서오봉 앞으로 펼쳐진 바다 풍경을 만끽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함덕 해변에서 호텔과 상가 건물들이 즐비한 시내 방향으로 틀어 5분여 걸어 들어오면 덕림사(德林寺)다. 상업지구에 자리한 사찰임에도 규모가 제법 크다. 대웅전과 휴심당, 요사채, 차실 등이 향나무, 야자나무와 어우러져 이국적이면서도 단아한 풍광을 자아낸다. 대웅전(현 요사채) 하나 서 있던 991㎡(300여 평)의 덕림사를 중창불사를 일으켜 2975㎡(900여 평) 규모의 사격으로 일신시킨 스님은 현 주지 법해 휴완(法海 休完) 스님이다.

해남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2살 때 부모님을 따라 제주도에 들어왔다. 남의 집 담 옆에 움막을 짓고 살아야 했을 정도로 아버지가 짊어온 가난은 태산보다 무거웠다. 10여 년 후 부친은 태고종으로 출가하여 사찰의 주지를 맡았다. 자연스레 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며 불교 의식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천수경’은 물론 약찬게(略纂偈), 각단불공(各壇佛供), 관음시식(觀音施食) 등을 줄줄이 외웠을 정도다. 하지만 버티고 버텨내며 살아온 세월이 제법 되었음에도 가난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았다. 하여, 중학교 졸업 후 홀로 바다를 건넜다.

부산 서면의 ‘TV 학원’에 들어가 1년 동안 기술을 배우고는 연산동의 한 전파사에 취직했다. 한편에 야전 침대 놓고 냄비 밥 지어가며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만 해도 연산동은 TV 난청 지역이었기에 안테나 설치‧교체 주문이 많았다. 안테나를 받치는 길이 2m의 무거운 파이프를 들고 높은 지대로 이동하기도 힘겨운데, 혹한의 찬바람 속에서도 그 파이프를 1시간 넘게 붙들고 있어야 했다. 꽁꽁 얼어가는 손을 보면서 시린 눈물을 뚝뚝 흘릴 때가 많았더랬다.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밤늦게 문을 두드렸다. 내일 야유회에서 사용할 전축을 담당했는데 그 전축이 고장 났다고 들고 온 것이다. 전기제품 고칠 능력이 없으니 돌아가라 하는데도 눈물을 글썽이며 사정했다. 다행히도 끊어진 선만 연결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여학생은 “고맙다”라며 한마디 전했다. 

“기술은 나중에 배워도 되지만 공부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공부하는 게 어떨까요?”

가슴에 큰 파문이 일었다. 일하는 내내 그 한마디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1년의 고민 끝에 제주도로 돌아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때 나이가 19살이었다. 

전교 꼴찌로 입학했지만 6개월 만에 10등 안에 들었다.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  학업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졸업 즈음 농협, 조흥은행 등에 취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는데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폐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만 해도 폐결핵은 전염 위험성이 높은 질병으로 분류됐고 ‘진단 확정은 사망 선고’라 회자 될 정도로 완치가 어려웠다. 학교 담임 선생님도 취업은 미뤄두고 건강부터 챙기라 권했다.

제주도 송당의 송림사로 들어갔다. 당시엔 폐사에 가까운 절이었다. 항생제는 물론 민방에서 기관지에 특효약이라 불린 동백기름을 달걀과 함께 꾸준히 섭취했다.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서였을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후 순천 선암사 일주문을 열고 삭발염의했다.

휴완 스님이 낸 보이차의 온기가 휴심당(休心堂)의 따듯함에 더해갔다. 진학을 권한 그 여학생을 만나지 못했다면 휴완 스님은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힘겨웠던 때, ‘공부를 해 보라’는 말은 큰 위로였습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내 삶의 끝이 여기가 아니라는 확신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닿으면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여학생과의 만남이 이뤄지지 않았다 해도 저는 출가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출가는 숙연이었다는 뜻이다. 

폐결핵을 앓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도 컸을 법하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기에 정말 살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 불보살님 앞에서 기도한 공덕이 있었던 것일까요? 부처님 가피로 새 생명을 얻었다고 믿습니다. 투병하며 하나 깨우쳤습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이 맞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사람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는 그 명구다. 물질에 대한 욕심, 지배욕을 키울수록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감정과 정서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면 ‘덕(德)’을 함양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다는 사상을 폈던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때 처음으로 인간의 품위란 무엇인지 사유했습니다. 견문을 넓히고, 저 자신을 변화시키려면 끊임없이 공부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폐결핵의 굴레에서 벗어난 휴완 스님은 제주대학교 이공대학에 진학했고 이어서 동방불교대학(범패과)을 졸업했다.(1992) 이후에도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불교학 3학기)을 수료(2002) 하고, 제주국제대학(사회복지학과)을 졸업했다.(2006) 

“처음부터 복지 원력이 있어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참 많은데, 정부가 이 모든 사람을 살필 수 없다면 어떤 시스템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시작한 공부였습니다.”

제주태고복지재단은 ‘제주 태고원’과 ‘미타 요양원’ 두 개의 노인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제주 태고원장(2008∼2010)을 맡고 있던 휴완 스님은 ‘제주특별자치도 노인복지관 위‧수탁사업’ 공모에 뛰어들어 위탁법인으로 선정됐다. 초대 관장은 휴완 스님이 맡았다.(2010) 

제주 노인복지관의 환경은 열악했다. 아파트와 학원에서는 ‘시끄럽다’는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었고, 태풍에 장맛비라도 세차게 내려치면 지하층이 침수되곤 했다. 휴완 스님은 수탁 선정 직후 2년 동안 매년 1억 원씩 2억 원을 자부담했다. 그 전입금으로 강당 방음문 설치공사와 강당 보일러 공사, 음향기기 설치공사 등 수많은 시설을 보강하며 민원을 해결했다. 

낙후한 복지관을 손보며 운영하는 건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을 터다.

“직원은 4명이었기에 이 일, 저 일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 본 사람이, 손 닿은 사람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래도 1층부터 3층까지의 화장실 청소만큼은 제가 했습니다. 한 노인분이 ‘참 안 됐다. 오죽하면 여기서 화장실 청소를 하겠나?’ 하는 시선으로 보세요. ‘제가 이 복지관의 관장’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화장실 깨끗하니 복지관 자주 나오세요’ 했지요. 고개를 끄덕이시며 환하게 웃으시더군요.”
제주 노인복지관에 새로운 활기가 돌면서 도민들의 신뢰도 쌓여갔다. 제주도청으로부터 복지관 증축비 5억 원을 확보해 체육관 시설을 증축했다. 복지관 내에 급식소를 마련해 양질의 식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노인일자리 사업 전개와 함께 노인재능나눔봉사단인 ‘십장생문화예술단’을 창단하여 사회복지시설이나 병원 등에서 위문공연 했다. 

휴완 스님은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받았다.(2013) 아울러 제주 노인복지관도 우수단체 및 사회와 이웃에 모범이 되는 단체로 선정돼 보건복지부장관 표창(2015)을 받았으며 사회복지시설평가 최우수등급을 획득(2015, 2018)했다. 그리고 일도동에 제주 복지관 분관을 개관했다.(2021) 

복지란 무엇일까?

“관장 역에 너무 충실하여 직원들의 잘잘못만 지적한 때가 있었습니다. 편의 시설 잘 갖추고 조직력만 탄탄하면 복지는 저절로 된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어느 날 무심히 식당에서 공양하시는 어르신을 살폈습니다. 얼핏 보아도 찬이 모자란 듯한데 거동이 다소 불편하신 분이기에 드실만한 찬을 갖다 드렸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따듯했습니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복지’는 ‘안녕’입니다. ‘안녕하세요?’ 하고 문안 인사 올리는데 ‘추워, 배고파, 허리 아파’하시면 안녕하지 못한 겁니다. 문안 인사에도 반응 없으신 분은 더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외로움, 고독에 휩싸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을 상실한 그분들은 삶의 목적과 의지도 잃게 됩니다. 그분들의 손을 잡아 드리며 말해야 합니다. ‘세상을 통찰하는 지혜를 갖추셨기에 아들딸을 훌륭하게 키워 내셨습니다.’ ‘선생님의 지난 여정이 곧 우리의 역사입니다.’ 노인복지는 매서운 세파를 헤쳐 온 그분들에게 사회가 드리는 작은 보답입니다.”

휴완 스님은 2022년 12월 정년 은퇴했다.

이국적이면서도 단아한 덕림사.
이국적이면서도 단아한 덕림사.

“한 여성분이 은퇴한 저를 찾아 덕림사에 오셨습니다. 제주 노인복지관을 다니시던 남편이 별세하셨는데 한가지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제주 노인복지관에서 보낸 시간 동안 행복했다. 종교는 다르지만 덕림사에 등 하나를 달아달라!’ 손수 그 등을 달며 참 기뻤습니다.” 

덕림사 주지를 맡은 게 1992년이니 30년을 주석했다. 중창이라고 하지만 재창건하다시피 한 덕림사를 태고종에 등록해 등기까지 마쳤다. 3.3㎡당 2000만원인 대지에 세운 사찰을 종단에 등록한다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철저한 종단관, 공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찰재정도 10여 년 전부터 신도들에게 공개해 왔다.

“부처님 법을 펴는 공간이자 신심을 쌓아가며 변화해 가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곳입니다. 덕림사는 ‘누구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어야 합니다.”

덕림사만의 특별한 행사가 있다. 연로하신 신도분에게 1년에 한 번 소정의 용돈을 드린다.

“덕림사를 세우고 지켜주신 분입니다. 그 어른들의 신심이 없었다면 덕림사는 벌써 쇠락했을 겁니다. 연로한 탓에 절로 걸음 하기가 녹록지 않은데 찾지도 않는다면 소외감을 넘어 실망하실 겁니다. 우리가 챙겨야 합니다. ‘덕림사가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평생 절을 다니신 분의 보람 아니겠습니까?”

혹, 염두에 둔 불사가 있는지 여쭈었다.

“덕림사 주지를 내려놓은 후 머물려 마련한 작은 절이 제주시 오동동에 있습니다. 그런데 부지가 의외로 큽니다. 하여, 인연이 닿으면 2층 건물을 지어서 일반인들 대상으로 한 주간보호센터와 스님을 대상으로 한 작은 요양원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스님 요양원’이라 하니 낯설게 들릴 겁니다. 정진하다가 여법하게 입적하고 싶은데 경제 사정으로 그리 못하는 스님들이 꽤 많습니다.”

어느 종단 소속의 스님인가 하는 문제에는 크게 얽매이지 않는 요양원을 구상 중에 있다고 한다. 사부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웃으며 사는 삶을 지향하고 있는 휴완 스님이다. 법보신문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청했다.

“평범했던 여류작가가 남편과 함께 작은 점포를 열었는데 트럭으로 물건을 공급해야 할 정도로 매출이 폭증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옆집 가게는 파리만 날렸습니다. 이를 지켜본 여류작가는 남편과의 상의 끝에 가게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손님이 오면 이웃 가게로 보내주곤 했지요. 손님은 줄었으나 여유는 늘었습니다. 그 여유 시간에 사유하며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쓰인 작품이 ‘빙점(氷点)’입니다.” 

‘빙점’은 일본의 저명한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의 작품이다.

“누군가의 작은 배려가 누군가에게 큰 행복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안녕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작은 배려가 모이고 쌓여 서로 연결되면 복지 세상은 자연스레 열립니다.”

늦은 오후의 빛이 도량에 들어찼다.
늦은 오후의 빛이 도량에 들어찼다.

늦은 오후의 빛이 덕림사에 들어차니 절은 함덕의 바다보다 더 아름답게 빛났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휴완 스님은
제주대, 동방불교대, 제주국제대를 졸업하고 원광대 동양학대학원을 수료(3학기)했다. 제주태고원장, 제주 노인복지관 관장, 제주 사회복지협의회 이사.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 제주 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태고종 종정‧총무원장 표창, 법무부장관 표창,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현재 덕림사 주지이자 태고종 사회복지원장이다.

[1668호 / 2023년 2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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