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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운봉 스님 (1889∼1946)

기자명 권오영

근대한국불교 전형적 선승

35세에 개안…혜월 스님이 인가

재가불자 위한 「경책시편」남겨


1946년 4월 1일 입적

운봉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에서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오직 깨달음을 위해 초지일관 정진했던 대표적인 선사로 대변된다. 일제 강점기 격변의 시기를 살았지만 흔들림 없이 오로지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을 벗어나지 않으며 구도를 위한 정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자신이 구축한 공간 속에서 궁극의 경계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통로를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오갔던 전형적인 선승이었다.

1889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스님은 13세 때 일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5세 되던 해 사미계를 받은 스님은 당대 대표적인 강백이었던 회응 스님으로부터 교법을 배웠다. 이후 스님은 23세 되던 해 부산 범어사에서 만하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상주 원적사에서 석교 스님으로부터 계율을 공부했다. 그러나 머리를 깎고 10여 년이 되도록 공부에 변화가 없자 자신이 지내온 시절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성찰을 거듭했다. 며칠을 고민하던 스님은 어느 날 깨달은 바가 있어 지금까지 배운 공부를 모두 버리기로 했다. 교와 율로는 일생의 대사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음의 정리를 끝낸 스님은 유명한 선원이나 선지식이 있다는 곳이면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이후 10여년 간 용맹정진을 하던 스님은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용맹정진을 하던 중 비로소 자신이 의심하던 공안과 가슴 한 가운데에 맺혀있던 체증이 순식간에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개안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35세 되던 해였다.

이후 운봉 스님은 자신의 깨달은 경계를 검증 받기 위해 당대 최고의 선승으로 추앙 받던 부산 선암사 혜월 스님을 찾아 법거량을 통해 인가를 받고 운봉당이라는 법호와 전법게를 받았다. 스님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스님은 도봉산 만일 선원에서 용성 스님을 친견하고 개안의 문답을 나눴으며 덕숭산에 올라 만공 스님과 함께 정진의 날을 세웠다.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로지 깨달음을 구하는 일에만 전념했던 스님은 개안 종사가 된 후에는 남의 안목을 열어주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스님은 후학을 제접할 때에는 자유자재한 면모를 드러냈다. 때로는 방망이로, 때론 할로, 때론 사로잡기도 하고 때론 내버려두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또한 정진하는 대중들에게는 ‘간절한 마음으로 무장해 일심으로 공부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재가 제자들을 위해 ‘경책시편(警策詩片)’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겨 바른 불교 신행을 이끌도록 했다.

용성·만공 스님과 정진
1946년 쇠약해진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끊임없이 선문답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운봉 스님은 그 해 4월 1일 세수 58세, 법랍 45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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