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승군, 우리가 기억하면 안 되는 존재인가

기자명 법보
  • 사설
  • 입력 2023.02.20 13:07
  • 호수 1669
  • 댓글 2

문화재청, 칠백의총 명칭 변경 외면
‘승장사’ 복원엔 아예 신경도 안 써!
칼‧화살 앞에 버틴 건 관군 아닌 승군
범 종단 차원서 ‘의승 가치’ 살려야!

문화재청이 칠백의총 주변 정비사업을 오는 8월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불교계가 요구해 온 ‘천오백총’ 또는 ‘의승·의병의 총’으로의 명칭 변경은 “고증 자료가 필요하다”라는 이유를 내세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승군이 청주성 수복을 비롯해 행주대첩, 평양성 탈환, 노원평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영규대사와 의승이 제1차 금산(눈벌)·청주성전투·제2차 금산(연곤평)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보감’ ‘기재사초’ 등에 적시돼 있다. 아울러 누란의 위기에 놓인 조선과 전쟁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백성을 살리려 분연히 일어나 싸우다 순국한 영규 대사와 800의승의 숭고한 가치는 이미 다양한 세미나를 통해 입증됐다. 문화재청도 이 사실을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을 터인데 앵무새처럼 ‘고증 필요’만 되풀이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불교계의 요구를 애써 외면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문화재청이 발간한 ‘칠백의사 그 충절의 기록들’에 따르면 조헌·고경명 등 21위의 위패를 안치한 종용사 서쪽에 영규대사와 의승을 위한 사당인 승장사가 있었는데, 영규대사와 그를 따르던 의승의 위패가 좌우로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총독부에 의해 칠백의총이 훼손된 바 있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 일환으로 칠백의총을 복원·정비(1970∼1976)했는데, 이때 의승의 제향 공간인 승장사 복원이 누락됐다. 조헌 선생의 의병 공적만 부각하고 영규대사가 이끈 승군의 공적에는 눈을 감은 결과다. 불교계가 2000년대 후반부터 10여년에 걸쳐 “영규 대사와 의승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라고 요구했지만 문화재청은 물론 귓등으로라도 들으려 한 대통령도 없었다. 

칠백의총 사적지를 보전하는 이유는 ‘무명의사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재청은 그 어느 정비사업보다 승장사 복원부터 서둘러야 했다. 추모할 승병의 명단도 이미 확보돼 있지 않은가. 조선 후기 문인 성해응이 지은 ‘금산순절제신전(錦山殉節諸臣傳)’에는 “영규와 함께 거사한 자로 이름이 전하지 않는 자가 많다”고 전제하면서도 “신문, 공연, 운우, 도신, 홍선, 각해, 홍월, 인진, 지한, 운담, 지원, 최호 만은 진산미륵사초혼기(珍山彌勒寺招魂記)에 기록되어 있다”고 전했다. 미륵사는 충남 금산 천비산에 자리한 사찰로 영규 대사가 의승과 머물렀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절의 이름이 붙은 ‘초혼기’가 있다는 건 이 사찰에서 영규대사와 의승의 추념 법회가 봉행되었다는 사실을 추론케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승장사를 복원하여 저 명단만이라도 새겨야 한다. 학계의 연구가 깊어지면 의승의 명단은 더 확보될 것이다.

‘국조보감’에 따르면 기허 영규(騎虛 靈圭)대사는 금산사에서 2명을 만난다. 한 명은 중봉 조헌(重峯 趙憲)이고 또 한 명은 영규대사의 도반이자 행주대첩의 공로자인 뇌묵처영(雷黙 處英)이다. 이 자리에서 세 사람은 임란이 닥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임란 전부터 조헌이 ‘일본 사신의 말을 듣지 말라’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고, 임란 직후 영규대사와 뇌묵대사가 담대하게 의승을 봉기시킨 것도 사전에 나름의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기허 영규, 중봉 조헌 모두 나라가 위태로움에 직면했을 때 목숨을 내놓은 의승‧의군이다. 그렇지만 각종 추모사업이나 기념관을 보면 영규대사는 ‘조헌의 들러리’ 정도로 취급받고 있다. 임란의 전장에서 적의 칼과 화살을 맞아가며 버티다 생을 마친 승군을, 이 시대의 우리가 기억하면 안 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불교계도 ‘칠백의총 문제’를 간과하면 안 된다. 특정 종단‧사찰의 사안으로만 여긴다면 행주산성 전투에서 “도망가려는 승군의 목은 베겠다’라고 엄포 놓았다는 권율의 말만 회자 되고 ‘충청도 승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들어가 물러서지 않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많이 이겼다’라는 기록은 퇴색되어 갈 것이다. 범 종단 차원에서 의승의 가치를 살려내야 한다. 

[1669호 / 2023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관련기사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