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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에서 벗어나 오도송 부르는 대자유인 된 사연

기자명 조동수
  • 기고
  • 입력 2023.02.23 11:32
  • 수정 2023.02.23 15:36
  • 호수 1670
  • 댓글 1

기고-조동수 작가의 '오등선원'

공주 학림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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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작가인 조동수(70·통녕) 거사가 그동안 자신의 참선공부를 담은 ‘오등일지’를 보내왔다. 강원도 산중의 한 사찰에서 기거하던 중 ‘색즉시공’이라는 말에 걸려 밤새 씨름하다 불가사의한 체험을 한 그가 이후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이어가다 오등선원 조실 대원 스님 회상에서 오도송을 쓰게 된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집자

*오도송이 있느냐?

계룡산 학림사 오등선원의 대원 스님이 내게 오도송 쓴 게 있느냐고 물었다. 많은 대중들 앞에서 나의 상태를 점검하면서였다. 그리하여 며칠 후, 예전의 메모를 정리하여 보여드렸다.

색즉시공 한 마디에 태산이 꺾이니
시방세계 오로지 백골천지로다.
광배 드리우고 굽어보노라니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대로구나.

말하자면 이 게송은 첫 번째 ‘오도송’인 셈이다. 이 메모를 적을 때 나는 오도송이니 게송이니, 이런 개념조차 몰랐다. 천주교 신자였고 오래전부터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불렸다.

그때, 설악산의 자락이라 해야 할 한 절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저녁공양 후, 잠은 올 리 없고 하여 그 방에 있던 ‘예불문집’을 집어 들고 훑어보다가 이윽고 ‘반야심경’에 이르러 ‘색즉시공’이라는 단어에 딱 걸려들었다.

그 밑의 우리말 풀이는 ‘물질이 곧 허공’이라 씌어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물질이라면 저 웅대한 설악산이 물질일 것이고, 허공이라면 저 산 위에 펼쳐진 저 하늘일진데, 어찌 설악산이 곧 하늘일 수 있느냐? 하는 의심에 걸린 것이었다.

이 ‘있고, 없음’의 경계가 분명한 것을 두고 무슨 말장난을 하는 것이냐 뭐냐 하는, 일종의 반발심 비슷한 것이 작동되기 시작하여 결국, 생각이 생각을 이어가다가 급기야 생각에 함몰되어 시간 자체를 잊어버렸다.

* 이것이 무엇인가?

아마도 나는 이제 새벽 동이 트리라 여겼다. 한 손에 ‘예불문집’을 비켜들고 ‘물질이 곧 허공’이라는 ‘반야심경’의 우리말 해석의 이 대목에 시선이 딱 꽂힌 채 한 글자도 더 읽어 내려가지 못하고 있는데, 주위가 훤해지는 거였다. 동틀 무렵의 거, 누런 금빛 여명이 방안에 가득하였다. 아니다. 방이 아니었다. 벽이니 문이니 지붕이니 하는 것들은 사라졌다. 사방 다 툭 터져 이 일대가 훤하고, 이 일대가 다 금빛 여명으로 두렷했다.

나의 시선은 지금 ‘물질이 곧 허공’이라는 문장에 딱 꽂혀 있는데 주변 일대가, 앞이며 뒤며 사방팔방 훤히 다 보이는 거였다. 그러니 육안, 즉 이 두 눈으로 보는 게 아니었다. 이게 법안인지 혜안인지, 그건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내, 찰나에 천지개벽이 왔다. 마음이 열린 것이다. 이 찰나의 일은 불가사의 자체이므로 생략하는 게 옳다.

그렇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처님의 노고를 찬탄하였다. 옳고 옳으신 말씀이었다. 이 진리를 알려주시려고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다는 것을 바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대웅전을 향해 절을 하고 또 하며 쏟아지는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나는 주의 종이었던 신분에서 벗어나 단박에 대자유인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졸지에, 아무 준비도 없이 당한 불가사이여서, 대체 이것이 무엇인지, 감으로는 알고 느끼는 바였지만 확연한 해답은 아니어서 또한 이 물건 자체가 의문의 덩어리가 되었다.

*용맹정진 중 풀린 의문

이 일이 있은 후, 며칠 지나 쓴 메모가 이 글머리의 저 게송이다. 또다시 말하지만 당시는 오도송이니 게송이니 이런 단어 자체를 몰랐던 때라 시 구절처럼 간략히 적어두었던 것인데, 처음으로 참여한 대원 스님의 ‘역대법보기’ 강설 다음날 아침의 ‘소참법회’에서 스님이 나를 점검하시다가,

“이때 쓴 오도송이 있느냐?”고 물으시기에,
“그때는 천주교 신자여서, 그저 메모정도 해둔 것이 있습니다.”라고만 대답하였다.

이런 문답이 있었던 그 다음 토요일. 나는 학림사 오등선원의 ‘성도재일 용맹정진’에 동참하게 되었다. 2021년 ‘동안거’는 부산 해운정사의 진제 스님 아래서 지냈다. 그 해제 후, 소주나 마시며 나대다가 약 1년 만에 용맹정진 방에 앉게 된 셈이다. 역시 이 토요일 밤에도 대원 스님의 ‘역대법보기’ 강설은 이어졌다.

* 다담茶談 시간에 꽂히다.

그렇다. 이 대목에서 한마디 하고 지나가자. 나는 오등선원에 처음 왔지만 딱 꽂혔다. ‘소참법문’ 시간 때문이다.

대원 스님께서는 지난 저녁에 설하셨던 법문에 대하여 다음날 아침에 대중들과 차 마시는 시간을 마련하시어, 지난 법문에서 궁금한 대목이 있는지 물으시고는 질문자가 있으면 상세히 보충설법을 해 주시는 것이다. 이런 다담의 시간이 한 시간이나 이어진다.

나에게는 점검을 받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순간 같아서 바로 꽂혔다. 그렇다. 입 열면 길어지니 간략히 하자.

나는 진제 스님이 종정예하에 추대되기 전부터 쭈욱 해운정사뿐이었다. 천주교인으로 졸지에 마음이 열려 이 무엇(?)을 본 후, 짐작은 하였으나 확답은 얻지 못하여,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볼만한 사람을 찾아 10여년을 헤매었으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것에 대하여 설법을 하던 불교TV에서, ‘안국선원’의 수불 스님을 우연히 보고는 달려가 물었는데 역시 알고 있었고, 그 대답으로 ‘육조단경’을 읽어보라 하였는데, 내가 눈물로 읽어본 ‘단경’은 마치 나의 전생 자서전 같았지만, 수불 스님은 인의 장막에 둘러 쌓여있어서 다시 대면하여 의문점을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 때에 마침 역시 우연히 본 그 불교TV에서 역시 주장자로 이것을 희롱하며 노니는 진제 스님을 보게 되어 찾아가서 묻게 되었는데, 그때 스님은 이것을 ‘상(相)’이라 대답하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실상(實相)’이라는 용어가 있는지 몰랐으므로, 상이라 하시니 이것을 없애는 공부를 하다가 아무래도 이상하여 이 의문점을 물어보려 해도 대면 기회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종정에 추대되시니 예경 팀들로 하여 더욱 어려웠다. 그러니 진제 스님은 일방적이었다. 즉 법문을 듣기만 해야 할 따름이다. 의문점에 대하여 질문하는 시간은 차단되어 있다.

그랬는데, 처음 와서 본 대원 스님 아래에서는 ‘소참법문’인 다담의 시간이 있었다. 딱 꽂힐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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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있던 한 물건

용맹정진 사흘째였으니 내게는 두 번째의 ‘소참법문’ 참여였다. 7일 전의 첫 시간에서 대원 스님은 이것저것 나의 상태를 점검하시다가 ‘실상’이라고 해야 할 이 무엇에 이르러,

“이것이 무엇인고?”하고 물으셨다. 이 한 물건은 그날, 내가 안드레아라고 불려지던 그때 그 설악산 자락의 절집에서 찰나에 보았던 무엇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이랬다.

“옛 조사도 모르시고, 또 불조께서도 세상에 오시기 이전의 일이라서 모르실 터인데, 저인들 어찌 안다고 하겠습니까?”

하자 스님이 바로 채근하였다.

“모른다는 게 답이 아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또 곧바로 물었다.

“여기서는 대답이 척 나와야 한다. 이것이 무엇인고?”
“모른다고 대답할 밖에 없습니다.”

그랬다. 스님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세 번을 물었고, 나는 세 번을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100여 명의 대중은 지루하다는 분위기였고, 그 중 한 사람은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마, 알겠습니다, 하고 절하고 앉으세요,”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제 그 두 번째 시간이었다.

지난 밤 ‘역대법보기’ 강설은, 달마대사가 아직 인도에 계실 때 ‘실상’으로써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항복받는 내용의 법문이었다. 그러니 이날 아침의 ‘소참법문’ 시간은 또 자연스레 이 ‘실상’에 대한 내용의 질문과 답이 오갔다.

이때 나도 한마디 하였다.

“스님 법문을 듣다보니 문득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스님께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세 번이나 하문하실 때, 이 제자는 또 세 번이나 ‘모릅니다.’라고만 되풀이 하였습니다. 그때 만약 입을 가벼이 놀려, ‘이것은 실상이며, 진여자성입니다.’하고 대답하였더라면, 스님께서는 가차 없이 방망이로 등줄기를 내려쳐 저 무간지옥으로 쳐 박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자 스님은,
“좋다. 그러면 이것이 성품이며 진여자성이라 치자, 그러면 진여자성은 또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또 말문이 막혔다. 캄캄했다.
“이런 대목에서는 막힙니다. 캄캄합니다.”

이런 대답이 떨어지기 바쁘게 스님의 방망이가 날아들었다.
“이런 물건을 죽은 물건이라 혀. 시체인 것이야!”

나는 이 방망이질에 진실로 정신이 아득했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더 하였는지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필름이 끊겼다. 정말로 나는 죽은 물건이고 시체였다. 그리고 역시 찰나였다.

그 찰나에 보였다. 스님이 탁자의 볼펜을 집어 드는 거였다.
“스님! 이것입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마시던 찻잔부터 치켜들었다. 그 순간, 시야가 참으로 확연하고 환했다.
“스님! 이래서 옛 도인들이, ‘똥 젖는 막대기니’, ‘삼베 세근이니’, ‘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였군요. 그렇다면, ‘개 목걸이’라고 한들 어떠하겠습니까?”

내 말은 내가 들어도 명랑하고 경쾌했다.

이윽고 스님이 입을 열었다. 방망이질 때와는 달리 낮은 농담조 같았다.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뜰 앞의 잣나무라 했지. 그렇지만 거, 개목걸이는 조금, 그러치이~.”하시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셨다. 법회는 이로서 끝이 났고, 법좌에서 일어나시며, “이제, 오도송이 하나 나올 것 같은 데에~.”

하시는 혼잣소리 같은 말씀을 하시며 수좌들에 에워 쌓였다.

* 납자의 노래

그날 아침, 나는 지대방에서 게송 하나를 썼다.

연필을 드시니 찻잔이 들리더라.
삼베 세 근은 이로써 세 근의 삼베일 뿐
법당 기둥이 왜 붉으냐고 묻지 마라.
달은 언제나 서쪽으로 진다네.

이 게송을 종무소 직원이 출근할 때 타이핑을 부탁하자, 여직원은 좀 바쁘다는 표정 같기도 하였다.

“이것은 내가 부탁하는 일이 아니고, 조실스님께서 기다리시니 조실스님의 일이에요.”

이렇게 하여 스님이 읽기 쉽도록 굵은 글씨로 타이핑 하여 오전 일찍 종무소에 두었다. 스님께 바로 전달할 방법은 달리 없다는 거였다. 때 되면 우편물 수거차 나타나는 스님이 따로 있다는 거였다.

그 이튿날이었다.
점심 공양 후의 오후 입선시간이었다.

지대방의 맨 안쪽 숙소를 사용하던 나와 서너 명이 좀 늦게 공양실 입구의 신발장 앞에 당도 하였을 때였다. 계단으로 오르건 엘리베이터를 타건 3층의 선원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되는 곳이다.

이곳에 대원 스님이 서 계셨다. 눈이 쌓인 영하의 날씨인지라 귀를 가리는 모자를 쓰고 계시는 모습이 척 봐도 여기서 시간을 지체한 것 같았다. 우리가 출입구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듯 바로 나를 찍어 보시고는, “오도송이 와야 해!”라고 하셨다.

함께 움직이던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거, 이미 어제 올려 드렸는데요?”하며 내가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갸웃하자, “오도송이 나와야 해!”하고 다시 채근하듯 하셨다.

“어? 어제 종무소에 두었는데요?”하며, 내가 ‘그게 안 올라왔어요?’ 하는 표정으로 종무소로 향하려 하자 스님도 따라 붙으셨다. 나는 앞장서서 공양실 문을 열고 그 안쪽의 종무소 출입구로 향했고, 스님께서도 내 뒤를 붙어 따랐다.

* 형식이 다른 ‘게송’과 ‘오도송’

만 하루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 어제 서류봉투에 넣어, ‘조실스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이라 당부하였던 그 봉투는 그 여직원이 던져두었던 그곳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제 조실스님까지 합세하여 부랴부랴 들이닥쳐 내가 그 봉투를 낚아채듯 집어 들자 종무소 직원들은 좀 머쓱해졌다.

“거기 앉아.”

드디어 봉투를 건네받은 스님은 원탁 탁자에 앉으시면서 그 바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내가 서 있겠다는 의사를 드러내자, 스님이 다시 손가락으로 자리를 찍으며 앉으라하시기에 옆에 같이 앉았다.

이윽고 봉투를 헤집어 타이핑된 용지를 꺼내어 훑어보시던 스님이,
“음, 이건 게송이지. 오도송이라면 형식이 다르지.”라고 하셨다.
“이게, 처음인지라~.”

내가 좀 쭈뼛거리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자,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는 게 딱 드러나야지.”

“알겠습니다. 다시 써 올리겠습니다.”
나는 바로 일어나 반배를 하고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나는 선방에 올라가지 못했다. 홀로 지대방에 꾸그리고 앉아 오도송을 썼다. 두 편이었다.

* 두 번째 ‘오도송’

참고하자면 이렇다.

대원 스님은 세월의 편차를 두고 세 편의 오도송을 쓰셨다. 또 진제 스님은 5년여의 편차를 두고 두 편의 오도송을 쓰셨다. 또 6조 혜능선사는 8개월의 편차를 두고 마음을 두 번 여셨다. 그리고 나는 25년여의 편차를 두고 비로소 오도송이라는 것을 처음 써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에 두 편이다.25년 전, ‘안드레아’가 메모 형식으로 적어두었던 것은 대원 스님의 개념정리에 의해 정리한 오도송은 이 글의 서두에 이미 밝혔다. 그러니 앞의 저것이 나에게는 첫 번째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것은 이러하다.

백골에 내려친 한 방망이에 번쩍 살아나니
옛 도인의 살림살이가 유리병 속이더라.
어이 그리 바빴던고. 지대방에 홀로 앉으니
한가롭고 한가롭던 본래 한 물건이더라.

이 두 편의 오도송을 엊그제 같이 종무소에 부탁을 하여 각 한 편씩 두 장의 종이에 역시 굵은 글씨로 뽑아 서류봉투에 넣어 맡겼다.

이튿날, 점심공양 후였다.

나의 대중생활 소임은 공양실 청소팀 일원이었는데, 한창 청소 중에 종무소 직원이 와서 나를 찾았다. 조실스님께서 부르신다는 거였다.

스님은 이미 종무소 원탁 의자에 자리하고 계셨다. 앞에 봉투도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제처럼 옆에 앉으라하였다. 이미 내용은 읽으셨다는 표정이 읽혔다.

“음, 그래. 착이 미세하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 이것은 됐고~.”

스님은 여기서 말씀을 끊으시고는, 이제 딴 내용의 말씀을 하시겠다는 듯, 말씀과 말씀 사이에 시간차를 두시는 거였다.

나도 다 읽혔다. 오도송에 대하여는, ‘마, 이만하면 되었다.’고 하신 거였다.

그렇다. 이 선방일지는 여기까지이다. 나머지 한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까지 대중들이 다 알아야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앞에서 내가 불가사이 대목을 생략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어차피 말해봐야 알기 전에는 모른다. 보편적인 인식의 저편이다.

용맹정진을 회향한 후, 서울의 거처로 돌아온 새해(2023년) 첫날, 나는 게송 하나를 써서 다음날 우편으로 올렸다.

-제자 통녕 3배-

품삯 받으실 일을 하셨으니
스승 중에 참스승이십니다.
자유자재의 공부를 더 하며
부족한 매 값을 채우겠나이다.

- 마하 반야바라밀 -

조수동 작가
조동수 작가

[1670호 / 2023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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