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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도 미룡사 회주 정각 스님

인권운동 50년…“소유 보다 공유에 가치 두어야 정토 세상 열어!”

법대 졸업 후 사시 준비
‘춘성 일화‧법문’에 감복 
“사법 아닌 부처님 법으로 
좋은 세상 만들자” 출가
가리산 3년 정진 회향
“제1 목표는 중생제도”
어린이법회‧합창단 조직
부산불교에 ‘새 활력’
불교인권센터‧법률 상담소
국가인권위 지방조직 견인
“사람 섬기는 종교인은
혐오‧차별 묵인 못 해”
“지옥 중생도 구제하는데
수감자에게 전법은 당연”
이생의 마지막 불사는
“아기 생명 살리는 일”
영유아 유기 예방에 심혈
“국가적 지원 절실하다!”

영유아 유기 예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미룡사 회주 정각 스님은 “새 생명이 온전하게 생명의 존귀함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라며 “누구의 책임, 권한을 따지기에 앞서 아기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최우선에 두어야만 한다”라고 강조했다. 사진=주영미 기자
영유아 유기 예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미룡사 회주 정각 스님은 “새 생명이 온전하게 생명의 존귀함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라며 “누구의 책임, 권한을 따지기에 앞서 아기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최우선에 두어야만 한다”라고 강조했다. 사진=주영미 기자

1970∼80년대 인권운동은 유신‧독재 군부정권에 항거하며 불거진 민주화 운동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 인권단체들은 독재정권에서 발생한 고문, 실종,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고 나섰다.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은 인권운동가와 재야 지식인들이 투옥되며 인권‧민주화 운동이 잠시 답보 상태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물꼬를 튼 건 스님, 목사, 신부를 중심으로 한 종교인들이었다. 

현재 부산 영도 미룡사 회주인 법담 정각(法潭 正覺) 스님도 역사의 물길을 연 장본인이다. 1970년대 재소자 교화와 함께 인권운동을 시작한 정각 스님은 1990년대를 거쳐 2020년대인 지금도 사형제 폐지 등의 인권보장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경북 고령 벌지동에서 경주 김씨 집안의 2남 2녀 막내로 태어났다(1932). 경북사대부고 졸업을 앞두고 집안에서는 의과대학 진학을 권했지만 이미 진로는 정해 놓았더랬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있던 사촌 형을 보아 온 영향도 있었지만, “법(法) 앞에 평등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라는 의지를 오랜 세월 동안 다져온 터였다. 부모의 애원과 만류에도 끝내 중앙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해군 복무와 대학 학사 과정까지 모두 마친 청년은 사법고시에 전념했다. 가끔 사찰을 찾아 법전과 사투를 벌이는 선배와 동료들을 만나 담소 나누는 게 유일한 낙이었을 정도였다. 

어느 날, 인사동 서점에 들렀다가 불심 깊은 보살님을 만났는데, 훗날 국무총리(2000∼2002)를 지낸 이한동(李漢東) 씨의 모친이었다. 그 자리에서 망월사에 주석하고 있던 춘성(春城‧1891∼1977년) 스님 이야기를 들었다. 만해 용운 스님의 유일한 제자, ‘욕쟁이 춘성’ 바로 그 스님이다. 걸림 없는 스님의 삶에 은근 호감이 갔다. 강화도 보문사에서 춘성 스님의 법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노인, 병자, 죽은 자를 목도하신 부처님께서는 삶의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하고자 출가하셨습니다.” 

춘성 스님이 전한 부처님의 출가 인연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문득 법전을 덮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가득 늘어선 무량수의 별들이 모두 제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낼 수 있는 빛은 무엇인가?”

오랜 사유 끝에 원력을 세웠다.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큰 행복을 안기는 것이다. 부처님 법으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

서울 의정부 망월사(望月寺)로 걸음 했다. 춘성 스님은 계와 함께 법명 정각(正覺)을 내렸다(1960). 망월사 선방에서 1년 정도 용맹정진하던 중 은사 스님이 부르더니 조용히 일렀다.

“선방에서의 참선에만 얽매이지 말라. 선교(禪敎)를 동행하는 인재가 되어라! 세간에서도 구도 정진할 수 있다. 불교 교리를 널리 올바르게 전하는 일에 힘써라.”

망월사 산문을 나오며 새로운 여정이 시작됐다. 

법화종 초대 종정인 혜일 스님과의 인연으로 서울 성북동 법화사에 머무르며 종무를 도왔다. 이때 칠보사의 석주 스님과 불교학자인 이종익·김지견 박사와 친분을 맺으며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특히 이종익 박사가 주창한 용화세계에 감명을 받았다. 

이후 조계종 사찰인 춘천 봉의사(鳳儀寺‧현 충원사)에서 구도 행각을 이어갔다. 또한 속리산 문장대 아래의 중사자암(中獅子庵)에 3년 동안 머문 정각 스님은 법주사 강원에서 3년 동안 수학하며 불학의 깊이를 더했다.

이후 강원도 춘천 가리산(加里山)에 입산한 정각 스님은 홀로 정진했다. 한 평 남짓한 토굴에서 1년 동안 정진한 후 30평 규모의 법당을 세우고 수양사(修養寺)라 명명했다. 이 도량에서 ‘지장정근 3년결사’에 들어갔고, 회향 즈음 대 원력이자 생의 목표를 확고하게 설정했다.

“나의 제1 목표는 중생구제다!”

일붕선교종 종정 일붕 스님의 다비식.
일붕선교종 종정 일붕 스님의 다비식.

일붕 스님(一鵬‧1914∼1996. 일붕선교종 초대 종정)과는 숙연인 듯 뒤늦게 인연이 닿았다. 일붕 스님과 함께 신흥 종단으로 급부상한 일붕선교종의 기본 체계를 확립해 갔다. 
정각 스님이 본격적으로 전법에 나서기 시작한 건 부산 영도에 정혜(定慧)포교원을 개설하면서다(1973). 

2022년 12월 ‘미혼모‧영아 문제’ 해결을 위해 여당 국회의원들을 만난 정각 스님은 그다음 날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입원했다. 세납 90의 노령이기에 우려가 깊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한 달여 만에 큰 차도를 보였다. 쾌차 중인 미룡사 회주 정각 스님을 부산의 한 병원에서 친견했다.

논리적이면서도 정감 넘치는 정각 스님의 법문에 정혜 포교원의 신도들은 탄성을 자아내곤 했다. 신도가 2년 만에 폭증해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는데 살림이 녹록지 않아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에서 거주하는 정혜포교원 신도의 양어머니가 불사금 3000만원을 보내왔다.

“보살님 꿈에 스님 한 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고 해요.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여겨 한국에 있는 양아들에게 말하니, 그 아들이 제 얘기를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보살님은 ‘바짝 마른 그 스님이 맞다’며 놀라면서도 기뻐했다고 해요. 부처님 가피입니다.”

부산 영도 미룡사 야경. [미룡사]
부산 영도 미룡사 야경. [미룡사]

그 시주금이 종잣돈이 되어 용화세계 구현을 지향하는 미룡사를 창건했다(1975). 이종익 박사가 생전에 자주 찾아 머물며 용화 사상을 전하는 등 정성을 들인 사찰이기도 하다. 

정혜불교어린이회 입학식(1982).
정혜불교어린이회 입학식(1982).

어린이 법회를 열고, 청소년회를 조직하고, 사찰 합창단을 꾸리며 부산불교에 새 활력을 불어넣었다.

“한때 영도에만도 10여 개의 어린이회가 활동했습니다. 인구감소만 탓해서는 안 됩니다. 학생 한 명만 있어도 법회는 열어야 합니다. 그런 성심을 기울여야 불교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교도소‧구치소 수감자들에 대한 처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 자체를 곱지 않게 보던 때이니, 수감자 인권이란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정각 스님은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춘천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을 만났다.

“지월 스님으로 기억해요. 1970년대 초반 춘천에서 처음 뵈었는데 대뜸 저보고 ‘나는 이제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하니 정각 스님이 재소자 교화를 맡으면 어떻겠느냐?’라고 하셨어요. 불문에 귀의한 지 얼마 안 돼 대중에게 법을 전하는 건 아직 자신 없다고 했습니다. 지월 스님은 ‘법복 입은 것만으로도 감화를 줄 수 있다’라고 해요. 누군가는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났습니다. 지장보살님께서는 지옥에 있는 중생도 구제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구치소‧교도소에 있는 사람을 참회시키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 건 스님이 할 일입니다. 다만, 잠시 무지했고, 우매했던 겁니다. 억울하게 죄인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사연을 들어주며 위로하는 것도 우리가 할 일입니다.”

1997년 12월. 형장의 이슬이 된 한 사형수가 있었다. 늘 냉담했던 그는 정각 스님의 온정에 결국 불교에 귀의했고 사형집행 당일 마지막 소원은 정각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는 것이었다. 그날 정각 스님은 그의 손을 따듯하게 잡아 주었다.

미룡사 창건 직후 정각 스님은 종교인들의 화합도 도모했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의 영‧호남의 종교지도자들이 화개장터에 모여 종교화합과 세계평화를 기원했는데 이러한 정각 스님의 헌신은 부산종교인평화회의 창립(1995)의 주춧돌이 되었다. 창립 2년 전에 부산불교인권위원회를 출범(1993‧공동대표)시킨 정각 스님은 이 평화회의의 공동대표와 함께 인권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부산종교인평화회의 창립 선언문에도 담겨 있듯이 종교인은 ‘인간을 섬기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생명의 존엄을 지중히 여긴다면 고문, 의문사 등에 침묵할 수 없습니다. 창립 당시 저는 평화와 인권운동은 특정한 사람‧단체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인권신장의 지평을 확대하려는 행보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도 무료법률상담소를 개설하고, 부산인권센터를 열었다(1998).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2001)된 후 시민 대부분이 “이제야 인권 국가가 되었다”라고 안도할 때 정각 스님은 각계 인사들과 함께 지역 사무소 설치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을 앞세운 정부는 지역 인권사무소 설치 불가 입장을 견지하던 때다. 

“당시 허성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 변양균 기획재정부 장관, 조성래 국회의원을 만나 국가인권위원회의 제 역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혐오와 차별은 수도권에서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진심은 통했다. 부산과 광주(2005)에 이어 대전, 대구, 강원, 제주에 인권사무소가 설치됐다. 교정‧교화의 공로를 인정받은 정각 스님은 교정대상 자비상(1984)과 국민훈장 석류장(2002)을 받았다. 

법무부는 2007년부터 제1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2007~2011)을 수립해 국가단위의 인권보장을 위한 계획을 구체화했다. 제2차 NAP에 이어 제3차 NAP(2017~2022)의 의견수렴을 진행하며 일곱 가지 정책과제를 제시했었다. 

사람의 생명・신체를 보호하는 사회,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 모든 사람이 기본적 자유를 누리는 사회, 모든 사람이 정의 실현에 참여하는 사회, 모든 사람이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는 사회,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사회 등이다. 정각 스님의 원력과 실천은 이것과 맞닿아 있다.

정각 스님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부산불교사회학교를 개설해 인권 문제는 물론 농촌 정책 및 농촌 살리기 운동, 소비자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부산불교자비원을 개설해 소외계층을 보듬었다. ‘횡령산 살리기’, ‘낙동강 살리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환경 보호에도 열정을 다했다. 이 공적 또한 인정되어 도산 안창호 선생 순국 60주기 추모식에서 부산흥사단이 수여하는 ‘제2회 존경받는 인물상’을 수상했다. 

그러고 보면 정각 스님의 노정을 관통하는 건 ‘생명’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소유보다 공유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사유하기를 권합니다. 자신을 귀하게 대하듯, 타인을 배려하면 됩니다. 그러한 마음이 이 땅에 흐르면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불국정토이자 용화세계이다. 인연이 닿는다면 어떤 불사를 하고 싶은지를 여쭈니 “아기 살리는 불사”라고 했다.

1980년대 초 부산구치소 측과 여자 사동을 시찰할 때였다. 한겨울임에도 난방이 안 되는 거실에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아기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지켜주는 건 담요 한 장뿐이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구치소장은 “예산 문제로 난방 시설은 어렵다”라고 했다. 정각 스님은 곧바로 사비를 들여 전기 판넬을 설치했다. 

현재 정각 스님은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 상임 대표를 맡고 있다. 이 본부 산하의 행복드림센터가 주력하고 있는 영유아 유기 예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어떤 아기는 태어나며 사랑을 받지만, 어떤 아기는 태어난 그 자체가 고통의 씨앗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운명’이라 치부하고 돌아서면 안 됩니다. 새 생명이 온전하게 생명의 존귀함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의 책임, 권한을 따지기에 앞서 아기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최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아이가 보호받을 수 있는 시설을 확충하고, 까다로운 출생신고 절차도 시정되어야 합니다. 엄마와 아기가 함께 할 수 있는 국가적 지원이 절실합니다.”

평생 지남으로 삼은 말씀을 청했다. 

“이 선구는 석주 스님에게 처음 들었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하라!’”

정각 스님 스스로 설정한 길을 바람에 걸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걸어 온 원동력은 저 임제선사의 일구(一句)에서 솟았을 터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정각 스님은
망월사 출가(1960). 부산 영도 미룡사 창건(1975). 부산불교자비원 원장(1982). 부산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1993). 횡령산 살리기 시민단체 비상대책위원회 공동대표(1997). 부산인권센터 공동대표(1998). 부산종교인 상임대표(2009). 교정대상 자비상(1084)‧국민훈장 석류장(2002) 수상. 현재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 상임대표이자 부산 영도 미룡사 회주이다. 

[1670호 / 2023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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