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인 팩트와 허구인 픽션을 합쳐 ‘팩션’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이 있다. 사실에 기반한 소설. 작가 유응오는 자신의 소설이 ‘팩션’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작품은 근대기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까지를 오가며 방대한 사실들을 취합하고 있다. 그 광활한 시공간 속에 등장하고 사라졌던 실존 인물들을 한 권의 책 속에 불러 모으기 위해 작가는 몇몇의 문고리들을 만들어 주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리는 제법 단단하고 정교해 ‘그 고리를 붙잡고 닫힌 문을 열어보라’고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소설 ‘염주’는 사회주의운동가 박헌영(1900~1956), 남부군사령관 이현상(1905~1953), 그리고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1920~1958)이라는 세 인물을 통해 각각의 인물들이 상징하는 한반도 근현대사의 각 축을 들여다보고 있다. 각자의 세상을 만들어갔던 이들은 세 인물의 삶이 농축된 결과물과도 같은 박헌영의 아들, 즉 원경 스님(1941~2021)을 통해 회고되고 기록된다. 또한 5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한국전쟁 전후의 시점은 차일혁이 맡았다.
소설은 원경 스님이 서울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기록한 박헌영의 행적과 차일혁이 회고한 빨치산 이현상의 기록이 두 축을 이룬다. 박헌영의 아들이었기에 출가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원경 스님,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수많은 피를 뿌려야만 했던 차일혁의 기억은 그 자체로 역사다. 소설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역사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소재 ‘염주’를 통해 작가는 역사를 현실로 갖고 온다. 빨치산 이현상이 지니고 있던 염주가 토벌대장 차일혁의 손을 거쳐 어린시절 이현상을 만났던 원경 스님에게 전해진다는 픽션이다.
“염주의 염(念)자는 이념이라는 단어에 쓰이는 것과 같은 글자죠. 사회주의자 박헌영, 빨치산 이상혁, 토벌대장 차일혁은 모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각자의 이념을 갖고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 생각의 엮음이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다름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증오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모두는 번뇌가 가득한 세상을 살았던 한 알의 염주였습니다. 이현상에서 차일혁을 거쳐 원경 스님에게 전해진 염주는 그들 모두가 지금의 우리임을 말해줍니다.”
‘화쟁’이나 ‘화엄’이라는 해법을 쉽게 제시하는 대신 더 치열하고 적극적인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는 작가의 숨은 목소리는 그가 불교계에 몸담았던 짧지 않았던 시간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박헌영 평전, 이현상 평전, 차일혁의 수기 등 관련 서적과 자료 등을 탐독하고 자료를 수집한 부지런함과 집요함도 돋보인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672호 / 2023년 3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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