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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마강사 주지 해전 스님

나와 너 따로 없는 불이사상 실천할 때 공생공영이 가능합니다

‘불이’ 모른 채 분별심으로 인한 시비 갈등은 불행을 낳을 뿐
과거 명멸한 국가들도 시비 갈등 줄였으면 역사 달라졌을 것
불이 화두삼아 삶의 순간순간 살펴 중도 견지하는 불자 되길

해전 스님은 “유무, 깨끗함과 더러움, 기쁨과 슬픔도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중도의 길을 따라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
해전 스님은 “유무, 깨끗함과 더러움, 기쁨과 슬픔도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중도의 길을 따라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

허름한 대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요란한 소리가 이른 봄밤을 더욱 깊은 사유(思惟)속으로 몰고 갑니다. 산골의 봄바람은 때에 따라 유난히 거세어서 느끼는 체감 역시도 무척 차갑습니다. 분별의 오르내림이 다소 혼란스러웠던 어제, 마음속으로 종일토록 달궈낸 구차스런 열기는 밤을 새워 뒤척인 오늘 아침에야 부담스러운 입술 끝으로 또 작은 산 하나를 키워냈습니다.

지난 밤 분별심으로 혼란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너와 내가 따로 없거늘 우리는 늘 분별심을 일으켜 시비하고 갈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불이사상(不二思想)’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 세상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즉,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면서 늘 마주하는 말인데, 일상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수행 속에서 살다보니 어제와 같이 새삼 모두가 ‘불이(不二)’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고, 불이사상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온몸이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불가에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세속과 부처도 둘이 아니고 선악과 유무, 깨끗함과 더러움, 기쁨과 슬픔 등 상대적 개념에 대한 모든 대상 역시도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은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세상 소식을 들으면서 생각하다보니 역시 모든 것이 ‘불이’로 회통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단선적(單線的)인 존재 역시 자연과 사회로부터 조건적으로 생성되어 조건적으로 소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극을 지양하는 중도(中道)의 길을 따라 마지막까지 삶을 다해야 할 것이기에, 더 이상의 이런 저런 설명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사물의 근본에 깔려있는 것이 바로 불이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이 불이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임에 있어서 오늘은 불교적인 설명이 아니라 옛 신화와 역사 이야기를 통해 화두처럼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키케로로부터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인류의 역사를 “하늘의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로 바꿔놓았다”고 했으며, “신이 아닌 인간의 행위적 사실을 밝히는 행위 즉, 사실을 증거 함에 의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했다”고도 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긍정하기에 앞서 인간의 사고와 행위적 사실들이 우선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인간의 역사 자체가 오늘날 인류의 발전사이기도 하지만 그 발전과정에 있어 또 다른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사회적 이념의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또한 역사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헤로도토스 이전의 역사적 사실을 다룬 사람인 호메로스는 그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서 신화와 인간의 행동을 뒤섞어 구분이 모호한 형식으로 고대 아테네의 가치관을 기술하여 시대의 흐름과 사조(思潮)를 표현했습니다. 

호메로스의 ‘트로이의 목마’는 그리스의 역사와 페르시아의 전쟁사로서 호메로스가 기원전 8~9세기경에 작가적 상상력으로 기술한 시적표현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성에 들어가기 위해 당대의 뛰어난 목수이자 권투 선수였던 에파이오스가 목마를 만들어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 속이고 병사들을 목마 속에 태우고 들어가 야밤에 트로이를 공격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트로이의 목마란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해 내부가 무너진다’는 뜻으로 사용될 만큼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불어 적은 이익을 얻으려고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면서도 마치 큰 것을 얻은 것처럼 착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 이면을 통해 지금의 삶을 잘 살펴보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나르키소스 역시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으로 아름다운 용모 때문에 많은 요정들에게 사랑의 고백을 들었지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한 요정이 복수의 여신 에코(eco)에게 지독하게 가슴 아픈 사랑을 앓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이에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기얼굴에 반해서 사랑 병을 앓다가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후 주변에 그의 혼이 한 송이 수선화로 피어났다고 해서 수선화의 꽃말이 자존심‧자만심‧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고결 등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애착‧자기도취 등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로도 사용되는 1920년대 초기 시의 이념과 미학으로도 남아있습니다. 어쨌든 인간이 존재하는 이 지구상 어디에나 각종 신화와 그에 버금하는 종교적 의미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또한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희랍시대 신의 역사도 그토록 복잡다단하고 인간관계보다 더한 인과성의 사연과 단계를 거치며 한 시대의 역사를 풍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들의 역사는 당대 신들에 비해 얼마만큼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으며, 신들의 세계보다 더욱 아름답게 자신을 향유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이 시대의 우리 모두가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지금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정치‧사회‧경제‧교육 등 모든 분야의 현실은 고대 그리스시대의 폴리스적 도시국가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지방자치제와 모습이 너무나 흡사하기도 합니다.

발칸반도의 끝자락에 있던 그리스반도, 소아시아, 에게해 연안과 남부 이탈리아, 프랑스 남해안 그리고 많은 섬들이 지금 말하는 폴리스적 자치국가였습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그리스 본토는 올림포스산을 비롯하여 산지로 둘러싸여 농토가 적었기 때문에 고립된 분지를 통치하기 위해 약 1000여개의 폴리스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즉. 아테네‧스파르타‧에레토리아‧테베 등이 폴리스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각각의 풍속과 정치제도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공통언어를 사용하였고 이때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제전을 통해 각 폴리스와의 제도적 결속과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고, 비록 계급을 나누는 사회였으나 그로 인하여 더 큰 힘을 과시하는 정치‧사회적 이념을 극대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으로 본다면 BC6세기경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소아시아를 정복했으며 오리엔트도 통일하였고, 나아가 페르시아 세계제국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 지구상 어느 국가도 그 역사가 영원성을 보장받을 수도, 보장할 수도 없는 것이 세계사의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국력이 모자라면 패망과 멸망이라는 단계를 거치게 마련이니 힘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종속이론이 지극히 타당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리스시대에 자국의 영토를 넓히려고 인접국을 정복하고 그리하여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그 위세를 과시했다지만,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당하는 치열한 시대적 역사를 우러러 보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냄에 있어 그들은 그에 버금가는 통치철학과 이념이 있었기에 힘을 한데로 모으는 통치력이 가능했으리라 짐작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시대적 성격은 아니라 하여도 폴리스 나름대로의 철학과 이념으로 강한 국가를 만들었으니,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국가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헤로도토스의 역사학,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등과 투키디오스의 페로폰네소스 전쟁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보았듯, 그 가치관과 이념은 현대의 폴리스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시 한번 음미해 보아야 할 기록들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안에서 분별심으로 인한 시비와 갈등이 낳은 불행한 결과를 확실히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불이사상을 이해하여 분별심을 줄이고 시비와 갈등 대신, 조화와 화합의 길을 모색했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사회적으로 더욱 분화되고 국가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지역주의적 갈등과 이기적 발상의 이데올로기, 극단적인 신자본주의는 결코 개인의 발전이나 범사회적 국가경영에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 시대의 폴리스적 국가경영을 숙고하여 그러한 통치이념을 우리시대에 다소라도 가늠할 수 있다면, 아마도 더욱 견실한 지방자치와 굳건한 국가경영의 초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연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이 시대 이데올로기의 전부가 될 수 있을까? 이 시대에는 감성적 절대 공영의 이데올로기는 정말 생존할 수 없는 것일까?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국력이 분열됐을 때, 과연 우리 개인과 모두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을까?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불이사상을 이해하고 생활에서 실천해갈 때 이러한 의문은 저절로 풀려서 지구촌 전체가 공생공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불이사상을 화두로 삼아 삶의 순간순간에 살펴보고 의식을 바로하여 중도를 견지할 수 있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정리=강태희 충청 지사장

이 법문은 충남 부여 마강사 주지 해전 스님이 3월 5일 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1672호 / 2023년 3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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