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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나물

어딜 가도 일렬종대로 줄지어 피어 있는 가로수 벚꽃은 별 감흥이 없다. 고향 동네 앞산에 희뿌옇게 피어나던 토종 산벚꽃이라면 또 몰라도.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개나리와 벚꽃보다는 눈여겨 살펴보아야 겨우 보이는 달래와 냉이가 오히려 더 봄의 감성을 자극한다. 어릴 적 기억 속의 ‘봄’은 된장과 참기름으로 쓱싹쓱싹 대충 버무려 내놓으시던 어머니 표 ‘봄나물’의 향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내친김에 추억하는 나물 이름들을 사투리로 호명(呼名)해 본다. 달래이(달래), 머구 이파리(머위), 두룹(두릅), 엉개(엄나물), 오갈피(오가피), 돌내이(돌나물), 가중나무(가죽 나물) 등등. 이름만 들어도 벌써 입가에 침이 고인다. 나물 반찬을 좋아해서 더러 경동시장에 나온 자연산 나물을 사 먹기도 한다. 나물 좋아하는 사람은 나물 만드는 사람을 힘들게 한다. 먹는 것은 순간이지만, 손질하는 수고는 길기 때문이다. 잔치국수가 그렇듯이. 그건 뭐 그렇고. 사람들이 즐겨 먹는 나물들은 대부분 밭에서 키우는 모양이다. 처음엔 그런 줄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지만, 나물 고유의 알싸한 풀향기가 없는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나도 모르게 자연산과 재배산을 차별하게 되었다. 나물조차 자연에서 자란 것을 먹을 수 없다면, 인간이 좀 그럴 것 같아서.

가장 좋아하는 봄나물은 ‘응개’ 혹은 ‘엉개’의 새순을 뜨거운 물에 살짝 삶은 응개나물이다. 고향 집 뒷마당 돌담 위로 나이든 엄나무 한그루가 처연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늙은 엄나무 몸통에는 사나운 가시가 박혀 있어서 함부로 올라가지 못했다. 무시로 오르락내리락하던 감나무와는 달리. 어머니는 지혜롭게도 대나무 장대에 낫을 묶어 방금 돋은 응개 잎사귀를 능숙하게 채취했다. 한소끔 동안 무쇠솥에 넣었다가 시원한 우물물로 헹군 다음 즉석에서 된장과 참기름 양념으로 고소하게 버무려주셨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응개나물 맛은 변함없이 나를 미소짓게 한다.

응개나물은 두릅과 비슷한 맛이 난다고 개두릅이라고도 부르는가 본데, 나로선 몹시 못마땅한 작명(作名)이다. 청정무구한 산나물에 접두사 ‘개’를 붙이는 것도 그렇지만, 적어도 내 입맛에는 ‘두룹’과 ‘응개’가 족보를 완전히 달리하는 별개의 나물이기 때문이다. 두룹나물이 부드럽고 향긋하다면, 응개나물은 쌉쌀한 감촉 속에 특유의 중층적 감칠맛이 보태지면서 순식간에 우리의 미뢰(味蕾)를 차렷 자세로 곧추세운다. 두어 번의 젓가락질이 오가고 나면 처음의 거북함은 온데간데없고, 씹을수록 입안을 가득 채우는 오묘한 휘발성 향취에 할 말을 잃고 만다. 멀리 전라도 순천 장마당에 나온 자연산 응개나물 한 상자를 주문했다. 이 찬란한 봄에 꽃 구경보다 나물 타령을 하고 있다니, 별로인가. 그래도 꽃을 사랑할 나이가 완전히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니었으면.

주말에 고향인 경주를 다녀왔다. 인근에 있는 어머니 산소를 개장해서 유골을 봉안당으로 안치하기 위해서였다. 가는 곳마다 갓 튀긴 팝콘과도 같은 벚꽃잎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나들이 나온 젊은 부부와 예쁜 아이 둘은 정지상태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따뜻하고 여유로운 주말 풍경. 얼굴 찡그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얀 벚꽃과 상아색 목련 잎 사이로 샛노란 개나리가 봄에는 ‘자기도 있다’고, 보라는 듯 고개를 쳐드는 모습도 보였다. 아무튼.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동리 뒷산에 묻혀있던 어머니의 육신을 곱게 화장해서 경주 하늘마루에 모셔놓고 늦은 밤 기차를 탔다. 
이제야 ‘안도한다는 마음’과 그래도 ‘섭섭하다는 마음’이 동시에 양가감정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맘때쯤이면 ‘복(福)’자가 새겨진 사기그릇에 담겨 무덤덤한 표정으로 밥상에 오르던 응개나물 숙회와 햇된장 버무리가 생각난다. 어쩌면 그날 나는 그 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봄나물 반찬을 종일토록 맛나게 먹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76호 / 2023년 4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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