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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 상을 떠나 적멸에 들다)

기자명 진우 스님

신심이 청정하면 실상법신임을 깨달을 때 최상의 공덕 성취

상이 없는 무주무상의 실상이면 곧 금강반야바라밀
실상이란 상은 일체상을 여읜 원허태공의 청정법신
말이라는 상도 진실된 실상이 아니니 분별상 떠나야

‘금강경’을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하기만 하면 청정한 반야의 묘한 땅과 그 뜻이 합하여 실상법신이 된다.
‘금강경’을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하기만 하면 청정한 반야의 묘한 땅과 그 뜻이 합하여 실상법신이 된다.

이시 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이백불언 희유 세존 불설 여시심심경전(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 世尊. 佛說 如是甚深經典) 아종석래 소득혜안 미증득문 여시지경(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 如是之經) 이때에 수보리가 이 경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 깊은 뜻을 잘 이해하고 흐느껴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옵기를,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렇게 심히 깊은 경전을 설하시는데 제가 예로부터 쫓아오면서 얻은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시기 이전에도 목숨을 던지는 복덕(福德)에 대해, “오늘의 여래(如來)가 된 것은 억겁(億劫)의 전생(前生)을 거쳐 오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보시한 까닭”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수보리는 이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고, 목숨을 내놓는 보시(布施)는 수행인도 행하기 어려운 일인 동시에, 도(道)를 얻음에 있어서는 이러한 복덕이 반드시 필요한 행임을 알았던 것이니, 이제 금강반야바라밀을 얻음에 있어서도, 목숨이 목숨 아닌 줄을 알아서 목숨을 지푸라기 같이 던질 수 있는 보시(布施)를 행해야 그 복덕으로 여래(如來)가 되는 것임도 알았다.

나아가 목숨이 목숨이 아니라는 것, 항하(恒河)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신명(목숨) 보시를 하더라도 보시가 보시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하나만이라도 여실히 깨닫는다면 그 어떤 보시보다 큰 복덕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때에 수보리는 최후의 한 막(幕) 마저 터짐을 깨달았고, 드디어 온 우주에 걸쳐서 진리 전체가 여실히 드러남을 알게 되었다. 이에 수보리는 흐느껴 울었고, 감동에 못 이겨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희유(希有)하였고, 부처님께서 이끌어 주신 방편법(方便法)이 희유하였고, 후세에게 전하시려 호념(護念) 부촉(咐囑)하시던 은혜가 희유하였고, 말과 글 밖의 법(法)을 전수(傳授)하심이 희유하였다.

또한 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희유하였고, 법 가운데서도 가장 희유하였으니, 전생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지혜의 눈으로도 들어보지 못한 희유한 가르침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당지 시인성취제일 희유공덕(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 是人成就第一 希有功德)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 여래설명실상(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의 말씀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바로 실상을 알 것이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줄로 마땅히 알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은 진실된 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그 이름만을 실상이라 하셨습니다.”

수보리는 왜 일찍이 듣지 못하던 경이라 했을까? 이 경이 참으로 희유(稀有)하므로 누구든 이 경을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淸淨)하기만 하면, 청정한 반야(般若)의 묘한 땅(妙地)과 그 뜻이 합하여 실상법신(實相法身)이 됨을 알았다.

또 신심(信心)만 청정하면 이것이 곧 실상법신(實相法身)이고, 이를 깨달은 사람이야 말로 마땅히 제일 희유한 최상의 공덕을 성취할 줄로 아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이를 깨친 사람은, 마음이 청정하여 사상(四相-아, 인, 중생, 수자)에 집착하지 않아 관찰(觀察-보는 마음)이 청정했고, 관찰함이 청정하므로 믿는 마음이 청정하여, 이 경전을 들음에 곧 마음이 머물지 않고 상(相)이 없는 무주무상(無住無相)의 실상(實相)이 된 것이다.

머물지 않고 상(相)이 없는 무주무상(無住無相)의 실상(實相)이면 이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금강반야바라밀이요, 제불제불(諸佛諸佛-모두가 부처)이오니 이것이 제일 희유한 공덕의 성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實相)이라 하면 또 실상이 아니 되는 고로, 실상이라는 상(相)은, 상(相)을 말하는 상이 아니고, 일체상을 여의어 실다운 이치인 원허태공(圓虛太空-큰 공마저 비어서 이름 하여 원만한)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이름함이니, 그 자리는 형체도 없고 흔적도 없고 상모(相貌,상의 모양)도 없기에 상(相)이라 할 것이 못된다. 이런 까닭에 실상(實相)이라 한 것은, 여래께서 그 이름만을 실상(實相)이라 하심에 불과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대학진학에서의 면접시험이나, 직장에 입사를 위한 면접시험이나 공무원의 면접시험에서도 말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따라 합격 불합격이 결정되는 시대이다.

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도 한다. 그만큼 말이란 나의 호감도를 높이기 위한 중요한 교류 수단이다. 그리고 직접적인 이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말기술을 배워 말을 잘 한다 하더라도 평생 동안 계속적으로 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은 기술이 아니라 복합적인 마음의 표현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에 진실성이 없으면 단순히 말을 잘 한다 하더라도 금방 탄로가 나게 된다. 그런데 말을 잘 하기가 쉽지 않다. 선천적으로 말을 곱게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말 또한 상대적이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에 따라 말씨에 그대로 묻어 나오게 된다.

아무튼 말을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부처님 법(法)에 대해 청정(淸淨)한 신심(信心)이 돈독해야 한다. 불법(佛法)에 대한 신심(信心)이 투철한 사람은 말이 험하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게 되므로 상대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한다. 만약 아무리 말을 잘 해도 상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 부처님 법에 대한 신심(信心)이 부족하여 믿음이 청정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니, 스스로 참회해야 한다.

말은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이란 본능적으로 유리한 것을 선택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이 생각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말을 하는 이유 역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선택하기 위함이니,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이 클수록 말에 따른 구설이 크게 따르게 되며, 분별심이 작을수록 말에 따른 구설이 작게 따른다.
따라서 말을 잘하면 물론 좋기는 하겠으나, 무조건 잘하려고만 한다고 해서 잘해지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인과(因果)가 생기지 않고 말에 대한 집착심이 없어져서 걱정 근심이 생기지 않게 된다.

말을 너무 잘하려고 하는 생각이 지나치면 걱정 근심이 생긴다. 걱정 근심은 집착에서 나온다. 집착은 업을 낳아 계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매번 반복하여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이라는 상(相), 말을 잘해야 한다는 상, 말을 잘못한다는 상, 내 말에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상, 등등의 상은 진실된 실상(實相)이 아니니 이러한 분별(分別) 상(相)을 떠나야 한다. 

어떤 이는 소납의 명상 글 내용을 인과(因果) 법문, 인연 법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물론 폄훼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소납의 생각으로는 기본적으로 인과법(因果法)을 모르면 부처님 법을 절대 알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또 인과(因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말한다. 인과(因果)를 제외하고, 공(空)의 도리는 물론, 유식(有識), 중론(中論), 화엄(華嚴), 법화(法華), 반야(般若), 나아가 격외도리(格外道理)인 선(禪)이 왜 필요할 것인가. 원인을 모르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즉 인과(因果)를 벗어나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마음을 깨쳐야 인과를 벗어날 수 있음을 알 것인 즉, 오직 인과(因果)를 벗어나는 길이 곧 해탈(解脫)이요, 열반(涅槃)이요, 성불(成佛)이므로 인과(因果)는 중생의 모든 모습 그 자체인 것이다.

평면적인 인과법(因果法)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로 해석된다. 좋은 원인을 지어야 좋은 결과를 맺고, 나쁜 원인을 지으면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인과법(因果法)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인과(因果)는 마음의 모양이다. ‘하나가 생기면 다른 반대의 하나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인과(因果)의 기본 법칙’이다. 마음의 근(根),경(境)인 12처(處)와, 육식(六識)을 더한 18계(界), 이 모두는 인과(因果)에서 비롯된다. 고락(苦樂)의 분별(分別)이 생긴다. 그래서 마음이 인과(因果)요,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상도 인과(因果)의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모든 중생은 누구나 즐거움과 기쁨, 행복과 희열을 추구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걱정 근심, 고통과 괴로움, 불행과 불안 불편, 이 모든 우비고뇌(憂悲苦惱)의 과보(果報)가 생긴다. 바로 인과(因果)의 법칙에서 비롯된다.

배가 너무 고프면 고통스럽다. 배가 불러야 고통도 사라진다. 배고픔이 없어지면 고통도 사라짐과 동시에 기분이 좋아지고 즐거워진다. 따라서 고통과 즐거움은 지구의 대척점인 낮과 밤과 같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중생의 삶이요, 현실이다. 이것이 인과(因果)의 모습이다.

인과(因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과(因果)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공(空)의 도리를 알아야 하며, 유식(有識)과 중관(中觀), 화엄(華嚴)과 법화(法華) 금강(金剛) 등의 부처님 말씀을 청정히 들어야 하고, 더 나아가 선(禪)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

모든 욕심은 인과(因果)에 따라 괴로움의 과보(果報), 즉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괴로움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과(因果)는 현실이요, 실전이다. 인과(因果)와의 전쟁에서 이겨야 비로소 중도(中道)의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다. 과연 인과(因果)를 얼마나 절실하게 체득(體得)하느냐에 따라 ‘금강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77호 / 2023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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