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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승군(僧軍), 군인으로 불렸던 스님들

기자명 민순의

전투 참여보다 토목공사 등 국가노역에 종사

고려시대 항마군은 사찰 노역 종사하던 ‘반승반속’ 사람들  
조선시대에도 승군은 행랑조성·궁궐 수리 공사 등에 동원
지위와 직능 뚜렷하게 인정받았던 신분 아니었을 것 추정

함경남도 안변군 소재의 석왕사. 무학대사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이성계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도처로 세웠다고 전한다.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94호로 지정돼 있다.[국립중앙박물관]
함경남도 안변군 소재의 석왕사. 무학대사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이성계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도처로 세웠다고 전한다.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94호로 지정돼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지난 호 글을 마무리하며 중종 31년(1536) 한강 견항 공사에 참여한 스님들의 성격을 승군(僧軍), 비전문 노동, 호패(號牌)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었다. 이 중 오늘은 먼저 승군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승군. 스님의 군대, 또는 스님인 군인.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새기며 아마도 많은 분께서 전투에 임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다. 사실상 그러한 전투 병력으로서의 승군이 한국불교사에 없지 않았다. 잘 알려진 예가 바로 고려시대의 항마군(降魔軍)이다. 고려 숙종 9년(1104) 북방 여진족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별무반(別武班)이라는 군대가 신설되었는데, 항마군은 그 휘하의 병종으로서 스님들을 선발하여 조직한 부대였다.(‘고려사’ 권81, ‘지(志)’ 권제35.) 또 고종 4년(1217)에는 거란족의 침공을 당하여 양광도(현재의 경기도 북부 지역)와 충청도의 병사와 승군을 동원하여 방어하게 하였으며(‘고려사’ 권22, ‘세가(世家)’ 권제22), 우왕 8년(1382)에는 경상‧강릉‧전라 3도가 왜구의 침입을 당하자 이를 막고자 최영이 전국 각도에서 군사와 승도를 모집하기도 했다(‘고려사’ 권113, ‘열전(列傳)’ 권제26).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이 군대에 편입되어 실제 전투에 투입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만 상설부대로서의 승군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외침 등의 유사시에 스님들의 전투부대가 임시로 조직되었다가 해산되기를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러한 승군에는 어떤 부류의 스님들이 편입되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사가 발견된다. 숙종 때 별무반 휘하의 항마군을 소개하면서 부기된 내용이다.

국초(國初)에 내외(內外)의 사원(寺院)에는 모두 수원승도(隨院僧徒)가 있었는데, 항상 노역을 맡아 하여 군현(郡縣)의 거민(居民)과 같았고 일정한 재산[恒産]을 소유한 자가 많게는 천백(千百)에 이르렀다. 매양 국가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마다 역시 중앙과 지방의 여러 사찰의 수원승도를 징발하여 여러 군대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고려사’ 권81 ‘지(志)’ 권제35)

수원승도란 사원/사찰에 딸려 있는 승도라는 뜻인데, 내용으로 보아 엄밀한 의미의 스님 즉 절에 상주하며 불법을 닦고 법계를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수계승과 달리 사찰 안팎에 거주하며 사찰 운영에 필요한 노역에 종사하던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승도’로 명명되었던 것은 이들 또한 승단의 일원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여말선초의 기록에서 당대 승려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3할로 언급되었던 것 또한 이들까지 포함한 수치인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고려시대의 승군은 스님으로서의 성격과 직능이 뚜렷하지 않은 채 교단 내의 계급 질서에서 비교적 낮은 지위를 차지하던 수원승도 같은 인원들로부터 충원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가 되어서도 유사한 상황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 초에는 큰 전쟁이 없이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가 지속되었으므로 승군이라고 불린다 해도 이들이 실제의 전투에 투입된 예는 없었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으로 승군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태종 1년(1401) 때의 일이었는데, 이 해 태상왕 즉 태조의 명에 따라 함길도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 서쪽에 25간의 궁을 짓는 데에 공장승인(工匠僧人) 80명과 독승군(督僧軍) 50명이 동원되었다고 되어 있다.(‘태종실록’ 권1, 1년 5월 21일.) 공장승인이란 물품 제작의 기능을 보유한 스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바, 독승군이란 그 외에 추가로 배정된 노동력으로 파악된다. 그러니까 이때 석왕사에서 일했던 독승군은 이름은 군인이었으되 실제로는 (어쩌면 공장의 기술조차 보유하지 못한 채 단순 노동을 위하여) 그저 공사에 투입된 스님이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승군이라 불렸던 조선의 스님들은 지속적으로 토목공사 등의 국가 노역에 등장한다. 먼저 태종 본인이 궁실 건축을 둘러싼 신료들과의 논쟁에서 “오늘날 역사하는 것은 모두 승군(僧軍)들”이라고 언술한 예가 있으며(‘태종실록’ 권2, 1년 7월 23일), 이후로도 태종 대의 종로 행랑(行廊) 조성과 군자고(軍資庫)‧풍저창(豐儲倉)의 건립, 세종 대의 태평관(太平館) 역사와 흥천사 사리각 수리공사, 성종 대의 궁궐 수리 공사 등에 승군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전투 병력이 아니었음에도 국가 노역에 투입된 스님들을 굳이 ‘승군’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무엇일까. 전통시기 군(軍)은 단지 무장한 병력의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미 고려시대에 병력의 일익을 담당하는 부대 외에 공역군(工役軍)이라 하여 비전투의 군이 존재하였고(‘고려사’ 권81, ‘지’ 권제35), 조선시대에도 국민개병제의 원칙에 따라 신분고하를 막론한 모든 장정이 군역(軍役)의 의무를 지며 생애 일정 기간 동안 정기적으로 병졸(兵卒)로 임군(臨軍)하거나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심지어 ‘실록’에는 군인들을 국가 공사에 활용한 사례가 다수 기록되어 있기도 하여, 공역을 담당하는 인원에게 군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에 어색함은 없었다. 사실상 중종 23년(1528)에 실행되었던 1차 견항 방색 공사에도 군인들이 투입되었음을 지난 글에서 확인한 바 있다.

조선의 승군이 군인으로 불리면서도 실제로는 토목공사 등 노역에 주로 등장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의 승군 스님들 또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그 지위와 직능을 뚜렷하게 인정받았던 신분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승역에 동원된 스님들을 대상으로 도첩을 발급한 사례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승역에 종사하고서야 도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이 애초 도첩을 지닌 공인승이 아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종 31년 견항에서 한강물을 막은 스님들이 다름 아닌 승군으로 불렸던 것은 그 공사에 나아갔던 다수의 스님들이 바로 그 정도의 지위와 처지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 때 승역의 대가로 도첩이 아닌 호패가 발급되었던 것은 도첩제도가 이미 폐지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스님들에게 발급된 호패란 도대체 어떠한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일까. 다음 글에서 이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77호 / 2023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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