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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향곡·자운 큰스님들의 봉암사결사를 어찌 잊겠습니까”

13세 때 향곡 스님 따라 문경 봉암사 결사 현장에 간 뒤 성철 스님 시봉하면서 행자생활 지내
6·25 당시 성철 스님 지시로 인민군 점령한 해인사 가서 새벽마다 장경각 지붕에 태극기 덮어
박정희 대통령에 “고문 말라” 직언했다가 큰 고초…10·27법난 때도 온갖 고문 당하는 등 수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지원으로 민족화합·통일조국 기원 위한 대불 조성
1986년 해인사 승려대회 열어 불교자주권 회복·불교관련 악법 철폐 요구
여야 정치인들 설득해 불교재산관리법 폐지하고 불교방송국 개국 이끌어내

팔공총림 방장에 추대된 의현 스님은 사명대사 박물관 및 교육관 건립을 통해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사진=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팔공총림 방장에 추대된 의현 스님은 사명대사 박물관 및 교육관 건립을 통해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사진=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팔공총림 방장 의현 스님과의 대담은 4월11일 동화사 동별당에서 진행됐다. 때마침 이날 세간의 관심은 온통 동화사에 쏠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구로 귀향한 후 첫 나들이로 동화사를 찾은 것이다. 언론들은 박 전 대통령이 그동안 각별한 친분을 유지해 온 의현 스님이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으로 추대된 것을 축하하고 봄기운이 가득한 동화사에서 의현 스님과 차담을 나누기 위해서라고 전했다. 

이날 대담은 자연스레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시작됐다. 스님은 박 전 대통령과의 첫 인연이 2012년 말 제18대 대통령 선거 무렵이었다고 했다. 당시 박 후보가 부산 해운정사를 찾아 종정 진제 스님을 예방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뤄졌다. 

의현 스님은 박 후보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념을 통해 인류의 삶을 한 단계 업드레이드 시킨 세계적인 지도자”라고 덕담하면서 “박 후보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까지 땅에 떨어지게 된다. 절대 사도(邪道)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수차례 조언했다. 이 일을 계기로 박 후보는 의현 스님과 인연이 깊어졌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종종 스님을 만나 조언을 구하면서 돈독한 신뢰 관계를 이어왔다. 

스님은 40여년 전 있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들려주었다. 1975년 박 대통령이 대구로 연두순시를 나왔을 때였다. 당시 동화사 주지를 맡았던 스님은 대구지역 종교대표들과 함께 박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 그 자리에서 스님은 박 대통령을 향해 “대통령께서는 보릿고개를 면하게 해준 위대한 성군이지만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서 “인권이 곧 불성(佛性)인데, 사람을 잡아다가 정보부에서 고문하는 일은 더 이상 안 하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절대권력을 향한 ‘돌직구’는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스님은 곧바로 사상범으로 낙인찍혀 교도소에 수감됐고, 온갖 고문과 핍박을 당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단식으로 맞서면서 나라를 위한 소신이었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서야 구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이 그렇더라도 직접 말하는 일은 켤코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지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지 몰라요. (하하) 중앙정보부에서 사람들을 잡아가고 고문하는 것을 종교인으로서 그냥 볼 수 없었어요. 대통령을 만나면 꼭 직언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10·27법난 때도 신군부를 비판하지 않았다면 보안사로 끌려가 고문을 받는 일이 없었을지 모를 일이지요.”

▶왜 신군부에 강제 연행된 것입니까?
“10·27법난은 신군부가 군홧발로 전국 사찰을 급습해 교권을 유린한 사건이었습니다. 불교계로서는 결코 그냥 넘겨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은해사 주지였던 저는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긴급 중진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신군부가 국민이 선출한 국회를 해산하고 헌정질서를 무너뜨렸다. 그것도 부족해서 전국 사찰을 급습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우리 불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교권, 인권, 주권을 쟁취하고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사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발언을 하던 중에 군인들에 의해 서빙고실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몽둥이로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거꾸로 매달고, 코에 약물을 넣고,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도살장이 극락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보안사에서 강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고문을 하면서 ‘나는 엽색행각을 일삼는 파렴치범이고, 대한불교조계종은 부도덕한 집단’임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12·12는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한 혁명이고,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지지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지장을 찍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으로 정신이 혼미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였지만 거부했어요. 나를 고문하는 군인에게 ‘내가 죽으면 그때 지장을 찍어라.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절대 찍는 일이 없다’고 단호히 말했어요.”

▶고문이 더 심해지지는 않았나요?
“그랬습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총칼도 내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혼미했던 정신이 다시 맑아졌고, 속에서 환희심 같은 것이 솟아 올랐어요. 내가 이 말을 해서 당장 죽게 되더라도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고, 할 말은 했다는 자긍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문 후유증은 없었나요? 
“척추가 망가져서 핀을 박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날이 궂으면 온몸에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고통이 몰려옵니다.”

▶극심한 고문을 견딜 수 있었던 데에는 봉암사 결사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봉암사 결사 때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입니까?
“그때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을 때는 열세 살 정도였습니다. 향곡 스님을 따라 봉암사에 가서 성철 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성철 스님께서는 익힌 음식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들에 나가 나물을 뜯고, 불린 쌀을 맷돌에 갈아 공양 올리는 일을 담당했어요. 또 성철 스님이 머물던 조실채에서는 청담, 자운, 향곡 스님 등이 자주 오셔서 법담을 나누셨는데, 그때 향곡 스님과는 선(禪)을 주제로, 자운 스님과는 계율을 주제로 대화를 하셨어요. 그 모습을 곁에서 귀동냥을 하고 공부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봉암사 결사 이후 해인사로 가셨습니다. 어떻게 가게 됐나요?
“봉암사 결사가 중단된 뒤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이 계시는 묘관음사를 갔다가 다시 고성 문수암으로 갔습니다. 그때 한국전쟁이 일어나 전 국토가 불바다였습니다. 그때 성철 스님께서 저에게 해인사로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전쟁이 한창인 난리통에 인민군이 장악한 해인사에 왜 가라고 하시냐’면서 ‘스님을 계속 시봉하며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해인사로 가면 장경각을 보호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큰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가겠다고 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해인사 장경각이 폭격당할 위기를 막았다고 들었습니다.
“해인사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들은 낮에는 숲에 숨어있다가 밤에 활동했습니다. 유엔군 폭격기가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호시탐탐 해인사 주변을 저공비행하고 있었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소실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해인사 원주였던 법홍 스님이 아이디어를 내서 밀가루 포대를 엮어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태극기를 새벽마다 장경각 지붕에 올라가 펼쳤고,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거둬들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대한민국을 지지하고 팔만대장경을 수호하고 있는 스님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의미였죠. 그 때문인지 다행스럽게 해인사는 폭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성철 스님께서는 역시 보통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거듭 확신하게 됐습니다.”

▶동화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제 은사이신 상월 스님은 불교정화운동 당시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신 석우 스님의 사제입니다. 그런 인연으로 석우 스님께서 고성 옥천사 백련암과 진주 응석사에 주석하실 때부터 시봉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석우 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되면서 동화사 조실을 맡으셨는데, 그때부터 저도 동화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동화사 금당선원은 많은 선지식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 금당선원은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 금강산 마하연선원과 쌍벽을 이루는 곳이었습니다. 마하연 선원에서 공부하던 수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정진했고, 금당선원에서 정진하던 분들이 마하연 선원으로 가고 그랬습니다. 수좌들 사이에서 금당선원은 성지 같은 곳이었습니다. 성철 스님이 견성한 곳도 금당선원입니다.”

▶동화사에서 수많은 불사를 하셨습니다. 세계 최대 석조약사여래대불로 대구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약사여래 통일대불이 대표적인 것 같습니다. 통일대불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대그룹 창업주이신 정주영 회장님과 뜻을 모아 통일을 기원하는 대불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온 겨레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약사여래불을 조성하고, 그 공덕으로 우리 민족이 화합해서 통일 조국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원래는 남북의 중심지인 수도권 인근에 세우려고 했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과거 삼국통일의 발상지로 신성한 기운이 깃든 이곳 팔공산 동화사에 세우기로 한 것입니다.”

▶정주영 회장님과는 인연이 깊으셨던 모양입니다. 
“정 회장님은 예전에 금강산에 갔다가 갑자기 내린 눈으로 길이 막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장안사에 머무르게 됐다고 합니다. 다행히 스님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면하고 다음 날 떠날 때에는 떡까지 챙겨줬던 그 마음을 잊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정 회장님 부인인 보현행 보살님도 불심이 깊어 많은 불사에 시주를 해주셨습니다. 사실 통일대불 불사도 정 회장님의 시주로 진행된 것입니다.”

▶1994년 상무대 이전 자금이 통일대불 불사금으로 사용됐다는 등 의혹이 제기돼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것으로 압니다. 왜 사실대로 밝히지 않으셨나요?
“불사를 진행하면서 정 회장님과 약속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정 회장님은 ‘통일대불을 건립하는 데 후원을 했다고 하면 다른 종교단체들도 너도나도 와서 돈을 달라고 하니 꼭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한 것입니다. 정 회장님과 일단 약속한 이상 끝까지 지키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군부대 이전 비용을 불사금으로 사용할 수 있겠어요. 그게 사실이었다면 신군부 체제 하에서 제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습니까.”

▶1986년 9월7일 해인사 승려대회를 열어 “불교의 자주권 회복과 불교관련 악법 철폐”를 요구했습니다. 이 승려대회는 월간잡지 ‘신동아’가 ‘해방에서 5공화국까지 현대한국을 뒤흔든 60대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근현대불교사에서도 혁신적인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승려대회를 준비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사찰령을 반포해 전국의 사찰들을 통제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가 사찰령을 모법으로 하는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해 다시 불교계를 억눌렀습니다. 총무원에서 주지 발령이 나도 해당 시·도의 관에 등록을 해야만 대외적으로 주지 자격을 갖출 수 있었어요. 사찰의 예산, 결산도 시도에 보고해야 됐습니다. 자율권을 모두 박탈당했던 거지요. 해방은 됐지만, 불교계는 여전히 일제강점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불교재산관리법은 일제의 잔재로 불교를 제약하는 악법으로 반드시 폐지시켜야 할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계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법난으로 철저하게 교권을 유린 당했습니다.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사과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이 불교 자주화를 실현하는 첫걸음이라 여겼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를 결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그렇게 해서 준비가 된 것이었습니다.”

▶해인사 승려대회 이후 정부 반응은 어땠습니까?
“승려대회를 마치고 총무원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장세동 안기부장과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사표부터 내라고 했습니다. 누가 지시한 것이냐고 물으니 대통령(전두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종도들에 의해 선출된 총무원장인데 이대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머리카락이 반쯤밖에 없던데, 나머지 반도 깎고 출가해서 승적을 얻은 뒤 그때 나에게 와서 사표를 내라고 하면 고려해보겠다. 지금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대통령에게 전하라’고 말했어요. 이후 안기부는 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습니다. 미행하고 도청하고, 비리가 있는지 샅샅이 뒤지고 여자 문제 등 온갖 음해공작을 다 하더라고요. 꿋꿋하게 견뎠고 음해들이 사실이 아님도 하나하나 밝혔습니다.”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기까지 어떤 노력을 기울이셨습니까?
“법을 바꾸는 것은 결국 국회를 움직여야 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일이 여야 정치인들을 찾아다니며, 불교재산관리법의 부당성을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치권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11월 국회가 불교재산관리법을 폐지하고 마침내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체입법을 한 것입니다. 치밀한 관리와 통제에서 지원방식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됐던 거지요.”

▶불교방송국 개국허가를 받아낸 것도 큰 성과로 꼽힙니다.
“포교를 위해서는 반드시 방송국이 있어야 했습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10·27법난에 대한 속죄를 위해서라도 불교방송국 허가를 내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깊이 고민하더니 노태우 후보의 공약에 반영하도록 하자고 했어요. 하지만 노 후보는 ‘기독교표’를 의식했던지 미온적이었습니다. 노 후보와 밥을 먹는 자리에서 ‘노 후보는 면사무소에서 계산기나 두드리는 말단 직원 정도밖에 안 되고, 한 나라를 경영할 그런 재목은 아닌 것 같다’면서 숟가락을 탁치고 나와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를 본 몇몇 민자당 국회의원들이 ‘서 원장을 잡아넣어야 한다’는 말까지 하고 그랬죠.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불교방송국 설립은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뻔히 구설수에 오를 것을 예상하면서도 전국의 본말사 주지스님들을 모아서 지지를 표명하면서 노 후보를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노태우 후보의 공약에 ‘불교방송국 설립허가’가 반영된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 과제는 전법…그것이 지혜 밝히고 불법 잇는 길”

팔공총림 방장 의현 스님은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 법을 이웃들에 전해야 하며, 그것이 지혜를 밝히는 일이고 불법을 잇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사진=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팔공총림 방장 의현 스님은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 법을 이웃들에 전해야 하며, 그것이 지혜를 밝히는 일이고 불법을 잇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사진=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서울 조계사 인근과 목동에 땅을 매입했습니다. 당시 총무원 재정이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제가 총무원장을 할 때 종단 예산은 몇 억원에 불과했습니다. 직원들 월급 주기에도 빠듯했어요. 그렇더라도 종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땅을 매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계사 주지였던 현근 스님과 신도분들의 원력을 모아 당시 어렵게 구입한 땅들이 지금의 목동 국제선센터, 조계사 앞 불교문화사업단 건물이 들어선 자리입니다.”

▶10·27법난에 대한 정부차원의 유감을 받아낸 것도 이 무렵이었지요?
“1988년 국회가 ‘5공 비리특위’를 구성해서 전두환 정권의 비리에 대한 진상규명에 착수하면서 신군부가 자행한 비리가 속속 드러났어요. 우리 불교계도 10·27법난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했어요. 제가 문공부 장관을 직접 만나서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어요. 그랬더니 강영훈 국무총리가 그해 12월 정부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유감을 표명하고 불교계에 보상하고 권익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1994년 개혁회의로부터 반개혁적 인물로 낙인찍혀 종단에서 쫓겨나는 일을 겪었습니다. 스님께서는 1994년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너무나 괴로웠지요. 그런데 문득 1994년의 일은 금생은 아니더라도 전생에 지은 죄에 대한 과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업장을 소멸해야겠다고 발원하고 속리산에서 비닐움막을 짓고 수년간 참회정진을 했던 것입니다.” 

▶1994년 개혁회의 출범 이후 스님과 연관됐다는 이유로 멸빈의 징계를 받아 여전히 종단으로부터 버림받은 스님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돕기 위한 방안이 있습니까?
“오직 불교를 위해 온갖 고난을 함께 했던 도반들이 징계를 받을 때, 내 팔과 다리가 잘라나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무한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중앙종회에 나가 간절히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부모를 살해한 악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불제자로서 불교 일을 하다 서로 의견 차이로 징계를 당한 것인데, 이제는 제발 풀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2021년 입적한 전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 병상에 계실 때 제가 병원을 찾아가 그 자리에서 아픈 무릅을 쥐어가며 108배를 올리며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참회했습니다. 섭섭한 점이 있더라도 이제는 용서하고 서로 화합해서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종단이 화합할 수 있는 길을 꼭 찾겠습니다.”

▶스님께서 팔공총림 동화사 2대 방장에 추대됐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팔공총림 방장을 추대하는 과정에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는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은 종정을 역임하신 진제 대종사님께서 한 번 더 맡았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2월7일 동화사 방장후보를 추천하는 산중총회에서도 ‘진제 대종사님의 법력과 그늘 밑에서 수행하면서 사명대사 박물관과 교육관을 건립한 이후 팔공산 자락에서 재적승들이 보는 가운데 열반에 들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진제 대종사님께서 팔공총림 방장으로 대중을 이끌었으면 좋겠다는 제 생각을 대중들에게 전한 것이었습니다. 아쉽게 그 뜻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결제나 해제, 중요한 행사 때마다 진제 대종사님을 모셔서 법문 듣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 당시 스님께서는 고령임에도 신도들과 함께 룸비니를 직접 찾아 결사대중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가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3일동안 1167km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결사로 인해 한국불교가 하나로 응집할 수 있는 큰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세계 속에 우뚝 서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방장 승좌법회를 하지 않고 튀르키예 지진피해 돕기 법회로 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팔공산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고 합니다. 인민군은 대구를 함락하기 위해 총공세를 퍼부었고, 이를 막기 위해 국군과 연합군이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때 많은 튀르키예 병사들이 전사했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받은 후손으로서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를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번 법회에서 그 병사들을 위한 천도재도 정성껏 봉행했습니다. 그 영가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앞으로 팔공총림도 잘 될 것으로 믿습니다. 승좌법회보다 튀르키예 돕기 법회가 더 값지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방장에 추대된 이후 사명대사 박물관 및 교육관 건립을 강조하셨습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께서는 승병들과 함께 국토를 유린한 왜적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영남치영아문도 설치해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그럼에도 전국 사찰에 사명대사를 조명하는 박물관 하나 없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명대사의 박물관과 교육관을 조성해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대작불사는 불교계 큰스님들께서 이끌어주시고 사부대중의 지혜와 우리 모든 국민들께서 보살펴 주셨기에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

▶불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에서 ‘비여암중보(譬如暗中寶) 무등불가견(無燈不可見), 불법무인설(佛法無人說) 수혜막능료(雖慧莫能了)’라고 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캄캄한 가운데 보물이 있으나 등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부처님 가르침도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비록 지혜가 있으나 능히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 법을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를 밝히는 일이고 불법을 잇는 길입니다.”

대담=이재형 편집국장 mitra@beopbo.com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677호 / 2023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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