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43.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52)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8)

의상이 지엄의 화엄종 전수한 것은 수학과정 고려할 때 당연한 귀결

의상은 유학 전 구역불교 이해를 바탕으로 신역까지 두루 접해
스승 지엄은 지론종 중심으로 삼계교‧정토교 등 구역 깊이 이해
신라서 구역 접했던 의상은 현장보다 지엄에게 더 친밀감 느껴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전경, 국보.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전경, 국보. 

지금까지 의상이 당에 유학하여 종남산 지상사에 머무는 10여년 동안 화엄종 뿐만 아니라 지론종·계율종·삼계교 등 수·당대 여러 종파의 승려들과도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았음을 추정하여 보았다. 본고에서 이러한 사실들에 지나치리만큼 많은 분량의 지면을 할애한 것은 그 동안 화엄종 지엄의 영향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불교사학계에서의 편협한 이해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였다. 그런데 불교사학계 일각에서는 의상이 지론종·계율종·삼계교 등의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당에 유학하기 이전에 이미 국내에서 수업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주장도 없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서술의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당 유학 이전으로 소급하여 다시 국내에서 수학하는 과정을 검토하려는데, 문제는 의상의 출가 이후 수학하는 과정에 관한 사실을 전해주는 자료가 전연 없다는 점이다.

의상의 출가 이후 국내에서 수학하는 과정을 추적하기 위하여 우선 의상(625~702)의 도당유학 이전 국내에서의 수업 기간을 계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의상의 출가 나이를 일반적 예에 따라 15세 전후로 추정하면, 1차 도당유학을 시도하던 650년까지는 26세 이전의 청년으로서 그때까지의 수학 기간은 11년간이 되고, 2차 도당유학에 성공한 661년까지는 37세의 장년 이전으로서 그간의 수학 기간은 무려 22년간에 달하는 장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의상의 8년 연상으로 평생 도반 관계였던 원효(617~686)가 법화행자인 낭지, 중관불교학에 일가를 이룬 사상가이자 대중불교운동의 선구자인 혜공 등의 선지식들과 널리 교류하면서 저술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의상도 원효와 함께 여러 선지식을 찾아 수학하고 있었음을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다. 

의상이 선지식에게 수업하였다는 사실은 원효와 함께 650년 고구려에서 백제 지역으로 망명한 보덕에게 ‘열반경’을 배웠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이미 구역불교 경전들 대부분이 전래되어 있었고, 548년 이후에는 현장에 의한 신역불교 경전까지도 새로 전래되고 있었던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650년 의상이 원효와 함께 도당유학을 결행하게 한 동기가 현장과 그 문하의 불교를 흠모해서였다는 ‘송고승전’ 의상전과 원효전의 내용은 이미 구역불교를 섭렵한 토대 위에서 신역불교를 새로 접하고 받은 충격이 작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원효는 2차 유학의 길에서 아예 중도 포기하고 귀환하였을 정도로 이미 종합적인 불교사상가로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음이 주목되고 있거니와, 초지일관 도당유학을 결행한 의상도 불교사상가로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의상은 당 장안에 도착한 뒤에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현장을 제쳐두고 종남산의 지엄을 찾아가서 막 새로이 흥기하기 시작하던 화엄종을 수업하였다. 당시 지엄(602~668)은 지론종의 교학을 전수하는 한편 ‘화엄경’의 독송과 보현행의 실천자인 두순의 불교를 계승하여 새롭게 화엄종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는 동시에 삼계교·정토교·계율종 등의 구역불교를 폭넓게 받아들인 반면에 현장의 신역불교, 특히 유식학에 대해서는 시종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지엄의 이러한 불교가 이미 국내에서 구역불교의 이해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의상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상이 지엄을 찾은 이유를 이렇게 이해할 때에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 서술한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의 장면이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종남산의 지상사로 찾아가서 지엄을 배알하였다. 지엄의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나서 그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신주(神州,중국)에까지 와서 덮고, 그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는데,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가 하나 있어 광명이 멀리까지 비쳤다. 꿈을 깨고는 놀랍고 이상히 여겨 청소를 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바로 왔다. 특별히 예의로 맞아 조용히 말하기를, ‘나의 어제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다’고 하고 입실(入室)을 허락하니, 잡화(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구석구석 분석하였다. 지엄이 학문을 상의할 영특한 자질을 만나서 새 이치를 능히 발견해내어 가히 깊은 것을 파고 숨은 것을 찾아내니, 쪽과 꼭두서니가 본색을 잃은 것과 같았다.” 이 이야기는 의상의 문도들에 의해 전승되면서 다소 윤색된 설화이기 때문에 그대로 사실로서 받아들이기는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으나, 그 설화의 배경이 된 분위기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의상이 출가하는 639년경은 신라가 527년 불교를 공인한 지 이미 100여년이 지난 때로써 고구려와 백제의 선진적인 불교의 영향을 받는 한편 중국에 유학승을 파견하여 남북조와 수·당의 불교를 직접 받아들임으로써 구역불교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신역불교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의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출토된 금제여래좌상, 국보.

특히 수에서 당에 걸쳐서는 국가의 대외기관이었던 홍려시(鴻臚寺)에 신라를 포함한 삼한의 승려를 교육하는 기관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유학승을 배출하게 되었고, 중국에서 유행하던 여러 학파의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의상도 본국에서 수학하는 과정에서 유학승을 통하여 전해져오는 삼론종·지론종·섭론종·열반종·계율종·삼계교·정토교 등을 광범하게 접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앞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에 머무는 동안 지론종·계율종·삼계교 등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본국에서 이미 섭렵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이상 열거한 종파들 이외에도 의상의 정토신앙과 관련하여 정토교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으며, 의상의 ‘일승법계도’에서 비판 대상으로 삼은 것은 선종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이었다는 새로운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어서 (이시이 코세이, ‘화엄사상の연구’ 제1부 제3장 제3절 4.‘법계도’의 비판대상), 의상의 화엄사상에 대한 이해는 다방면에서의 폭넓은 접근이 요구되는 문제로 확대되었다.

본고에서는 의상의 불교에 영향을 미친 종파로서 지론종·삼계교·계율종 등이 의상의 도당유학 이전에 신라에 이미 전파되었을 가능성만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지론종은 고구려를 경유하여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는 일찍부터 지론종·삼론종·열반종 등이 전래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지론종의 전래는 북제와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속고승전’ 법상전과 ‘해동고승전’ 의연전에서는 고구려 평원왕 18년(576) 즈음에 대승상 왕고덕이 의연을 북제에 보내어 당시 도통인 법상(495~580)으로부터 불교의 역사와 아울러 ‘십지경론’ ‘대지도론’ 등 경론의 저자와 교학 내용을 배워오게 하였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법상은 도빙(488~559)과 함께 지론종 혜광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지론종 남도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도빙의 학계는 영유-정연-지정-지엄으로 이어져 화엄종의 창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법상의 제자인 혜원은 지론종 남도파의 교설에서 본 남북조의 불교학을 집대성한 ‘대승의장’을 저술하여 교학사의 맥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에서 받아들인 지론종은 신라에도 전해졌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고구려와 신라는 전쟁 중이었으나, 승려의 왕래와 불교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실례로써 불교공인 때의 아도(527), 신라의 최초 승통으로 임명된 혜량(551), 의상과 원효에게 ‘열반경’을 전수한 보덕(650) 등이 모두 고구려에서 망명하여 신라불교의 발전 단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해동고승전’이 ‘속고승전’보다 의연이 법상에게 문의한 질문과 법상의 답변 내용을 좀더 자세하게 전해주는 사실을 보아 국내에서 별도의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삼계교는 진평왕대(579~632)에 신라의 유학승들에 의해서 전해져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평왕대에는 수에 유학했던 승려들이 연이어 입조사(入朝使)를 따라 귀국하고 있었는데, ‘삼국사기’ 등 사서에 전해지는 인물만도 원광(600)·지명(602)·담육9605)·안함(605)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원광은 일찍이 남조의 진에 유학하여 교학을 공부하던 중 589년 수가 진을 멸하여 중국을 통일하자 국도로 옮겨 섭론종 등을 전수하여 왔는데, 이때 삼계교도 함께 전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계교의 개조 신행(540~594)은 원광에 앞서 581년 수의 불교부흥정책으로 초청받아 국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신행은 삼계원(三階院)을 여러 사찰에 설치하면서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제1차의 전성기를 연출하였다. 

원광은 귀국한 뒤에 외교문서(乞師表)의 작성, 백고좌회의 주관, 새로운 사회윤리(세속오계)의 제시 등의 활동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가서갑(嘉西岬,또는 嘉瑟岬: 운문사 인근 소재)에 ‘점찰보(占察寶)’를 설치하여 사찰 운영의 경제적 조직체를 마련하고, 참회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는 실천불교를 전개하였는데, 삼계교의 영향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특히 점찰법은 안홍사의 지혜로 이어져서 경주의 서쪽에 있는 선도산 성모신앙과 연결되어 매년 봄·가을 남녀 신도를 모아 널리 일체 중생을 위한 점찰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 다음 계율종은 선덕여왕대(632~ 647) 자장에 의해 전래되었다. 자장은 638년 문인인 승실 등 10여명을 거느리고 당에 유학하여 종남산 운제사의 동쪽 절벽 위에 거처하면서 3년간 수행하였는데, 이때 아침저녁으로 사람과 귀신들이 계를 받으러 모여 들었다는 ‘속고승전’ 자장전의 설화는 계율종의 개조 도선(596~667)이 천사(天使)의 공양을 받았다는 설화를 연상케 한다. 도선은 624년부터 종남산에 머물면서 강설과 저술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지엄과 함께 의상이 도선과 교류하였음은 물론이고, 자장과도 교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선은 ‘속고승전’ 호법편에 자장전을 편입하면서 자장을 평하기를 “호법보살이란 바로 이 사람을 말함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자장은 643년 귀국한 뒤에 계율과 교단을 정비하는 한편 ‘섭대승론’과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는데, 의상이 그 강의를 직접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로써 의상은 도당유학을 떠나기 이전에 신라에서 이미 전해져온 지론종·삼계교·계율종 등 구역불교를 수업하였고, 현장에 의한 신역불교의 소식을 듣고 661년 도당유학을 결행하였다. 그런데 장안에 도착한 다음에는 현장을 제쳐두고,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을 찾아 화엄종을 전수하여 왔다. 지론종의 화엄학 연구를 계승하는 한편 동시에 삼계교·계율종·정토교 등의 영향을 받은 지엄의 불교에 좀더 가까운 친밀감을 느꼈던 결과로 보인다. 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수업할 당시에 지엄 자신은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으며, 아직 명성을 크게 날리거나 영향력을 갖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엄교학이 웅대한 사상체계로 집대성되는 것은 제자인 법장을 기다려야 했고, 화엄종도 아직 주류 종단으로 발전하기 이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상은 지엄의 화엄종을 오로지 전수하여 신라 화엄종을 창립한 것은 의상의 수학 과정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의상이 지엄으로부터 화엄종을 전수하여 온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고, 신라와 당 불교계가 공유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78호 / 2023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