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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을 축하합니다

기자명 하림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23.05.01 16:02
  • 수정 2023.05.01 16:04
  • 호수 1679
  • 댓글 0

25주년 된 미타선원 곳곳에는
감사하고 소중한 추억들 가득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이들
소중함 되새기며 정성 다할 것

야간 명상수업이 진행되는 중이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한 불자님이 작은 상자를 들고 오더니 조심스럽게 내밉니다. 그러더니 “스님! 이건 케이크입니다” 하면서 주고 가는 겁니다. 한참 가다가 뒤돌아보더니 부끄러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스님! 사실은 제가 오늘 생일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서둘러 걸음을 옮깁니다. 저도 불자님의 뒷모습에 대고 급해도 정성을 가득 담아서 힘주어 말했습니다. “생일 축하해요. 고마워요.”

방으로 들어와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빨간 과일이 포인트를 주는 아주 작은 케이크였습니다. 소중한 분들과 저녁공양을 하시려다가 매주 진행되는 명상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과감하게 그 자리를 뒤로한 채 공부를 하러 오신 길인 것 같았습니다. 공부를 향한 불자님의 결단과 욕심을 극복하는 힘이 저보다 훨씬 강하신 모습에 그저 대견하고 정말 훌륭해 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생일’이라는 말이 맴돌았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오늘이 나의 생일”이라고 하면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가슴에서 우러납니다. 이 세상에 온 그를 기꺼이 환영하는 마음입니다. 또 오랜 세월 삶의 고비들을 얼마나 많이 건너고 넘어왔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 축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드릴만한 선물은 없지만 오로지 그분만의 특별한 날이기에 더 귀한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미타선원의 25주년 생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법당부터 도량을 찬찬히 둘러봅니다. 미타선원과 인연이 닿은지 18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이곳저곳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어느 한 곳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기억이 함께 숨어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기쁨과 감동을 마주합니다. 

법당 뒤에는 용두산과 이어지는 자그마한 숲이 있습니다. 미타선원이 부산 중구 광복동의 시내 한복판에 있다 보니 숲을 가까이하고 싶어서 특별히 공을 들이고 애정을 쏟아 마련한 공간입니다. 공을 들이고 숲을 가꾸면서 언젠가부터 이 작은 숲은 제게 가장 소중한 곳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선원의 앞쪽이 건물들과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면 뒤쪽은 새소리와 나무와 꽃들이 있는 세상입니다. 바로 그 중간에 이 숲이 있습니다. 세상과 자연 그리고 일과 휴식의 중간에서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합니다. 

3층에 자리한 설법전과 선방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참선 공부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일주문이 없는 도량 입구에는 명상센터가 있습니다. 그곳도 마음의 휴식처이자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수행처입니다. 매일 아침이면 선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명상센터의 문을 열고 앉아서 차 한 잔을 하며 혼자 공부합니다. 그 시간이 제게는 무척 행복합니다. 이곳에는 차가 있고 음악이 있고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저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보다 좋은 아침의 선물은 없습니다. 아마도 오랜 시간 저를 도심 속 도량에서 버티게 해 준 것도 바로 이 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돌아보니 소중하고 감사한 인연이 늘 함께했습니다. 신도님들은 오래도록 지켜보고 계시다가 제가 다른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듯하면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불쑥 선물을 내밉니다. “스님, 힘내세요.” 사랑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담깁니다. 어찌 아시나 싶은데 신도님들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제게는 가족임을 발견합니다. 옳고, 그르고, 잘하고, 못하고는 그 순간이 지나면 아무 기억도 남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정’입니다. 식구끼리는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기억은 바람처럼 지나갈 뿐입니다. 함께 겪으면서 나눠온 그 마음만이 서로의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가족들과 여생을 함께하겠습니다. 오래전 먼 인연이 아니라 함께 해온 인연들이 소중함을 한 번 더 느끼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중을 살피신 것처럼, 저도 그들을 살피며 살겠습니다.

하림 스님 부산 미타선원장 whyharim@hanmail.net

[1679호 / 2023년 5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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