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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53)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9)

대외 접촉 줄이고 수행과 제자 양성 주력했던 지엄 가풍 충실히 계승

지엄은 지론종 남도파 혜광의 화엄경소 접한 뒤 일승진의 체득
의상은 지엄 문하 7년째에 일승법계도 지어 마침내 인가 받아
입적 직전까지 제자 이끄는 지엄의 자세 귀국 후에 그대로 답습  

‘고려대장경’ 보유판 권45에 수록된 반시.
‘고려대장경’ 보유판 권45에 수록된 반시.

5회에 걸쳐 의상(625~702)이 15세 즈음 출가해 22년 동안 지론종·섭론종·삼계교·계율종 등 신라에 전해진 여러 학파의 불교를 두루 섭렵했으며, 그러한 수학경험이 남북조 이래의 구역불교를 섭렵하고 종합하면서, ‘화엄경’을 소의로 하는 화엄종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던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602~668)을 찾게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지엄의 문하에서 수업하는 7년 동안 화엄종뿐만 아니라 지론종·계율종·삼계교 등 수·당대 여러 학파나 종파의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임도 유추하였다. 그러나 의상이 스승으로 받들고 그 불교를 전수하기 위해 혼신을 기울인 인물은 역시 지엄이었다. 또한 종남산의 여러 종파 승려들과의 교류도 지엄의 영향과 지도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엄 자신이 지상사에서 지론종의 지정(559~639)으로부터 ‘화엄경’을 직접 배운 바 있었고, 계율종의 도선(596~667)을 찾을 때는 의상과 함께였으며, 삼계교의 신행(540~594)이 다른 종파나 학파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을 때 지엄만은 예외적으로 은근히 변호하면서 그 사상을 수용하고 있었던 사실 등이 그러한 사정을 뒷받침해 준다.  

지엄은 12세에 두순(557~640)의 문하에 들어가 달(達)법사에게 맡겨졌는데, 도선의 ‘속고승전’ 두순전에는 두순이 교조의 자질을 갖추었고, 지엄과 사제관계였다고 언급하면서 당시 생존해 있던 지엄의 전기를 두순전에 부쳐서 입전하였다. 그리고 법장의 ‘화엄경전기’에서는 두순과 지엄을 부자관계로 묘사하였다. 지엄은 수나라 말기인 615년에 승려가 되었고, 이후 보광사(普光寺)의 법상(法常)·변(辨)법사·임(琳)법사·지상사의 지정 등으로부터 배웠는데, 특히 법상에게는 ‘섭대승론’, 지정에게는 ‘화엄경’의 강의를 들었으며, 2인의 범승(梵僧)으로부터 범문을 배웠다. 지엄이 화엄사상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정으로부터 강의를 들은 뒤 지론종 남도파의 초조인 혜광(慧光)의 ‘화엄경소’를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지엄은 이 책을 통해서 ‘별교일승(別敎一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이해하고, 다시 한 이승(異僧)으로부터 ‘육상(六相)’의 의미를 배워서 일승의 진의를 깨닫고 ‘화엄경수현기’ 5권을 찬술함으로서 일가를 이루었다. 이때가 628년으로 지엄의 나이 27세였다. 이로써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하나의 종파를 거느리는 입장이 되었는데, 현장의 신역불교를 계승한 유식학의 법상종에 대해서는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대사회적 교화활동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엄은 말년에 가까운 659년을 전후하여 종남산 지상사에서 장안의 운화사(雲華寺), 그리고 다시 청정사(淸淨寺)로 옮겨 주석하여 ‘지상대사(至相大師)’라는 칭호와 함께 ‘운화존자(雲華尊者)’로 불리기도 하지만, 눈에 띄는 대외 접촉으로는 운화사 시대에 패왕(沛王) 현(賢)의 강주가 되었던 사례뿐이었다. 그리고 수행과 제자들 양성에만 주력함으로써 그를 계승하여 화엄종을 대성하는 법장(643~712)과 함께 신라의 화엄종을 개창하는 의상을 배출하게 되었다. 지엄의 이러한 불교 학풍과 사회의식은 의상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신라 화엄종의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엄의 불교를 충실히 계승한 의상과는 다르게 법장은 현장 계통의 유식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과 유식학을 통합하는 방대한 화엄학의 사상체계를 수립하는 한편 측천무후를 비롯한 정치권력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대사회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스승과는 상당히 다른 불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법성게를 담았던 법계도인.
법성게를 담았던 법계도인.

의상이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 지엄을 처음 만난 것은 당에 건너간 다음 해(662)였다. 최치원이 찬술한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에서 “용삭(龍朔) 2년(662) 종남산 지상사에 나아가서 지엄화상을 엄사(嚴師)로 삼고 법장화상을 익우(益友)로 삼았다”고 서술한 것을 보아 의상은 장안에 도착하여 1년간 수학할 곳을 모색하였던 것 같다. 마침내 장안 불교계를 주도하던 현장의 문하를 찾으려던 출발 전의 계획을 바꾸어 아직 명성을 크게 떨치지 못하던 지상사의 지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의상이 지엄을 처음 대면하여 입실을 허락받아 사제의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는 장면은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 설화로 전해주고 있는데, 앞에서 인용한 바 있다. 그리고 종남산에서의 7년 남짓한 기간 의상이 지엄으로부터 화엄학을 열심히 수학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최치원의 ‘기신원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수업함에는 마치 동이의 물을 뒤집어 아래로 쏟는 듯하였고, 종취를 전함에는 비탈길에서 아래로 공이 구르는 듯하였다. 막힌 것은 반드시 통하게 하였고, 아무리 깊은 것이라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없었으니, 곧 ‘화엄경(백천게)’을 깨닫는 데 있어 능히 하루에 30부(夫)의 몫을 해냄으로써 도끼자루를 잡고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이미 베었으며, (모든 시냇물이) 바다를 배워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듯하였다.”         

의상은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을 수학한 지 7년째 되는 668년 44세의 나이로 ‘화엄경’과 ‘십지론’ 등에 의거하여 반시(槃詩) 형태로 ‘일승법계도’를 지어 마침내 지엄의 인가를 받게 되었다. ‘일승법계도’의 저술은 스승 지엄의 엄격한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 지엄의 저술로서는 ‘화엄경’을 주석하여 화엄학승으로서 일가를 이루게 한 ‘수현기’를 비롯하여 화엄종의 육상론을 간명하게 정리한 ‘육상장’, 화엄교학을 53개의 문답 형식으로 풀이한 ‘오십요문답’, 화엄의 뜻을 144개의 문항으로 설명한 ‘공목장’ 등이 ‘일승법계도’ 찬술에 참고되었을 것이다. 특히 ‘법계도총수록’에 수록된 ‘법융기’에서 “지엄이 73인(印)을 짓고 1인(印)을 짓고자 하니, 의상이 지엄의 듯을 알고 하나의 근본인을 만들었다”고 서술한 것은 지엄의 영향을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의상이 지엄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엄학의 정수를 ‘일승법계도’로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균여가 ‘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최치원의 ‘부석존자전’을 인용하여 흥미로운 설화로 전해주고 있다. “의상이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을 배우고 있을 때 매우 크고 훌륭한 모습을 한 신인이 나타나 의상에게 ‘스스로 깨달은 바를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고 권유하는 꿈을 꾸었다. 또 선재동자가 총명해지는 약 10여제를 주는 꿈과 푸른 옷을 입은 동자를 만나 세 차례 비결을 받는 꿈을 꾸었다. 지엄이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신인으로부터 신령스러운 선물을 받은 것이 나는 한 차례였는데, 너는 세 차례구나. 멀리 바다를 건너와 부지런히 수행하니 그 보답이 이같이 나타난 것이다’고 하면서, 그동안 공부하여 깨달은 바를 글로 짓게 하였다. 이에 곧바로 붓을 잡고 ‘대승장(大乘章)’ 10권을 엮은 후 지엄에게 잘못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다. 지엄은 ‘뜻은 매우 아름답지만 문장이 조금 옹색하다’고 하였다. 이에 의상은 번잡한 내용을 빼고 4통을 만들어 ‘입의숭현(立義崇玄)’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개 지엄이 지은 ‘수현기’의 뜻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지엄은 곧 의상과 함께 부처님 앞에 나아가 서원을 올리고 불사르면서, ‘이 책의 말이 성스러운 뜻에 부합하는 것이 있으면 타지 않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얼마 지나서 잿더미 가운데에서 210글자를 얻을 수 있었는데, 지엄은 의상에게 그것을 주워 모으게 한 뒤 다시 간절히 서원하면서 활활 타는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끝내 그 글자들이 타지 않자 지엄은 눈물을 머금으면서 찬탄하고 그 글자들을 모아서 게송을 짓도록 하였다. 의상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여러 날을 새운 뒤 30구(句)를 완성하였는데, 3관(觀)의 깊은 뜻을 모두 담았고, 10현(玄)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모두 드러내었다.” 이상 장황하게 찬술에 얽힌 설화를 인용한 것은 지엄의 엄격한 지도하에 의상이 화엄학을 공부한 성과의 결정체로서 ‘일승법계도’가 찬술되는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체원이 1328년 주석한 ‘백화도량발원문약해’에서는 최치원의 ‘부석존자전’에 인용된 ‘일승법계도’의 찬술설화를 이어 남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즉 의상이 ‘법계도’를 지어 바쳤더니 지엄이 보고는 ‘법성(法性)을 궁극적으로 증득하고 부처님의 뜻을 통달하였다’고 찬탄하면서 그에 대한 해석을 서술하라고 권하였다. 의상이 해석을 지어 합해서 한 권으로 만든 것이 지금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일승법계도’라는 것이다. 이로써 ‘일승법계도’는 ‘반시(槃詩)’와 ‘법계도기(法界圖記)’로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백화도량발원문약해’에서는 의상은 지엄으로부터 의지(義持)라는 호를 받았고, 의상과 동문수학한 법장은 문지(文持)라는 호를 받았다고 전하는데, 의상은 의리에 밝았던 반면 법장은 글에 재주가 뛰어났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풀어서 말하면 의상은 화엄의 근본정신을 체득한 화엄행자로서의 실천과 제자들의 교육을 중시하였던 반면 법장은 화엄교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의 면모와 사회적 역할이 두드러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칭호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일승법계도기’ 발문에는 의상이 ‘일승법계도’를 지어 지엄의 인가를 받은 시기가 “총장(總章) 원년(668) 7월15일”이라고 연월일까지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지엄이 입적하기 약 3개월 전으로 그해 10월29일 67세를 일기로 청정(선)사 반야원에서 입적하였다. 그런데 의상은 ‘일승법계도’를 지은 이후에도 스승이 돌아가기 직전까지 화엄학의 의리를 질문하여 깨치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법계도기총수록’에 의하면, 지엄이 입적하기 불과 18일 전인 10월11일에 청정(선)사 반야원에서 의상이 보법(普法)의 궤칙(軌則)을 수지한다는 의미를 물으니, 지엄은 십중의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으로 설명하여 의문을 풀어주었으며, 또 지엄이 돌아가기 10일 전에는 지엄이 연기의 무자성(無自性)을 학도들과의 문답을 통하여 깨우쳐주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이렇게 의상은 지엄의 입적 순간까지 문답을 통해 화엄의 이치를 철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생애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이끄는 지엄의 진지한 자세와 문답을 통한 전수 방법은 귀국하여 제자들을 지도할 때 그대로 답습되고 있었다.

한편 의상의 ‘일승법계도’는 한국 불교사상의 주류인 화엄종의 핵심적인 저술로서 신라-고려-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지속적으로 조술되고 주석이 행해졌는데, 한국 화엄종의 역사는 곧 ‘일승법계도’ 주석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신라시대의 주석들을 모은 편자 미상의 ‘법계도기총수록’, 고려 균여(923~973)의 ‘일승법계도원통기’, 조선 설잠(1425~1493)의 ‘대화엄일승법계도주’와 유문(18세기)의 ‘법성게과주’ 등이 현존하는 주석서들이다. 

그런데 ‘일승법계도’의 발문에서는 찬술의 연월일만 명기하고, 저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에 저자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일어났다. 일찍이 고려의 균여는 958년 ‘일승법계도’를 주석하면서 7언30구의 반시는 지엄이 지은 것이고, 해석부분은 의상이 서술한 것이라고 기록한 ‘원상록(元常錄)’의 주장을 비판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중국 ‘방산석경’에 새겨진(1118~1196)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의 발견을 계기로 하여 저자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중국학자 야오찬쇼(姚長壽)가 이 석경판을 근거로 하여 1996년 ‘법성게’를 포함한 ‘일승법계도합시일인’과 ‘서문’까지도 지엄이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저자 논란에 호주의 존 조르겐센(John Jorgensen)과 일본의 사토 아츠시(佐藤 厚) 등이 참여함으로써 한때 국제적인 논쟁으로 발전하는 듯하였으나, 해주 스님이 1999년 명쾌하게 논파한 바와 같이 ‘일승법계도’의 저자 논란은 더 이상 무의미한 것으로 판단된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80호 / 2023년 5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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