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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속 순수서 相生을 만난다

기자명 법보신문
사진 작가 정동석

정동석은 주변의 흔한 자연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그가 찍은 풍경은 기존의 ‘그림 같은’ 사진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 그가 찍은 자연풍경은 흔하게 접하는 풀밭, 묵은 논과 밭, 물가들이다.

<사진설명>정동석 사진작가의 사진은 객관적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풍경사진 속에는 연기의 시각에서 잡아 낸 상생의 조용한 외침이 스며 있다.

“선입견 버리고 있는 그대로…”

삶의 주변에 늘상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풍경이다. 무성히 자라난 잡초와 들꽃이 있는 대지와 바다와 인접한 개펄과 강이 있다. 그곳은 버려진 땅, 제초제가 뿌려진 불모의 공간, 인간의 욕망이 깃든 황폐화 된 장소인데 그런 곳에서도 악착스레 생명을 이어가고 서로 서로 어울려 공존하는 풀의 모습이 사진 속에 들어와 박혀있다. 농작물이 있어야 할 곳에 다른 것들이 그렇게 공생, 상생하고 있다. 도라지 밭에는 도라지와 망초가 함께 섞여서 살고 있다. 시화호 풍경에는 바다의 소금기가 빠지면서 뭍 것이 들어오는, 갯 것과 뭍 것이 그렇게 공존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가하면 남한강으로 들어가는 지류를 촬영한 사진에는 주변 골프장 공사로 인해 생겨난 흙탕물이 맑은 물과 만나서 함께 흐르는 장면이 담겨있다. 그는 그 같은 자연 풍경 안에서 평등사상, 한 사상, 큰 통일사상 같은 것이 스며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자연만을 그토록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느끼고 깨달은 것- 인생이나 세계, 우주에 관해서- 들을 가감없이 고스란히 보여주겠다는 의지 같기도 한데 이는 마치 동양의 문인화가들이 오로지 산수나 사군자만을 평생을 걸쳐 반복해서 그려내던 그 수행과 오버랩된다. 그들이 평생을 반복해서 그린 산수나 사군자가 기실 단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정동석 역시 들판, 땅, 산과 물을 그토록 많이 찍고 매번 찍지만 단 하나도 똑같은 것은 없다.

결국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실 지나치게 단순하고 명료하다.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어떠한 선입견이나 관념이나 드라마를 씌우지 말고 투명하고 깨끗한 본래의 시선으로 쳐다보라는 것 같다. 뜻을 얻는 순간에 말은 우리의 감각과 인식의 범위밖에 놓인다.

그의 사진에서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작품에 붙은 제목이다. 제목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그 문구에는 오로지 풍경을 찍었던 연도와 달만이 적혀있다. 분명 일종의 풍경사진이지만 그 풍경사진에는 어떠한 풍경적 단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곳이 어느 곳이고 어떠한 풍경이라는 관념에 기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지명이나 장소가 무시되고 그저 물, 산, 땅 이런 식이다. ‘景-甲戌, 2月’등으로 적혀있을 뿐이다. 그 해, 그 시간에 자신이 본 자연의 한 모습이다. 그것이 땅이나 산, 물 등이지만 특정한 시간 속에서 바라본 대상만이 강조되고 있다.

인간의 반목·아둔함 경고

여기서 모든 대상, 외물은 평등하다. 사진이 기록하는 것은 대상이라기보다는 결국 시간인 셈이다. 또한 ‘景’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풍경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경’이라든가 동양적 시간관에 기댄 제목 등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동양적인 시간관, 공간관에 입각해서 자연을 보고자 하는 의도적인 응시이다. 그저 시간과 계절의 변화 속에서 수시로 변하는 자연의 한 단면이 침묵 속에 서늘하게,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자연을 고정시킬 수 없기에 특정한 역사성, 단 한번의 그때에 드러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무성하게 우거진 잡풀과 그 언저리 어디선가 겅중거리며 피어난 들꽃만이 가득한 소박한 풍경이다. 자기네들끼리 어울려 한 세상 살다가는 모습 같기도 하다. 저 식물성의 세계가 우리네 인간 세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도 같고 더러 이 속세의 아둔한 인간들이 깨달아야할 겸손과 조화, 상생(相生)의 이치를 넌지시 들려주는 것도 같다.

그가 찍은 풍경에는 사람의 자취가 하나도 없다. 오로지 자연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그 어딘가에 인간의 삶이 관통한 자취,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때가 은연중 스며든 풍경이라는 얘기다. 인간의 손길로 제초제가 뿌려져 죽어 가는 들판에 악착스레 무성히 자라는 들풀이나 잡초, 그 언저리 어디선가 부지런히 자라 올라오는 들꽃이나 억새들, 오염되고 썩어 가는 물이 돌멩이에 선연한 때 자국을 남긴 모습 등이 그렇다. 그런 자국, 상처와 흔적들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가는 눈을 지긋이, 가늘게 만들어 자연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스며들어가고 그런 경과 속에서도 자연이 어떻게 스스로를 치유해가면서 서로가 상생하는 지를 바라보고 깨달아 이를 은밀히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마도 작가는 저 자연만큼도 못한 우리네 인간들의 질시와 반목과 아둔함을 슬쩍 건드리는 것도 같다.

정동석은 결국 공간을 보여준다. 인간을 둘러싼 삶의 공간이다. 공간(空間)이란 ‘공’의 ‘사이’를 말한다. 옛말에 의하면 우주만물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일체의 모든 것이 태극 공의 상태가 된다고 했다. 즉 “물이 물이 아니고 산이 산이 아니며 공이다.”라는 개념이 생긴다. 이렇듯 태극 공의 세계는 평등한 세계이며 때문에 공간만이 존재하는 상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는 세상이다.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연기적 시각 뚜렷해

옛 선가어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이 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눈이 열리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진리는 동어반복인 것이다. 또한 선의 참다운 목표는 보잘것없는 일상적 삶을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의 자리인 무위자연으로 되돌아오는 것이고 진리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가 되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드라마라든가 쓸데없는 관념을, 지나친 이야기 없는 자연을 담담히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과장하지 않고 찍는 다는 사실, 그저 그렇게 있는 자연은, 그냥 땅, 산, 물일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흡사 산수화를 그린 태도와 유사하다. 아무 욕심도 없이 대상을 보지만 그렇다고 관심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상태를 찍고 있다. 바로 욕심과 관심의 딱 중간이거나 그 너머에 있는 시선이다.
<사진설명>작품 '물'

미술평론·경기대교수


<사진설명>작품 '바다'


<사진설명>작품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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