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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천왕사 주지 일로 스님

연민심 키워 자비심 발현하고 사랑이 넘치면 정토입니다 

‘사랑’은 인생을 축복으로 장식하고 부처가 되는 지름길
진흙 속에서 연꽃 피듯 고통은 세상 아름답게 만들 요소
시시비비에 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길

일로 스님은 “모두가 축복 받고 태어난 인생이니 그 인생을 축복으로 장식하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일로 스님은 “모두가 축복 받고 태어난 인생이니 그 인생을 축복으로 장식하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나무는 별에 닿고자 하는 대지의 꿈이다.” 반 고흐가 했다는 이 말을 오래전 들었을 때는 그리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렇구나! 나무의 꿈은 위로 올라가 별나라를 보고 싶은 것이어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한껏 위로 자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무는 이처럼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된 생각을 갖고 꿈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도 그러할 진데, 우리도 이 세상에 나왔으니 주인공으로 살다가 주인공으로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공은 무대의 중심에 서고, 나는 인생의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 이 세상에서의 삶을 값지게 잘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무엇을 하던지, 그 개개인의 행동은 바로 그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할 때 그것이 재미있어서 하든,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하든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하다 보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합니다. 또한 각자의 생각에 따라 같은 일을 하더라도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놓고 각자 다른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삼은 쓴 맛이 강하고, 꿀은 달콤한 맛이 강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면 됩니다. 불이 뜨거운 것은 불이기 때문이고, 물에 젖는 것은 그것이 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불은 불로 보고, 물은 물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축복을 받으면서 태어났으니, 축복을 받으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축복을 받고 태어난 여러분 모두가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큰 축복입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고 인생을 시작했으니, 그 인생을 축복으로 장식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축복 받아 태어난 인생을 축복으로 장식하고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연민심을 키우고 자비심을 발현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운 불자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불행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고통과 사랑이라는 것은 지구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쌍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찼는데, 그것이 또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모습은 보기에도 힘들지만 고통과 고뇌 속에서 사람은 조금 더 인간다워지고,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사랑도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대로 축복인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인데 무엇을 그리 걱정하고 사십니까. 어머니가 자식에게 만큼은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또 주어도 자꾸만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자기 새끼가 위험에 처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위협을 가하는 상대에게 무조건 달려들어 새끼를 구하려고 합니다. 그처럼 진정한 사랑은 조건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 2012년 여름 어느 날, 우리 천왕사 원주보살님이 갑자기 큰 소리로 불러서 나가보니 담장과 은행나무 사이에서 새끼 까치가 울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온몸이 가느다란 철사로 감겨있었습니다. 이 새끼 까치는 철사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다보니 몸의 털은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상처가 생긴 지도 오래되어 상처에 구더기가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원주보살님은 철사를 조심스럽게 제거하고 상처를 파고드는 구더기들을 일일이 떼어내면서 제게 소독약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얼떨결에 소독약을 찾아 건넸더니 보살님은 새끼 까치에게 약을 발라주고 어린아이들이 먹는 소염제 시럽을 숟가락에 따라 먹였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새끼 까치는 그 약을 받아먹고, 주위를 맴돌던 어미도 조용히 그 광경을 보고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치료를 끝낸 보살님이 까치를 화단에 조심스레 내려놓았습니다. 보살님은 그 후로 매일같이 약을 발라주고 먹이와 물을 주었습니다. 더욱 신기한 일은 가끔 새끼 까치가 보이지 않을 때 보살님이 “약 바르고 밥 먹어야 하는데 어딜 갔나”하고 혼잣말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난 새끼 까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호를 받은 새끼 까치는 치료가 끝나고 어미를 따라 날 수 있게 됐습니다.

원주보살님을 따르는 새끼 까치를 보면서 말을 못하는 날짐승도 자기를 구해준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주보살님이 어려움에 처한 날짐승에 대한 연민심이 생겨나 자비심을 발현한 것이었고, 말 못하는 새끼 까치는 그 원주보살님의 손길에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 못하는 날짐승에게도 이렇게 하는데 어찌 어려운 사람을 보고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비심을 냈을 때 그 자비심을 느낀 상대방은 감사함을 느끼고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늘 무엇인가를 바라는 우리에게 항상 베풀어주시는 불보살님의 자비는 또 얼마나 큰 것이겠는가 말입니다.

노자(老子)는 “오색(五色)은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五音)은 귀를 먹게 하고, 오미(五味)는 입을 상하게 한다”고 했는데, 실제 일상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화려한 색깔은 이리보고 저리 보다가 시각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또한 TV에서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다보면 청각이 요동을 쳐서 소리 분간을 하기 어려운 때가 있고, 요리를 주제로 하는 방송이 많아지면서 어떤 음식이 진짜 맛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지경입니다.

쇼팬하우어가 “인생은 욕망과 불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다”고 한 것처럼 인간이 갖는 욕망의 바다는 메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비롯한 많은 성현들은 욕망의 바다를 메우려 하지 말고, 가진 것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베풀 것을 당부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를 말합니다. 아무런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고, 보통의 부모님들은 “남에게 신세지지 말고 베푸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이렇듯 옛 성현이든 보통의 부모님들이든 대다수가 좋은 말을 하지만 세상은 그런 말과는 다르게, 반대로 돌아가는 상황이 적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불안과 초조함으로 고통 속에 사는 사람도 결국은 그 삶의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사는 동안 연민심을 키우고 자비심을 실현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은 바로 정토가 될 것입니다.

나무 위에 지은 까치집은 태풍이 불고 천둥번개가 치면 허물어지지만, 까치는 다시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도 사랑이 있고,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그렇게 사랑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사랑으로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고, 또 사랑으로 살다가 떠나가는데 어찌 우리가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십이장경’에서 부처님은 “사람이 도를 닦는 것은 쇠를 단련하는 것과 같아서 불에 녹이고 망치로 때려서 그 잡철을 다 빼어 버린 후에야 비로소 좋은 그릇을 이루는 것이니, 사람이 도를 배울 때에도 점점 그 마음 가운데 때를 제거하면 행실이 곧 청정하여 스스로 불과를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자동차 사고가 나 찌그러지고 움푹 들어간 곳이 있으면 불로 그 주변을 가열하고 망치로 두들겨서 찌그러진 것을 펴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불로 가열하지 않고 두들기면 더 찌그러져서 펴지지 않으니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대장간에서 칼을 만들 때도 풀무질을 해서 망치로 시뻘건 쇠를 두드려 날카로운 칼을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찌그러진 생 양철을 그대로 두드려서 펴려고만 하지, 불을 가열하여 두드릴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푹 익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몇 차례 말씀드렸듯이 나와 남에 대한 연민심을 갖고, 자비심을 발현해서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불을 가열해 쇠를 부드럽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 모두 일상생활에서 시시비비에 얽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이진호 시인의 ‘사랑’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번 이렇게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열 주고
다섯을 받았다
더 주고 싶다

정리=강태희 충청지사장

이 법문은 천안 천왕사 주지 일로 스님이 4월20일 초하루 법회에서 5월 가정의 달을 앞두고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1680호 / 2023년 5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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