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교의 힌두교에 대한 오해 두 가지

기자명 법보
  • 기고
  • 입력 2023.05.15 19:59
  • 호수 1682
  • 댓글 15

[기고]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불교는 역사상 최초의 보편적 종교로 인류에 자리매김
힌두교는 불교와 경쟁 관계 속에서 소 숭배의식 발생
아트만은 독립적 실체로서 자아 아닌 개념 초월한 자리

‘비건채식으로 지구를 살립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2023 세계 비건채식 기후 행진’을 하고 있는 국내 200만명으로 추산되는 비건채식인들. [한국채식문화원 제공]
‘비건채식으로 지구를 살립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2023 세계 비건채식 기후 행진’을 하고 있는 국내 200만명으로 추산되는 비건채식인들. [한국채식문화원 제공]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가 5월14일 ‘불교의 힌두교에 대한 오해 두 가지’ 제하의 기고를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고 대표는 지구온난화 비상협의회 대표와 식생활교육 부산 네트워크 공동대표를 역임했으며, 국제 채식연합회(IVU)를 대표해 세계 NGO대회와 유엔회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편집자

칼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을 비롯하여 다수의 저명한 인류학자에게 영향을 미친 독일 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안(1826~1905)은 전 세계 신화와 종교체계에서 같은 이미지와 주제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보고 이를 ‘기초발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주제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적용과 다른 해석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이런 지역적 차이점을 ‘민족사고’라 분류했다. 문제는 왜 이런 ‘기초발상’이 전 세계 곳곳에 퍼져있느냐는 것이다. 지리적 환경에 따라 그 형식만을 달리할 뿐 모든 민족에게는 일정한 기본적 관념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보편적인 심리적 통일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재의 기독교는 민족사고의 틀을 벗어 던져버리지 못한 채 서구사회에 널리 도입되었다. 반면 동양의 종교들에는 상대적으로 ‘기초발상’이 살아있다. 은유와 상징을 은유와 상징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는 등등 각 종교에서 해석상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도, 그만큼 종교들간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커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중 ‘기초발상’이 강조된 불교와 힌두교를 놓고 불교계의 오랜 쟁점이 되어 온 불교의 힌두교에 대한 오해 두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는 불살생과 채식이다. 유라시아 스텝지방의 쿠르간 유목민 후손들인 아리안 족이 소와 말, 무기와 그들의 신들도 함께 기원전 1975년경 인도의 지배계급으로 유입된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브라만은 쿠르간의 신들에게 소 희생 제사를 주관하고 신들의 말씀인 여러 베다를 후손에게 전수했다. 쿠르간 전사의 주요 책임은 전쟁하고 소를 빼앗는 것이었고 제사 때 쇠고기를 넉넉히 나눔으로써 원주민들의 충성과 선의를 얻을 수 있었다. 베다에 의하면 전쟁은 산스크리트어로 ‘소에 대한 욕망’이고 전쟁군주는 ‘소의 군주’를 뜻한다. 기원전 7세기 이후 사제와 전사들은 자신들의 왕성한 식욕을 만족시키며 통치받는 지역민들 달래기에 충분한 쇠고기 공급이 힘들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과도한 육식문화로 인해 산림이 헐벗고 토지는 침식되어 고갈 위기에 이른 것이다. 목초지 대부분은 집약농업으로 전환되고 인구증가와 함께 경작지도 줄고 식량이 극심하게 부족해도 농부들은 소를 끼니로 먹어치울 만한 여유가 없었다. 가난한 이들은 생존과 기아 사이에서 허덕이면서 주기적인 홍수와 가뭄에 희생당했지만 사제와 베다 지도자들은 농부들의 소를 압수해 그 쇠고기로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 농부들의 굶주림과 원성은 극에 달했고, 그런 상황에서 탄생한 불교는 민중들의 고통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다. 불교는 소 희생 제사와 도살은 물론 살생을 금했으며 명상과 깨달음, 자발적 빈곤을 강조했고 민중들의 곤경을 기탄없이 대변했다. 수많은 민중들이 불교에 귀의했고 당연히 브라만과의 직접적 마찰도 피할 수 없었다.

무려 900년에 걸쳐 인도에서 불교와 브라만교도들은 각축전을 벌였다. 결국에는 힌두교가 우세해졌지만, 그 이전에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불교의 가르침을 끌어들여야 했다. 동물희생 제사를 금했고 새로운 아힘사 가르침은 비폭력과 생명의 신성함을 옹호했다. 나아가 소를 도살하는 자가 아닌 소의 보호자로 설정하여 소 숭배의식을 부추겼다. 덧붙여 리그베다의 동물희생 제사는 은유나 상징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19세기 말 위대한 산스크리트 학자였던 라잔드라 미트라는 ‘브라만들은 불교와 맞서 싸워야 했을 때 불교의 동물의 생명에 대한 경외가 무너뜨리기에 너무 강력하고 대중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점차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이를 받아들여 이것이 마치 그들 가르침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고 썼다.

둘째, 불교의 무아와 아트만에 관한 오해이다. 불교는 힌두교가 독립된 불변의 자아를 주장한다고 하는데 아트만은 자아나 에고가 아니다. 불교에 따르면 오온이 무상하여 연기적 자아는 있지만 독립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 즉 업보만 있지 행위자는 없다는 이 무아의 가르침과 유사한 내용이 힌두교의 대표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서도 발견된다. 행위는 단자 구나 즉 세 가지 서로 다른 에너지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저절로 일어나며 행위자는 없고 구나가 행위자라는 것이다. 만약 자신을 행위자로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행위자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괴로움과 즐거움, 성공과 실패를 하나로 보며 행위에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초발상’이란 측면에서 생각해 봐라. 시간 공간 속에서 어째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또한 소위 오온이 나라는 관념을 갖고서 어떻게 내면에로의 여행이 가능하겠는가.

그럼 아트만은 무엇인가. ‘바가바드기타’에 ‘아트만이 계절마다 새 옷 갈아입듯이 낡은 몸뚱아리는 버리고 다른 새것으로 옮겨간다’란 표현 때문에 아트만이 독립적이고 불변의 자아(에고)를 의미한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이것은 표현상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 경전에서 ‘아트만은 남도 죽음도 없으며 시작도 소멸도 없고 없음이면서 있음이며 생사를 초월한 여여한 모두의 본성’임을 누누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독립적 실체로서의 자아와는 완전히 다른 불성 즉 참나에 가깝다. 불교 유식학에서 업보를 저장 경영하는 아뢰야식 가운데 무의식적 요소마저 완전히 벗겨진 청정 순수의식에 해당한다고 할까. 전구가 빛의 매개체인 것처럼 삼라만상과 소위 인도의 모든 인격신들도 이 아트만이란 순수의식과 에너지의 매개체이자 나툼일 뿐이다.

그리고 무아나 참나도 꼭 상충한다고 볼 수 없다. 참나인 아트만은 개념을 초월한 자리기에 이름하여 참나고 아트만이지 어떠한 이름도 붙을 수 없는 체험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실제 체험이 아닌 개념으로만 접근한 나머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라는 강력한 관념이자 일종의 상이 형성되어 있었을 거라 본다.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이 당시로선 얼마나 혁명적 방편이자 충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관념화된 아트만에서 비롯된 오해가 지금까지 전해져 숱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형이상학적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한 채, 실질적 체험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부처님의 지혜를 되새겨 볼 만하다.

결론적으로 똑같은 인도라는 지리적 풍토에서 발생했지만, ‘기초발상’이 살아있음에도 민족이나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한 힌두교에 비해 불교는, 물론 불교가 도입된 지역마다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최초의 보편적 종교로서 인류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단지 채식과 불살생이 힌두교의 영향이 아닌 오히려 불교가 힌두교에 끼친 선한 영향이라는 점과 흔히 불교에서 생각하듯 아트만이 시간과 공간의 장 속에서 독립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고 개념을 초월한 자리란 점을 기억한다면 최초의 보편 종교이자 ‘기초발상’이 살아있는 불교의 위상은 더욱 빛이 날 것이다.

모든 종교와 영적 전통이 공유하는 상호 의존과 연민의 원리. 문화특성·종교·신화 등 기초발상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단지 지리적 환경에 따라 그 형식만을 달리할 뿐이다. 즉 모든 것은 하나를 가리키며 그 하나는 지리적 환경에 따라 다양한 민속적 의상을 입고 있다.
모든 종교와 영적 전통이 공유하는 상호 의존과 연민의 원리. 문화특성·종교·신화 등 기초발상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단지 지리적 환경에 따라 그 형식만을 달리할 뿐이다. 즉 모든 것은 하나를 가리키며 그 하나는 지리적 환경에 따라 다양한 민속적 의상을 입고 있다.

또한 불교는 불교·기독교·유대교·조로아스터교·이슬람교·유교 등 모든 영적 전통이 공통적으로 윤리적 근간으로 삼는 황금률 즉 ‘네가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베풀라’를 동물이나 모든 생명체로 확대해서 명시한 최초의 종교이다. 육식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거의 모든 환경파괴 유형 중에서도 선도 역할을 하며 지구의 땅과 바다 숲 하늘 인간 동식물 등 생태계 전반을 황폐화할 뿐 아니라 지구상에 퍼져있는 거대한 고통과 죽음의 악순환을 지속가능한 생명과 평화의 선순환으로 바꾸는 결정적 열쇠임을 고려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과 통찰은 더욱 깊고 심오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왜냐면 무아 즉 연기법에 따른 삶이란 결국 모든 생명을 한 몸 한 생명으로 보고 살아가는 삶이며 여기서 육바라밀도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핵 펜데믹 등 인류가 어떠한 대책도 전망도 없이 무기력한 작금의 상황 속에서 그만큼 그에 따른 불자들의 각성과 불교의 역할이 더더욱 요구되고 또한 기대되는 바다.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