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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도시의 종교] 2. 부처님이 사랑한 도시

기자명 마성 스님

초기 교단 터전 라자가하…부처님 생애 후반 사왓티서 교화

초기부터 무역·상업 발달한 16국 도시 중심 전법하며 성장
농촌 기반 브라만교와 차별…강대국 마가다·꼬살라가 중심
대부분 경전 도시서 설해져…불연으로 세워진 도시도 있어

까시국 수도였던 바라나시는 초전법륜 성지다. 그러나 오늘날 대표적인 힌두교 성지가 되었다. 바라나시를 가로지는 갠지스강가에서는 매일 저녁 힌두교 기도의식이 열린다. 
까시국 수도였던 바라나시는 초전법륜 성지다. 그러나 오늘날 대표적인 힌두교 성지가 되었다. 바라나시를 가로지는 갠지스강가에서는 매일 저녁 힌두교 기도의식이 열린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룬 뒤,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처음 법륜을 굴리기 시작한 이래 불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인도의 전통 종교인 브라만교(婆羅門敎)는 주로 농촌에 탄탄한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 불교는 무역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붓다 시대의 고대 인도는 16대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2대 강국은 마가다(Magadha)와 꼬살라(Kosala)였다. 부처님은 주로 열여섯 나라의 수도와 중요한 도시를 왕래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펼쳤다. 붓다 시대의 6대 도시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 꼬살라국의 수도 사왓티(Sāvatthi, 舍衛城), 방사(Vaṃsā)국의 수도 꼬삼비(Kosambī, 憍賞彌), 까시(Kāsi)국의 수도 바라나시(Bārāṇasī, 波羅奈), 앙가(Aṅga)국의 수도 짬빠(Campā, 瞻波), 꼬살라국의 도시 사께따(Sāketa) 등이다. (DN.ii.147) 이외에 밧지(Vajjī)국의 수도 베살리(Vesālī, 毘舍離)도 불교와 인연이 깊은 도시다.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
라자가하는 부처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 고따마 싯닷타가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빔비사라(Bimbisāra) 왕은 거리에서 탁발하는 싯닷타를 보고 그를 찾아가 “당신이 목적을 이루면 라자가하를 다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싯닷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뒤, 깟사빠(Kassapa) 삼형제를 개종시킨 후 1000여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가야(Gayā)에서 걸어서 라자가하에 도착했다. 

빔비사라 왕은 붓다와 그의 제자들을 열렬히 환영했으며, 왕궁으로 초대하여 붓다와 그 제자들에게 공양을 베풀었다. 그때 빔비사라 왕은 “세존께서는 어떤 장소에 지내셔야 할까?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하며,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고, 혼자 지내기에 좋고 수행하기에 적절한 곳, 바로 그런 곳에 머물러야 할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벨루와나(Veḷuvana, 竹園)였다. 왕은 벨루와나를 승가에 기증했다.

라자가하에서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를 비롯한 250명이 불교로 개종했다. 부처님은 라자가하에서 제자들과 함께 첫 번째 안거(安居, vassa)를 보냈으며, 그해 겨울과 이듬해 여름까지 라자가하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했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세 번째, 네 번째, 일곱 번째, 열두 번째 우기 안거를 라자가하에서 보냈다. 그 후 붓다는 12년 동안 라자가하에서 가르침을 펼쳤다. 나중에 그의 본거지를 사왓티(Sāvatthi)로 옮긴 뒤에도 자주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붓다 입멸 당시에 이미 라자가하에는 열여덟 개의 큰 사원이 건립되어 있었다. 이처럼 부처님과 라자가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고 처음 교화를 펼칠 때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불교가 그처럼 빠르게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왓티(Sāvatthi, 舍衛城)
사왓띠는 당시 교통의 요충지였다. 거의 모든 길은 사왓티와 연결되어 있었다. 부처님은 사왓티에서 생애 후반기 대부분을 보냈다. 
그의 첫 방문은 아나타삔디까(Anāth apiṇḍika, 給孤獨) 장자의 초대로 이루어졌다. 그는 이 도시에서 스물다섯 번의 우기 안거를 보냈는데, 열아홉 번은 제따와나(Jetavana, 祇園精舍)에서, 여섯 번은 뿝바라마(Pubbārāma, 鹿母講堂)에서 보냈다. 또한 사왓티에는 제따와나 반대편에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이 라자까라마(Rājakārāma, 王園)라는 왕실 사원을 건립했다. 빠세나디 왕은 왕비 말리까(Mallikā, 末利) 부인의 인도로 부처님에게 귀의했다. 부처님은 성도 후 25년 동안 주로 사왓티에 머물며 교화 활동을 펼쳤다. 사왓티를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꼬삼비(Kosambī, 憍賞彌)
방사국의 수도 꼬삼비는 붓다 시대에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아난다(Ānanda, 阿難) 존자는 부처님이 열반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 중 하나가 꼬삼비라고 했다. (MA.ii.740f; DhA.i.164f) 꼬삼비는 꼬살라와 마가다로 오가는 가장 중요한 교통 거점이었다. 붓다 시대에 이미 꼬삼비에는 꾹꾸따라마(Kukkuṭārāma), 고시따라마(Ghositārāma), 빠와리까-암바와나(Pāvarika-ambavana), 바다리까라마(Badarikārāma)라는 네 개의 가람이 건립되어 있었다. 붓다는 여러 차례 꼬삼비를 방문했으며, 그때 설한 법문이 경전으로 남아 있다.

#바라나시(Bārāṇasī, 波羅奈)
바라나시는 까시국의 수도였다. 베나레스(Benares)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바라나시는 붓다의 탄생지 까삘라왓투(Kapilavatthu), 성도지 붓다가야(Budd hagayā), 열반지 꾸시나라(Kusinārā)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聖地) 가운데 하나다. 바라나시 근처 이시빠따나(Isi patana, 仙人住處)의 미가다야(Miga dāya, 鹿野苑)는 부처님께서 성도 후, 다섯 고행자(Pañcavaggiyā)에게 최초로 법을 설한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이기 때문이다.(DN.ii.141)
베나레스는 예로부터 교통로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무역과 산업 및 교육의 중심지였다. 부처님은 갠지스강이 흐르는 베나레스를 너무나 사랑해 그곳을 불국토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힌두교의 성지가 되어 버렸다. 너무나 안타깝다.

#짬빠(Campā, 瞻波)
짬빠는 앙가국의 수도였다. 붓다는 여러 차례 짬빠를 방문했다. 사리뿟따와 방기사(Vaṅgisa)도 그곳에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짬빠의 기초는 마하고빈다(Mahagovin da)가 건설했다고 한다.
짬빠는 이미 붓다 시대에 마가다국에 병합된 듯하다. 왜냐하면 “빔비사라 왕은 브라만 소나단다(Saṇadaṇḍa)에게 짬빠의 왕실 영지를 바쳤다.”(DN.i.111)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짬빠는 중요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상인들이 무역을 위해 그곳에서 수완나부미(Suvaṇṇabhūmi, 金地國, 지금의 미얀마 혹은 태국)로 여행했다고 한다. (Jā.i.539) 율장의 마하박가(Mahāvagga, 大品) 제9장은 짬빠에서 부처님이 제정한 규정이다.

#사께따(Sāketa)
사께따는 꼬살라의 도시이다. 사께따는 꼬살라의 오래된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Jā.iii.270) 그러나 법구경 주석서에서는 비사카의 아버지 다난자야(Dhanañjaya)가 빠세나디 왕의 특별한 초청으로 라자가하에서 꼬살라에 살기 위해 갔을 때, 이 도시가 세워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빠세나디 왕과 함께 사왓티로 가는 날, 다난자라는 밤에 야영을 위해 천막을 쳤다. 야영지가 꼬살라의 영토에 속하고 사왓티에서 7리그(요자나)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난자야는 그곳에 도시를 세울 수 있도록 왕으로부터 허락받았다. 그리고 그곳은 저녁(sāyaṃ)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사께따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언급은 아마도 오래된 도시 위에 다난자야가 새롭게 세운 정착지임을 의미할 것이다.(DhA.i.386) 아무튼 이 도시에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머물면서 불법을 전했다.

#베살리(Vesālī, 毘舍離)
베살리는 밧지 또는 릿차비(Liccha vis)의 수도였다. 붓다 시대 베살리는 매우 큰 도시로 번영했으며 사람들로 붐볐고 음식이 풍부했다. 베살리에는 7707개의 유원지와 같은 수의 연꽃 연못이 있었다. 그러나 한때 베살리는 심한 가뭄으로 식량 부족과 전염병 창궐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때 붓다는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의 후원으로 벨루와나에서 우기 안거 중이었다. 부처님께서 베살리를 방문할 수 있도록 베살리궁중제관의 아들인 마할리(Mahāli)가 빔비사라 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파견되었다. 결국 빔비사라 왕으로부터 승낙받아, 붓다는 50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베살리에 도착했다. 붓다는 먼저 아난다 존자에게 도시의 성벽을 돌면서 ‘보배경(Ratana-sutta)’을 암송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7일이 지나자 전염병은 사라졌다. 그때 많은 사람이 불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마성 스님 
마성 스님 

부처님은 꾸시나라(Kusinārā)로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베살리를 방문했다. 다음 날 부처님은 베살리를 떠나면서 마치 코끼리가 뒤를 돌아보듯이, 몸을 돌려 베살리를 바라보았다. (DN.ii.118) 그가 베살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베살리에서 수많은 경전을 설했다. 부처님께서 입멸 후 사리 일부가 이 도시에 안치되었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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