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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도시의 종교] 4. 한국 역사 속 도시 불교

불교 전래 당시 모든 사찰은 도심사찰에 가까운 기능 담당

도심 속 주요 성지인 숲 천경림에 불교사찰 흥륜사 건립을 제안  
산속 위치한 신라 최초 사찰 도리사로는 포교 역부족이라 판단
수도를 천도하며 새 도시 건설할 때 처음부터 왕실사찰로 설계

신라 최초 사찰 흥륜사 터에 세워진 오늘날의 흥륜사. 그러나 이 자리는 7처가람 중 한 곳인 영묘사 터라는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신라 최초 사찰 흥륜사 터에 세워진 오늘날의 흥륜사. 그러나 이 자리는 7처가람 중 한 곳인 영묘사 터라는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고구려에서 세운 첫 사찰인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가 정확히 어디에 세워졌던 것인지는 기록이 없으나 아마도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 안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중국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337~385)이 그가 존경하던 도안(道安, 312~385) 스님을 장안에 모셔 오고 나서 오중사(五重寺)를 세워 그곳에서 경전을 번역하게 했던 것을 보면 그러한 예를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는 국내성이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 체제를 구성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 만큼, 산성 안에도 절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산에 세워졌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산사처럼 멀리 떨어진 수행공간은 아니었을 것이며, 산성 안의 궁궐이나 대규모 거주시설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세워졌을 것이므로, 그 기능은 도심사찰에 가까웠을 것이다.

백제의 경우는 동진(東晉)의 마라난타 스님이 건너온 후 한산주에 절을 새로 지었다고 전하는데,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서울 서초동 우면산의 대성사(大聖寺)가 백제 초전법륜지였음이 사적에 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도심지에 가까운 야트막한 산지에 건립된 사찰이었던 셈이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오랜 기간 수도로 운영되어 온 도심지 한복판에 사찰을 세우기에는 이미 많은 시설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을 것이므로, 수도 안에 세워지더라도 약간 외곽에 조성되거나, 대성사처럼 도심에 있는 야산 등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또 한성에서 공주나 부여로 천도하면서 새로 도시를 건설하거나 정비할 때는 처음부터 왕실사찰의 공간도 고려해 도시가 설계되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사비, 즉 부여에 세워진 정림사(定林寺)를 들 수 있을 것이며, 익산의 왕궁리사지에 세워졌던 절 역시 그러한 도심사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정림사는 지금의 서울과 비교하자면 광화문 대로변의 세종문화회관 자리 즈음에 해당하는 상징적인 공간에 세워진 사찰이다. 부소산성 아래의 지금은 관북리 유적으로 알려진 백제의 궁궐 유적이 경복궁에 해당하며, 여기서 남쪽으로 궁남지로 향하는 길이 광화문 대로에 해당한다. 정림사는 그 대로변에 위치하는 것이다. 왕이 궁궐을 벗어나는 일은 흔치 않았겠지만, 말하자면 종묘에서의 제사와 같은 주요 왕실행사를 위해 드나들었던 길일 것이고, 궁남지가 조성된 것을 보면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주요 연회가 열렸던 장소였을 것이기에 왕실은 지나면서 이 정림사에 자주 들렀을 것이다.

삼국시대 도심 사찰의 예를 보여주는 부여 정림사지.
삼국시대 도심 사찰의 예를 보여주는 부여 정림사지.

한편 신라는 최초의 사찰들에 대해 흥미로운 기사들이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阿道)는 이미 고구려에 있을 때부터 그의 어머니 고도령으로부터 경주의 7처 가람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세상에 출현했던 과거 부처님들과 인연이 있는 절이 있었던 장소라는 것이다. 그 일곱 절터는 천경림(天鏡林), 삼천기(三川岐), 용궁(龍宮)의 남쪽과 북쪽, 사천(沙川)의 끝, 신유림(神遊林), 그리고 서청전(婿請田)에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나중에 각각 흥륜사(興輪寺), 영흥사(永興寺), 황룡사(皇龍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妙寺), 사천왕사(四天王寺), 그리고 담엄사(曇嚴寺)가 세워진다. 이들 중에 천경림, 신유림 등 숲 이름이 보이지만, 이 숲은 말하자면 창덕궁 후원 같은 도심 숲이었기 때문에 산지사찰과는 다르다. 다만 실제 숲을 밀어내고 사찰이 들어서야 했기 때문에 이 숲을 선점하고 있던 토착세력들의 반발이 심했다. 오래된 도시 한복판에 사찰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만큼 갈등도 있었던 셈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천경림에서 이루어진 흥륜사의 창건과 이차돈의 순교다. 

천경림은 아마도 계림처럼 신라의 성스러운 숲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토착종교에서 관리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곳에 아도 스님이 법흥왕의 딸을 치료해 주는 조건으로 절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한 것은 신라의 토착종교에 대한 도발이었던 셈이다. 사실상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 할 수 있는 선산 도리사는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 그것도 산속에 자리한 산사였지만, 아도는 본격적인 신라에서의 포교를 위해 산사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신라의 전통적인 성지로 관리되던 천경림에 바로 사찰을 세움으로써 신라사회에 더 깊숙이 들어가려고 했다. 당연히 토착종교집단의 반발이 심했을 것이고, 법흥왕에게도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겠지만, 이차돈의 순교로 결국 흥륜사가 완공되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흥륜사는 현재 경주공업고등학교로 추정되고 있는데, 궁궐인 월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진흥왕에 의해 경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사찰 황룡사의 터.
진흥왕에 의해 경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사찰 황룡사의 터.

황룡사가 창건될 당시 공사 현장에서 황룡이 날아갔다는 것도 인근 토착종교 성지인 용궁과 연관된 갈등을 신화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 칠처가람에 세워진 다른 사찰들도 월성에 인접한 도심사찰들이었기 때문에 각각 마찰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통종교의 성지들을 하나하나 접수해 나가는 아도 스님 이후 교단의 활동은 그야말로 공격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렇듯 아도스님이 공격적으로 도심의 주요 성지를 집중적으로 공략한 것은 그만큼 신라에 불교가 자리 잡는데 이러한 도심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그 과정이 순탄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갈등이 있었으나 기록되지 않았던 것인지, 또는 토착종교집단이 신라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정황들을 보면 신라의 토착종교집단이 왕권 외의 토착정치집단과 결탁하여 유독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왕궁터 월성에서 바라본 황룡사지와 분황사지. 
왕궁터 월성에서 바라본 황룡사지와 분황사지. 

이러한 도심지 사찰에 실제로 왕이 방문을 했던 기록은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선덕여왕이 영묘사 법회에 참석했다가 자신을 사모하던 ‘지귀(志鬼)’라는 사내의 품에 반지를 빼놓고 온 설화나, 황룡사에서 법해(法海) 스님이 연 큰 법회에 경덕왕이 참여하였던 사실이 전한다. 따라서 이렇게 도심지, 그것도 왕궁 근처에 이들 사찰이 자리 잡고 있어 접근성이 좋았던 만큼 왕들의 행차가 빈번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찰이 도심에 들어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불교는 재가신도들의 공양과 시주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했던 만큼 이러한 희사를 쉽게 받을 수 있는 도심에 사찰이 위치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산지가람이 수행에 집중하기 위한 공간이라면 도심가람은 불교를 삼국에 뿌리내려야 했던 교단의 입장에서는 포교에 방점을 둔 거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 초전기에는 승려의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비공식적으로는 아도가 처음 머물던 선산 도리사라든가,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 땅에 도착하여 처음 세웠다고 하는 불갑사처럼 지방의 산중사찰로도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흥륜사나 황룡사 같은 거대한 사찰은 고작 몇 명의 승려가 도시민들의 시주를 받아 경제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너무나 거대한 사찰이었다. 그럼에도 도심지에 이런 사찰이 들어선 것은 당시 신흥종교이던 불교를 신라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키기 위한 마케팅 효과가 컸을 것이고, 아도스님의 토착종교에 대한 도발도 일종의 노이즈마케팅 효과를 노린 것일 수도 있다.
 

선덕여왕 시기 세워진 용궁 북쪽의 분황사.
선덕여왕 시기 세워진 용궁 북쪽의 분황사.

오늘날에도 도심사찰은 존재한다. 안국동의 조계사나 삼청동의 백련사, 삼성동 봉은사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나 성당이 도심지에 자리 잡은 것이 당연시되는 것에 비하면 이러한 도심사찰은 오히려 특별한 예에 속한다. 많은 경우 도심지 사찰은 포교센터나 명상센터 수준에 머물고 있고, 사찰은 점차 산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젊은 불교 신자의 수도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배출되는 승려의 수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그것은 불교가 삶을 떠나는 종교라고 오해되고 있는 잘못된 사회적 통념 때문이 아닐까. 불교는 은일과 은둔을 강조하는 도교 등의 종교와는 다르다. 오히려 삶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밀착형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 초전기 도심지 사찰은 중생들의 삶 자체인 도시로 들어가 토착종교세력들과 의료 베틀까지 치러가며 중생들의 마음을 얻고자 한 결과였다. 
 

주수완 교수
주수완 교수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전통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지만, 전통은 때로는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전통은 중요한 것이지만, 자칫 그 전통이 단지 전통건축에만 머물 때, 전통건축으로 지어지지 않은 도심지 사찰은 왠지 임시방편적인 느낌이 들거나 품격 있는 절이 아니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목조건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설하신 법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심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과거 도심사찰들의 전통을 통해 우리들의 일상 가까이 밀착하여 가르침을 전할 크고 작은 도심사찰의 역할과 위상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전통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종교로서 처음 불교를 전한 순도, 마라난타, 아도 스님의 정신이 더욱 절실한 때이다.

주수완 우석대 교수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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