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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피로 생사고비 극복… 기도와 정진으로 제2의 삶 열어

기자명 법보

[신행수기 당선작] 불교방송사장상-김장대

교통사고 후 몇주 만에 의식 회복하고 200일 재활 끝 퇴원
두 번째 인생 10년간 매일 아침 경전독송‧불사참여로 신행
‘불법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며 자비심 발할 신행 다짐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삼사순례를 가는 사찰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 되었다. 앙상한 가지로 매서운 겨울을 이겨낸 나무 끝자락에도 초록빛 새 생명이 싹트며 따스한 봄의 향기 속에 활기를 찾고 있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습 하나하나에도 위없이 높고 깊은 부처님의 법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해보며 마음 한켠에 묻어두었던 2013년 4월의 봄을 떠올려 본다.

당시 나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평일에는 출근을 하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나만의 소확행(小確幸)이 있다면 일주일에 4~5번은 새벽에 사찰을 방문하여 ‘천수경’을 독송하고 108배를 하는 것이었다. 

불교를 믿고 의지하시는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난 덕분에 유년기부터 불교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사회인이 되면서 수계를 받고 불교를 마음의 의지처로 삼게 된 나는 주말이면 불교대학을 통해 도반들과 함께 봉사를 하거나 철야기도 등을 하면서 신심을 키워나갔다. 덕분에 중요한 선택을 앞두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사찰을 찾아 생각을 정리하며 답을 구했고, 스님들께서 주시는 차 한 모금으로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아내와 동학사로 벚꽃 구경을 가자는 약속을 했는데, 설렘을 가득 안고 했었던 10년 전 그날의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군부대에 근무했던 나는 지방의 작은 도로나 국도를 다녀야 하는 일이 많았다. 사고가 발생했던 그날도 평소처럼 외근을 마치고 운전을 하며 사무실에 복귀하던 중이었다. 

‘어, 어, 어! 저 차 왜 저래?’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하며 역주행하는 차가 보였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부처님, 제가 혹시 이렇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제 아내와 딸이 고통으로 주저앉지 않고 부처님의 품 안에서 이겨낼 수 있도록 꼭 지켜 주소서….” 현실 속에서 이생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 상황이 닥치니 가장 간절히 하게 되는 일은 나 자신의 안위가 아닌 내가 떠난 후 홀로 남을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이후 비명 한마디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채 ‘쾅’하는 굉음과 함께 상대 차와 부딪혔다. 상대방을 발견하고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사고 이후 의식을 되찾기까지는 몇 주가 걸렸다. 주변 사람들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주사를 꽂을 혈관조차 찾을 수 없었던 내 외관과 의식을 찾지 못하는 상태를 보며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뒀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내만큼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하루 2번 주어지는 대학병원 중환자실 면회시간이 되면 아내는 평소 내가 즐겨 듣던 관세음보살 정근 독송이 나오는 이어폰을 내 귀 가까이에 가져다 두었다고 한다. 아내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인지 나는 어렵사리 의식을 되찾게 되었다. 너무도 큰 사고였기에 내가 처음 눈을 뜬 순간 모든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표현을 했었다. 

하지만 깨어난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에겐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차라리 죽는 게 나았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모진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팔, 다리, 갈비뼈 등 모든 관절이 부서진 상태였음에도 심장 상태가 좋지 않아 바로 수술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사고로 고관절을 크게 다친 탓에 하체를 움직일 수 있을지 또한 수술 후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점이 나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다. 내가 입원했던 중환자실은 일반 중환자실이 아닌 가장 중증의 환자들이 입원하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곁에서 함께 누워있던 환자분들이 삶을 마감하는 모습을 수차례 지켜봐야 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남겨진 가족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 속에 절규하는 모습을 볼 때면 이 세상에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왜 하필 날벼락 같은 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중환자실에서 수술 일정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원망과 미움, 적대감으로 많은 생각들을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문득 내 시야에 중환자실 창문 밖에 앉아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혹여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사고가 발생한 날부터 단 하루도 집에 가지 않고 내 침대가 보이는 중환자실 창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환자의 보호자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에도 홀로 차디찬 복도 벽에 기대어 눈을 붙이던 아내의 모습을 그제야 바라보게 된 것이다.

‘노년에는 함께 손잡고 사찰 순례를 다니자고 했었던 약속, 가을이 되면 봉정암에 다녀오자고 했던 약속, 주변 복지시설에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약속…’ 돌이켜보니 아내와 아직 못다한 약속들이 많았다. 아내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게 된 나는 그때부터 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부처님, 한낱 중생에 불과한 저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두렵고 또 두렵습니다. 그동안 제가 듣고 읽고 마음에 새기려 했던 부처님의 수많은 가르침을 이제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수지(受持)하여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가르침처럼 마음이 안정을 찾아가니 건강도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불안정했던 여러 수치들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면서 오랜 기다림 끝에 수술대에 오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7시간이 넘도록 계속되는 수술을 수차례 이겨냈고 그 결과 또한 의료진들의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수술이 끝나고 일반 병실로 옮겨지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고관절과 손목 그리고 10개가 넘는 갈비뼈가 부서진 탓에 수술 후 1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고개 한 번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침대에서 회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누워있는 동안 불교방송을 시청하며 평소에 가보지 못했던 사찰 구경도 하고, 여러 스님들께서 들려주시는 법문도 자주 듣곤 했다. 그리고 손목을 움직일 수 있을 무렵부터는 경전 한 구절 또는 부처님 명호 한 번이라도 사경해 보려고 애쓰며 마음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굳은 의지로 안정을 찾아가다가도 한 번씩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회오리치듯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아내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병원 지하에 위치한 법당을 방문해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그렇게 대학병원에서 200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고된 치료와 재활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퇴원을 하게 되었다. 봄에 입원했던 나는 여름과 가을을 병원에서 보낸 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겨울이 되어서야 병원 문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주변에서는 퇴원을 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남은 생은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을 할까봐 걱정하는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불교방송을 보며 내 마음을 수없이 돌아본 덕분이었을까. 병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은 오히려 더 가벼워졌다. 병원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부처님께 선물 받은 두 번째 인생만큼은 감사함 속에서 정말 값지게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공달(空月)이라고 불리는 윤달이 있는 해이다. 조계사에서 생전예수재를 입재하던 날 묘허 스님께서는 ‘좋은 일, 슬픈 일, 나쁜 일 모두 누군가가 주거나 내가 받는 것이 아닌 내가 지은 내 인생’이라는 법문을 하셨다. 법문을 들으며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흘러간 나의 지난 10년을 반추해 보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모질고 힘든 시간들조차 전생과 현생 동안 알게 모르게 했던 나의 행동들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이제는 마음에 남은 작은 원망의 불씨조차 지워보자고 다짐한다.

‘천수경’에는 부처님의 법과 가르침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하게 깨닫기를 서원하며 읊는 개경게(開經偈)라는 게송이 있다. 매일 ‘천수경’을 독송하지만 개경게를 독송할 때면 부처님과 불법을 향한 마음을 경건하게 유지하고자 초심을 찾게 된다.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느껴졌던 지난 10년의 시간들 또한 내가 부처님의 참다운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단계는 아니었을까. 마치 개경게를 읊을 때처럼 내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 신행 생활이 갖는 의미를 고민하고, 수없이 내 마음을 돌아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수지(受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 불편해진 다리로 예전처럼 3000배를 하거나 오랜 시간 참선을 하며 앉아있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매일 아침에는 경을 독송하고, 사찰의 크고 작은 행사나 불사에 동참하면서 신행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금강경’ ‘반야심경’ 등 경전을 붓글씨로 필사하며 글씨 한올 한올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보는 새로운 신행생활에도 몰두하고 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부처님의 가피 속에 제2의 인생을 맞이한 지 어느덧 10년이 되면서 나의 신행생활도 전환점을 맞고 있다. 요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갈까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들을 자주하게 된다. 각 경전마다 개경게 뒤에는 깊은 진리의 말씀이 이어지듯, 나의 신행생활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깊어지리라. 수승한 법연의 울림과 여운 속에 자비심을 발하는 정진의 시간이 이어지기를 두 손 모아 서원(誓願)해 본다.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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