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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진리 찾아가는 장엄한 행렬에 발걸음을 옮깁니다

기자명 법보

[신행수기 당선작] 포교사단장상 - 권나경 

시어머니와 산중 암자 참배하며 불심 키운 종갓집 맏며느리
교통사고로 남편 생명 위급…108배 올리며 간절히 기도 ‘가피’
가정법당서 매일 새벽예불…매월 달빛 걷기 명상도 가행정진

그림=정은주
그림=정은주

코로나19 팬데믹도 3년이 지나니 종지부를 찍는 것 같다. 움츠렸던 마음을 펼치듯 어린 새순이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 혹한 시련 속에서도 때가 되니 봄꽃들이 생명의 순간을 맞이한다. 인연의 고리는 연기되듯 한 철을 보답하고 홀연히 떠난다. 어느덧 봉사단체에서 포교사로 활동한 지 몇 해가 흐르고 있다.

매달 넷째 주 금요일은 특별한 날이다. 스마트폰 알람 메시지에 마음이 설렌다. 신천둔치 걷기 명상이다. 저녁 6시50분, 어스름 하루해가 저물 즈음이면 약속된 장소에 600여명이나 되는 대구 지역단 포교사님들이 단복을 입고 집결한다. 참 나를 찾는 포행 길. 달빛 아래에서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난 순간들이 신천가람을 따라 흐른다. 애면글면 돌부리에 숱하게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아픔 속에서 어느 한 곳 마음 둘 곳이 없었다. 하나의 빛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실오라기 같은 한 줄기 빛을 발견했을 때 나의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관세음보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찾던 한가닥 빛은 부처님이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급할 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붙들고 또 붙들었다. 힘든 병고와 싸우는 남편 마음은 오죽하랴. 가족을 위해 불철주야 애써온 삶은 또 얼마나 서러울까? 남편이 하루속히 회복하길 법당에서 108배를 올리며 간절하게 빌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남편은 사경에서 헤매다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츰 회복되었다. 

몸을 추스른 남편은 한국불교대학 저녁반에 입학했다. 불교대학 낮반을 맡아 수업을 하고 있던 나는 포교사 시험에 합격한 후 지역 봉사 정견팀에 소속돼 계단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회사 쉬는 날에는 팔공산 선본사 갓바위를 찾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함께 청소 하겠다며 나와 함께 계단을 빗자루로 쓸어내렸다. 불심 깊은 조모님의 덕분이었는지 절 봉사에 나서는 나를 간섭하지 않는 것만도 고마울 따름이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새벽 5시면 가정법당 부처님 전에서 함께 정성껏 예불을 올린다. 

몇 해 전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께서 한국불교대학 4층에 백의관세음보살님을 점안하신 후 신심 있는 불자들에게 가정법당을 마련하도록 권하셨다. 각 기수에서 4년간 기장을 맡아 수업을 이끌던 나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법우들과 잠시 떨어져 있게 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가정법당의 백의관세음보살님께 새벽예불을 올리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집에서 할 수 있는 수행이자 신행 활동이 바로 회주스님께서 권하신 백의관세음보살 가정기도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피하려 위생관리를 철저히 했다. 그러나 3차까지 예방접종을 마치고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이 기회를 엿보던 바이러스가 침입했다. 잔기침이 나기 시작하더니 콧물이 났다. 머리는 아팠으나 목은 아프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까운 약국에서 코로나 검사기를 구입했다. 아뿔싸! 빨간 줄이 두게 나왔다. 멍하게 바라보는 동안 심장박동이 멈추는 듯 아찔했다. 먼저 가까운 가족에게 상황을 알렸다. 그 후로 격리된 상태로 치료를 받았다. 

설마했던 생각으로 방심했던 나 자신을 자책했다. 2주 후 큰아들이 모처럼 방문했다. 직장생활로 힘든 아들이라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다. 마스크 착용은 필수였다. 아들은 맛있게 음식을 먹고 저녁에 약속이 있다며 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 병원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더니 양성이라고 해요. 회사에서 격리돼 출근 못 하고 있어요.”

“미안하구나. 몸조리 잘해라!”

그날 방문한 게 화근이 되었다.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아들은 고통 없이 코로나에서 벗어났다. 이 또한 부처님 자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찰 입구에서 코로나 검사를 하고, 법당에서도 거리두기를 했다. 불교대학 수강생 대부분은 연세 많은 노보살님이었다. 평소 수업에 빠짐없던 분들이었는데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발길이 뜸해졌다. 급기야 절에서 수행하던 불자님들도 한동안 절을 찾지 못했다. 텅 빈 법당은 저절로 거리두기가 되었다. 수업이 사실상 휴강 상태에 접어들면서 나도 생업에 충실했다. 

요양보호사로 어르신 돌봄을 시작한 지 어느덧 3년이 훌쩍 넘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재가방문하며 아흔이 되신 어르신을 보살피는 일을 한 지가 2년이 되었다. 허리를 다쳐 수술하신 어르신의 병원 진료, 가사일, 상태 기록 등으로 오전 3시간은 후딱 지나가 버린다. 오전 일을 마치면 오후에는 3등급 어르신 돌봄을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해거름이 될 때쯤 퇴근하게 된다. 연세 지긋하신 병든 어르신 돌봄은 이제 천직이나 다름없다. 

요양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처음엔 요양 시설에서 1년간 근무했다. 100여명 가까운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보호시설은 체계적인 주야 근무로 빈틈없이 돌아갔다. 야간 3교대 근무 때는 긴장을 한시도 놓을 수가 없다. 어르신 중에는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자리에 몸담았던 분들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곳은 재벌도, 직위도 없이 인생을 마무리하는 공동운명체였다. 요양사의 도움을 받아 대소변을 처리하고 하루하루를 영위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여러 어르신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코로나로 가족과 생이별하고 일생을 마감하는 모습도 적지 않게 지켜보았던 터라 내 몸을 각별하게 돌볼 여유는 저만치 달아났다. 심지어는 보철했던 이빨에 탈이 났음에도 주·야근 일에 쫓기다 보니 병원에서 치료 한번 받기가 쉽지 않았다. 빈틈없는 3교대 생활에 ‘나 돌보기’는 담 넘어 불구경이었다. 

1년 동안 아픔을 무릅쓰고 일에만 몰두했다. 잇몸에서 피가 나고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도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약국에서 피로회복제나 사서 복용하는 게 전부였다. 퇴직을 결심한 날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무렵 사무실을 찾아가 원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퇴직서에 서명했다. 내 몸이 건강해야 병든 환자를 돌보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주야간 보호시설 1년 근무를 한 후 종지부를 찍었다.

거리두기를 해제한 후 법당에서는 수업이 재개됐다. 한동안 얼굴 보지 못한 보살님들은 이산가족 만나듯 반가움에 얼싸안았고 법당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코로나를 잘 견뎌내신 신도님께 찬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확진자가 줄어들더니 마침내 마스크를 벗는 날이 왔다. 나도 미루고 미루던 잇몸 이식 수술을 했다. 9개월의 긴 치료를 마치고 마침내 음식을 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기뻤다.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20대에 절친이었던 여고 동창생으로부터 자신의 고종 오빠였던 지금의 남편을 우연히 소개받았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조금은 성급하게 결혼하고 종갓집 맏며느리로 살아왔다. 무던한 성격인 경상도 남자의 투박한 모습에 이끌렸다. 올망졸망한 세 자녀가 태어나서 늘 분주했다. 시가에서는 4대 봉제사까지 모셨다. 결혼 초부터 남편의 직업 따라 이동하다 보니 시부모님과 함께 오붓이 살갑게 살지는 못했다.

고부간의 정이 생길 틈도 없이 5년 전에 시아버지께서 작고하셨다. 빈자리가 서운했는지 작년에는 향년 92세로 시어머니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몸이 불편하실 때도 일념으로 염주를 돌려가며 정진하셨던 시어머니는 ‘관세음보살’을 염하시며 편안한 모습으로 일생을 마감하셨다. 

불심 깊은 시어머니는 처음 시집온 종부에게 불심을 심어 주셨다. 시어머니는 깊은 산중 작은 암자에 다니셨다. 부처님오신날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법당에서 맏며느리인 나에게 합장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었다. 하지만 병이 깊어지시면서 1년에 한 번씩 찾던 암자도 걸음 하지 못하셨다. 시어머니 장례를 마치고 다니던 사찰에 49재를 올려 드렸다. 시어머니와 절을 참배하며 싹 텄던 작은 불심이 이렇게 포교사 활동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요즘은 지역 봉사 문수팀에서 저녁 출석 체크 봉사를 한다. 직장 일의 피곤함도 잊은 채 신행봉사에 참석해 맡은 소임을 다하고 있다. 우리 절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본사는 대구 시내의 영대 네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불법홍포를 향한 회주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각 지역과 해외에 도량을 마련하고 신심 있는 보살님들이 환희에 찬 모습으로 신행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음력 2월에는 윤달을 맞이해 많은 불자들과 함께 사찰순례에 동참했다. 천왕봉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한 지리산 도량 치유마을에서 부처님 점안식을 성대하게 봉행했다. 입상으로 조성한 부처님의 상호가 원만하셨다. 병환에 시름 하는 불자님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다. 

해마다 기수 봉사의 날은 아무리 바빠도 빠짐없이 참석하기 위해 노력한다. 몸이 힘들 때면 환하게 미소 짓는 관세음보살님이 자비로운 모습을 나투시어 어루만져 주신다. 이제는 매월 넷째 주 금요일을 기다린다. 한 달에 한 번 걷기 명상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수희동참 한다. 오늘도 지하철 3호선 전동차에 몸을 실어 신천둔치로 향한다.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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