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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등선원 회주 동명 스님

“한 생각 돌이켜 고개를 돌리는 그 자리가 피안입니다”

43일간 1167km 도보로 부처님 발자취 따라가는 상월결사 인도순례 동참해 끝까지 완주
두 발로 성스러운 땅 순례하며 부처님 떠올리고 느끼며 닮아가려 노력…“희유한 성지순례”
상월결사 회주 자승 스님 비장한 발원에도 깊은 감동…열반성지서 은사 해안 스님 떠올려

동명 스님은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룬 후 뭇 생명에 대한 자비심을 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장장 45년간 길 위에서 길을 일러주셨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냐”고 말했다. 사진=남수연 기자
동명 스님은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룬 후 뭇 생명에 대한 자비심을 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장장 45년간 길 위에서 길을 일러주셨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냐”고 말했다. 사진=남수연 기자

돌이켜보면 모두 불보살님 가피였다. 43일간 1167km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도 그랬다. 처음 동참의사를 밝혔을 때 주변에선 만류했다. 젊은 사람도 견뎌내기 힘든 험한 길을 왜 굳이 가느냐는 거였다.

서울 전등선원 회주 동명(東明) 스님은 그 순례가 고난의 여정임을 잘 알았다. 칠순을 넘긴 지 몇 해가 지났지만 걷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문제는 속병이었다. 인도에서 물과 음식으로 고생한 얘기를 숱하게 들어온 터였다. 가뜩이나 장도 좋지 않아 덜컥 병이라도 걸리면 어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순례대중에 큰 폐를 끼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간절함을 넘어서지 못했다. 부처님께서 걸었던 옛길을 어떻게든 따라 걷고 싶었다. 2600여년 전 부처님이 태어나 성장하고 번민하며 사문의 길을 걸었던 곳, 혹독한 정진을 거쳐 끝내 무상정등정각을 얻은 곳, 진리를 알지 못해 괴로워하는 뭇 생명들을 위해 45년간 전법에 나섰던 곳, 인도는 부처님의 땅이었고 불자들의 고향이었다. 아주 오래 전 수많은 구법승들이 그리했듯 두 발로 그 성스러운 대지를 순례하며 부처님을 떠올리고 느끼며 닮아가고 싶었다.

‘그래, 죽더라도 그 길 위에서 죽자.’ 결심이 서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찰 대중들을 불러 돌아오지 못할 수 있으니 뒷일을 당부한다고 했다. 통장도 맡겼다. 애써 가볍게 말을 건넸지만 속내는 결연했다.

올해 2월9일 설렘과 걱정 속에 마침내 인도의 길 위에 섰다. 새벽 2시에 시작돼 매일 25~30km가량을 걷는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도로는 열악했고 차들은 성난 짐승처럼 질주했다. 아스팔트라지만 움푹 파인 곳이 많아 졸거나 한 눈이라도 팔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스님은 순례대중과 함께 흙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열악한 숙영지에 잠자리는 불편했고 씻기도 어려웠다. 몸은 무거웠으나 그 고단함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던 사람들. 신기한 듯 순례대중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맑은 시선. 그들의 먼 조상들도 부처님과 제자들을 이렇게 맞이했던 것은 아닐까.

보드가야, 죽림정사, 영축산, 라즈기르, 바이샬리, 쿠시나가르, 룸비니, 카필라바스투, 기원정사 등 성지를 향해 걸음걸음을 더했다. 편리와 빠름이 미덕이 되어버린 세상. 속도가 중시될수록 몸과 세상의 접촉 기회는 더 멀어진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더라도 정작 과정은 상실하는 셈이다. 효율적인 듯 보이지만 실상 어리석음으로 치닫는지 모를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장장 45년간 길 위에서 길을 일러주셨어요. 수십 억겁의 생사를 넘나드는 과거생 얘기를 비롯해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 과정까지, 중생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과 무아, 뭇 생명에 대한 자비와 수많은 방편까지 다 이 땅에서 이뤄졌습니다.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수 있겠어요.”

스님은 순례 기간 내내 늘 깨어 있고 모든 것에 정성을 다하고자 했다. 바람이 스쳐가고, 해가 떠오르고, 발이 대지에 가닿는 느낌까지 세세히 관하려 했다. 오후에 진행되는 108배 기도와 ‘금강경’ 독송에도 오롯이 마음을 담았다. 순례단을 찾은 인도인들을 항상 화안애어(和顔愛語)로 맞이했다.

날이 지날수록 신심이 솟고 힘이 났다. 순례대중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젊은 사람들도 기진맥진인데 고령의 스님이 힘든 내색은커녕 지친 대중을 격려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대중들과 함께 직접 부처님 성지를 순례할 수 있는 희유한 인연에 감사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마따나 대중이 함께 하기에 수천리 길을 걸을 수 있음을 알았다. 어떻게든 한국불교를 중흥시키겠다는 상월결사 회주 자승 스님의 절절한 발원도 마음 깊이 와 닿았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지 않고서 불교는 존속할 수 없었다. 불교가 사라진 인도의 아픈 현실이 한국에서 재현되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상월결사 인도순례는 성불을 미루더라도 이제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그 비장한 외침에 대한 적극적인 동참이기도 했다.

부처님을 모시고 인도를 순례하고 있는 동명 스님.
부처님을 모시고 인도를 순례하고 있는 동명 스님.

스님은 길 위에 섰던 43일 내내 부처님을 떠올렸다. 그 길에서 마주했던 숱한 감동을 잊지 못한다. 부처님께서 노구를 이끌고 걸어가셨을 열반성지 쿠시나가르를 향할 때는 더욱 숙연해졌다. 열반 전 마지막 목욕을 하셨다는 카쿠타강에 손을 담글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스승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아난과 제자들이 느꼈을 비통함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동시에 부처님을 빼닮았던 자신의 늙은 스승 해안 스님(海眼, 1901~1974)이 떠올랐다.

해안 스님은 ‘동(東) 경봉(鏡峰) 서(西) 해안(海眼)’이라 칭송되던 호남의 대표적인 선사였다. 어린나이에 산사에 든 동명 스님에게 해안 스님은 아버지와 다름없었고, 쭉쭉 뻗어 오른 내소사 전나무처럼 큰 스승이었다. 강산이 여섯 번 넘게 바뀌었을 60년 세월을 출가자로 살아올 수 있었던 데에는 스승으로부터의 감화가 컸다. 예나 지금이나 동명 스님에겐 가장 존경하는 이는 부처님이고, 그 부처님을 가장 닮은 분은 스승 해안 스님이다.

195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동명 스님은 1962년 되던 해 절에 들어왔다. 어머니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완주의 한 암자에 맡겨졌다. 하루아침에 어머니를 떠나온 소년은 1년이 넘도록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도 안타까웠던 걸까. 암자를 찾은 노보살이 가만히 소년을 불렀다. ‘남도의 도인’이라 불리는 큰스님이 곧 전주에 오시는데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큰스님에게서 공부해야 나중에 도를 깨쳐 큰스님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어떻게라도 큰스님을 봬야겠다고 다짐했다. ‘탈출’을 결심하자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눈치를 살피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다. 조바심에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이러다간 정말 큰스님을 못 뵙겠다 싶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암자를 나와 산비탈을 내달렸다.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아 뒤 한 번 돌아보지 못했다. 산을 벗어나 물어물어 큰스님을 만나러갔을 때 약속 날짜는 이미 하루를 넘긴 뒤였다. 행여나 했지만 큰스님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허탈해하는 소년에게 암자에서 만났던 노보살님은 큰스님이 한참을 기다리다 떠나셨다고 했다. 다행인 것은 예산 보덕사로 찾아오라는 전갈이었다. 차비로 쓰라고 200환도 두고 갔다.

소년은 자신이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 더는 주저할 게 없었다. 예산행 버스를 타려고 터미널로 향할 때였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있을까.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놀라는 어머니를 향해 자신은 큰스님을 뵈러 간다고 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같이 살자고 했다. 소년이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자 차비하라며 200환을 손에 쥐어주었다. 어머니의 애절한 시선을 뒤로한 채 보덕사에 도착한 소년은 얼마 뒤 큰스님과 마주했다.

큰스님은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다. 눈빛은 형형했고 허리는 꼿꼿했다. 엄한 듯, 너그러운 듯, 고요한 듯, 강인한 듯도 보였다. 빳빳이 날이 선 가사장삼에서 일거수일투족에 절도가 배어 있음이 느껴졌다. 소년은 ‘도인은 이렇구나’ 싶었다. 큰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불렸다고 했다. 유명한 한학자를 찾아 내소사 인근에 왔다가 만허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이후 선지식을 찾아 여러 고찰을 참방하던 중 백양사 학명선사 회상에서 은산철벽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고 7일 밤낮을 정진하다 깨달았다고 했다. 백양사 지방학림, 불교중앙학림, 중국 북경대학 등 내외전을 두루 공부한 강백이며 선승이었다.

소년이 찾아간 보덕사는 비구니 도량이었다. 안거를 맞아 참선 공부를 지도해줄 조실로 큰스님을 모신 거였다. 큰스님은 자신을 시봉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소년은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깨끗한 승복으로 갈아입었다. 큰스님은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법당에서 절을 하라고 일렀다. 소년은 하루 천배도 하고 삼천배도 하고 만배까지 했다. 무릎이 까져 피가 나더니 바지에 엉겨 붙었다. 힘들고 아팠지만 ‘이것도 못하랴’ 싶어 죽기 살기로 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큰스님도 대중스님들도 기특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큰스님은 소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교리와 수행 외에도 앉고 서고 자고 말하고 밥 먹는 것, 심지어 청소하는 법까지도 꼼꼼히 알려줬다. 당나라 운문 선사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고는 한 가지 지혜를 체득할 수 없다(不因一事 不長一智)’고 했듯 큰스님은 소소한 듯 보이는 그 안에 담긴 깊은 뜻을 체득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을 것이다. 큰스님 말씀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을 소년은 어떻게든 따르려 무던히 애썼다.

방청소도 그랬다. 비질을 할 때면 문을 닫고 윗목에서 아랫목으로 차근차근 쓸어야 했다. 문을 열고 쓸면 바람에 먼지가 흩날린다고 했다. 비질이 끝나면 곧바로 걸레질을 했다. 이때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이동하며 걸레질 하되 바닥의 결을 따라 닦아나갔다. 물건은 있던 자리에 반듯하게 두는 것도 꼭 지켜야할 사항이었다. 수행(修行)이라는 말에 ‘닦고(修) 다닌다(行)’라는 의미가 있듯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는 게 큰스님이 말하는 마음공부의 시작이었다.

“도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미래를 맞추는 게 아닙니다. 거슬리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거예요. 그게 여법함이에요.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닙니다. 몸이 반듯하면 마음도 반듯해요. 몸이 흐트러지고 주변이 정리가 안 되면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제가 지켜본 은사스님은 종일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으셨습니다.”

동명 스님은 “스님들이 정법을 가르치는 데 주력하면 부처님 가르침이 불자들 생활에 깊이 자리 잡고 불교의 위상도 높아져 저절로 불자가 늘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남수연 기자
동명 스님은 “스님들이 정법을 가르치는 데 주력하면 부처님 가르침이 불자들 생활에 깊이 자리 잡고 불교의 위상도 높아져 저절로 불자가 늘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남수연 기자

13세 때 ‘남도의 도인’ 해안 스님 직접 찾아가 사제 인연 맺어
“전등회 잘 육성하라”는 스승의 유촉 평생 받들기 위해 노력
7일이면 선의 깊은 맛 알고 일생 안심입명할 수 있는 길 찾아

안거가 끝나고 소년은 큰스님을 따라 부안 내소사 지장암으로 옮겨갔다. 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도 받았다. 법명은 동명(東明)이었다. 지장암 대중들은 자급자족했다. 오전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내내 울력해야 했다. 그렇다고 공부가 녹록하지는 않았다. ‘금강경’ ‘원각경 보안보살장’ ‘관음예참’은 반드시 외워야 했다. 은사스님에게 그간 공부한 내용을 점검받을 때는 숨쉬기 버거울 정도로 긴장감이 흘렀다.

동명 스님은 절이 좋았다. 은사스님 법문을 듣는 것도 즐거웠다. 정진 시간에 꾸벅꾸벅 졸기도 했지만 화두를 타파하려 앉아 있는 것이 좋았다. 은사스님은 때로 준엄한 문장으로, 근기에 맞춘 설법으로 만나는 이마다 발심해 불문에 들게 했다. 은사스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었다. 맑은 새벽에 외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산창으로 스며드는 솔바람을 들을 줄 알았다. 봄 다 가는 날 떨어지는 꽃을 조문하고 귀촉도 울음을 귀에 담을 줄 알았다. 아침 일찍 세수한 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초 잎에 손질도 할 줄 알았다. 동명 스님은 공부를 하다보면 언젠가 자신도 은사스님이 지은 시의 내용처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동명 스님은 부지런히 일하고 정진했다. 은사스님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마음이 컸다. 그런 새털 같은 날들이 흘러 열여덟이 됐다. 앳된 소년의 티를 벗어버린 스님의 고민은 성(性)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욕망이 주머니 속에서 송곳 삐져나오듯 불쑥불쑥 치솟았고 그럴 때면 한없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해야 이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욕망이 없어진다면 더 열심히 수행할 수 있을 텐데….’ 고민 끝에 극단의 방법을 선택했다. 아궁이 문으로 사용하는 두툼한 나무판 위에 성기를 올려놓고 시퍼런 삭두(머리 깎는 칼)로 내리친 것이다. 순간 스님의 몸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이를 발견한 사형 혜산 스님이 깜짝 놀라 손수레에 옮겨 싣고 동네 의원을 향해 내달렸다.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 사형의 놀람과 걱정에 물든 얼굴이 들어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앞으로 은사스님 얼굴을 어떻게 보나.’ 동네 의원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며 의식을 잃었다. 동명 스님이 깨어난 곳은 전주의 한 병원이었다. 병원에 입원한 내내 사형은 줄곧 자리를 지켰다. 극진히 간병한 사형 덕에 석 달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너무 젊었던 게지요. 당시는 깨닫겠다는 절박함으로 그랬겠거니 이해는 되지만 그걸 자른다고 욕망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해야 할 일이었어요. 그렇더라도 발심의 계기가 돼서 출가자의 길을 걷고 정진하는 데에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래 왼쪽부터 동명 스님, 해안 스님, 혜산 스님.
아래 왼쪽부터 동명 스님, 해안 스님, 혜산 스님.

해안 스님이 세연을 접은 것은 1974년 음력 3월9일 새벽이었다. 생전 스님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은 농사짓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하는 것이 가장 법에 맞는 일이라고 했다.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마음먹고 7일만 참구한다면 누구나 깨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수행은 삶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고, 그 수행은 신비한 그 무엇이 아니라 누구나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일생 정진과 전법의 삶을 살던 스님은 임종게와 함께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나 떠난 뒤에도 공부 열심히 하고 전등회를 잘 육성하라”는 것이었다.

전등회는 1969년 봄 해안 스님을 따르던 장경호 거사 등 불자들이 서울 수유동에 수행처를 마련해 시작된 수행모임이었다. 정진법회는 매년 네다섯 번씩 열렸다. 해안 스님은 대중들이 먼저 3일간 참회기도를 하도록 했고, 직접 쓴 발원문을 읽어 내려갔다. 대중들의 분심과 의심을 불러일으킨 뒤에야 비로소 선방에 들어가도록 했다.

이 과정을 지켜봤던 동명 스님은 은사스님의 뜻을 받들어 수행과 전법에 일생을 걸 것을 다짐했다. 전등회를 활성화하는 것이 선을 대중화하고 사람들의 행복을 돕는 길이라 여겼다. 해인사 강원 졸업 후 송광사, 통도사, 백양사 등 선방에서 화두를 참구할 때도, 내소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개운사 주지 등을 지낼 때도 은사스님의 유촉을 잊지 않았다. 특히 전등선원을 맡고서는 시민선방을 열어 대중들을 참선수행의 길로 이끌었다.

세월이 흐르면 대부분 잊히고 바래지만 간혹 더 깊이 각인되는 것이 있다. 은사를 향한 동명 스님의 마음이 그랬다. 2014년 4월6일 해안 스님 입적 40주기를 맞아 재현한 생전 장례식도 그중 하나다. 해안 스님은 파격의 선사였다. 스님은 환갑날 생전 장례식를 치른다며 널리 알리라고 지시했다. 살아 장례식을 치른다는 얘기가 알려지자 듣도 보도 못한 일에 구경꾼들이 몰렸다. 가상여(假喪輿)에 오른 스님은 구성지게 열반가를 불렀다.

‘나는 가네 나는 가, 이 세상을 이별하고 나는 가네 나는 가, 어어노 어어노 나무아미타불/ 백년 삼만육천일을, 우리 인생이 산다 해도, 허망하기 짝이 없네, 어어노 어어노 나무아미타불/ 살아있는 사람들아, 죽어지면 그만이라고 그런 말은 하지 마소, 어어노 어어노 나무아미타불/ 인과가 분명하여,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선한 사람은 천당으로 가네, 어어노 어어노 나무아미타불…’

스님의 열반가에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쳤다.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사이건만 욕망에 허덕이며 사는 중생들을 일깨우려는 의도였다. 동명 스님 등 상좌들이 생전 장례식을 재현한 것도 사람들이 은사스님의 삶과 가르침을 알고 실천해 보다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당시 주지 법만 스님과 내소사 선원장 철산 스님 등 100여명의 스님과 700여명의 전등회 회원들도 참여했다. 동명 스님은 부처님과 해안 스님 진영에 예를 올리고 하얀 종이꽃으로 장엄한 상여 속으로 들어갔다. 상여가 일주문을 지나자 동명 스님도 예전의 해안 스님처럼 열반가를 불렀다. 상여는 부도전 앞에 이르러서야 멈춰 섰고 동명 스님이 걸어 나오면서 마무리됐다.

“은사스님께서는 60평생 분분했던 시시비비를 다 씻어버리고 새 삶을 산다는 의미로 상여 속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 퍼포먼스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돌아보고 허투루 시간 쓰지 말며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경책하셨던 것입니다.”

동명 스님은 생전 장례식 재현 외에 다양한 선양사업을 이어왔다. 2019년 10월8일에는 해안 스님이 정진하던 내소사 지장암 요사채 터에 높이 6m, 폭 4m로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을 본뜬 심인탑(心印塔)을 조성했다. 해안 스님의 가르침을 새겨 정진하자는 취지로 탑 안에는 스님의 진영, 오도송, 열반송 등을 봉안했다. 2020년 3월에는 해안 스님의 유묵과 서필을 모은 ‘해안선사 서문집’을 펴냈다. 동명 스님이 오랜 세월 모아 소장하던 것으로 스승에 대한 각별함이 곳곳에 묻어난다.

어릴 적 산문에 들었던 동명 스님은 어느새 해안 스님이 입적할 당시의 나이에 이르렀다. 거울 속 얼굴에도 주름이 가득하다. 세상 모든 게 변하는 게 이치인데 애써 미련을 둘 일은 없다. 그렇더라도 선에 대한 불교계 안팎의 관심이 크게 줄어드는 현상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올해 4월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책임감은 더 커졌다.

“춥고 배고파야 도를 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풍요로운 시대에 간절함을 갖고 전심전력으로 정진해야 하는 참선수행이 힘들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님께서 역설하셨듯이 일주일이면 선의 깊은 맛을 알게 되고, 일생을 안심입명(安心立命)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세태를 탓하기에 앞서 어떻게 법의 등불을 밝히고 전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져야 합니다. 최근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선 명상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뜻깊습니다. 꼭 성사시켜야할 우리 불교계의 당면 과제이기도 하고요.”

스님은 불교계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일화를 통해 들려줬다. 아이를 키우는 한 여인이 비오는 날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땅에 닿을 때 통통 소리가 나는 곳이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파보니 상자에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깜짝 놀란 여인은 상자를 서둘러 다시 묻고 이사를 갔다.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려는 엄마였기에 그랬던 거예요. 노력해서 번 돈이라야 가치가 있지 그냥 들어온 돈은 화가 되기 십상입니다. 아이 교육에 안 좋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요. 우리 스님들이 이 어머니 같아야 합니다. 스님들이 돈에 신경을 쓸 게 아니라 정법을 가르치는 데에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 가르침이 불자들 생활에 깊이 자리 잡고 일반인들이 불교를 높이 봐요. 그러면 저절로 불자들이 늘어납니다.”

스님은 돈과 허명에 휩쓸리는 세상에 스님과 불자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자들에게 전하는 간곡한 당부이기도 하다.

“경전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맨땅에 누워있어도 편안하고 즐겁지만, 늘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천당에 있어도 불평만 일삼는다’고 했습니다. 회두시안(回頭是岸)이라는 말이 있어요. 고개를 돌리는 그 자리가 피안이라는 것입니다. 불자라면 불법을 공부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생각 바꿔 피안의 자리를 보게 하는 힘입니다. 그 힘이 모일 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정토가 됩니다.”

이재형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683호 / 2023년 5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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