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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 스님을 현창해야 할 이유

기자명 이병두

올해 3월 말 스님 몇 분과 강화도로 삼사순례를 다녀오면서, 그중 한 곳에 모셔져 있는 함허기화(涵虛己和, 법명 得通; 1376~1433) 스님의 자그마한 부도에 참배하였다. 함께 한 일행과 작고 소박한 스님의 부도를 참배하며 스님이 불교사에 남긴 자취를 잠시 돌아보고 오늘날 한국불교 현실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그 부도 옆에 세운 안내판을 보는 순간 답답하고 안타까워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그 부도의 주인공인 함허 스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도 없이 부도의 크기와 양식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1392년 실권 없이 왕의 자리만 지키고 있던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을 쫓아내 500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은 앞선 시대의 주류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모두 부정하려고 하였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오늘날에도 정권이 바뀌면 새로 집권한 세력에서는 전 정권을 비판하고 심지어 단죄에 나서는 경우를 숱하게 본다. 그러니 전제 왕권이 국가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왕조가 바뀌었을 때에 얼마나 무서운 상황이 펼쳐졌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새 집권세력은 권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전제(田制)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구(舊) 세력의 토지를 몰수하여 집권 공신들에게 배분해 경제 기반을 확립하는 한편, 사찰 소유 토지 몰수·출가 제한 조치 등 전 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세워 강력하게 추진한다. 이때 ‘왜 불교를 억압해야 하는지?’ 이유를 밝히는 이론작업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다. ‘조선 왕조 건국의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는 그가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써서 불교를 이론적으로 공격하였다.

그의 글은 곳곳에 논리의 비약이 넘쳐나고 억지를 부리는 등 허점투성이지만, 이 허술한 글에 맞서 그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정당한 대응을 하는 불교인이 없었다. 오직 한 사람,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 스님의 제자인 함허 스님이 ‘현정론(顯正論, 바름을 드러내 밝히는 글)’을 써서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와 신료들의 불교 비판에 잘못이 많음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주장하였다. 새 왕조의 권력이 서슬 퍼렇던 시절에 이런 글을 쓰는 것만 해도 힘들 터인데 어렵게 쓴 글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함허 스님의 기백 앞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함허 스님이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써서 후학들에게 ‘금강경’ 이해의 깊이를 더해준 데 대해서는 아는 이들이 많지만, 그가 정도전의 불교비판에 맞서 ‘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여 정면 대응한 사실을 아는 불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불교인의 역사의식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지난해부터 서울 광화문광장 역사물길 사업의 종교편향 문제가 불거지고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서울 시내 곳곳에 거대한 입간판을 세워 조선시대 정부 기관들이 있던 곳과 광희문 등 유적지가 거의 모두 ‘천주교 순교성지’였다고 표시하여 국민을 오도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 분노하고 있다. 억지를 쓰고 있는 천주교 쪽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불교 역사를 지켜낸 스님을 바르게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도 답답하다. 부도 옆에 세운 설명문에서는 부도의 생김새와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스님의 훌륭한 삶을 드러나게 해야 맞지 않을까. 조선 왕조의 억불(抑佛) 이데올로기 조작에 맞서 불교를 지켜내는 글을 지어 세상에 내놓고 ‘금강경오가해설의’를 저술하여 ‘금강경’ 연구에 큰 자취를 남겨 후학들의 길잡이가 된 함허 스님.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조계종에서 어떻게 예우해야 맞는지 답이 보일 것이다.

‘천겁이 지났어도 옛일이 아니며, 만세를 펼쳐도 영원한 지금일세(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전국 여러 사찰에 주련으로 걸려있는 함허 스님의 게송이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683호 / 2023년 5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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