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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54)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10)

의상의 귀국은 불법 홍포와 당의 침공 알리기 위한 두가지 목적

국내선 당의 침공‧중국은 불법홍포, 의상 귀국 목적 다르게 기록
귀국시기 기록따라 달라…학계는 670년 귀국 맞는 것으로 판단
의상 귀국후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 실행으로 무사히 국난극복  

경주 낭산 사천왕사지. [문화재청]

의상(625~702)은 668년 7월15일 화엄교학의 요체를 담은 ‘일승법계도’를 찬술, 스승 지엄에게 인가를 받고, 마침내 당 유학의 소기 목적을 달성하였다. 661년 당으로 출발하여 다음 해부터 7년 동안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한 결과였다. 그동안 지엄은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서 장안의 운화사(雲華寺)와 청정사(淸淨寺)로 옮겨 머물기도 하였는데, 의상도 충실한 제자로서 그를 따라 옮기면서 수학하였다. 의상이 ‘일승법계도’를 지어 스승의 인가를 받은 지 약3개월 뒤인 10월29일 지엄은 67세를 일기로 하여 청정사의 반야원에서 입적하였는데, 그의 입적 직전까지도 화엄학의 의리에 대한 문답을 통하여 깨우치도록 하였다.

의상은 668년 이미 스승 지엄의 인가를 받았고, 그 스승마저 입적하게 되자, 당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그리고 동문수학하던 후배 법장이 2년 뒤인 670년에 출가하여 지엄의 화엄학을 계승하게 되면서 의상은 가벼운 마음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11세기 중반에 활약한 고려의 박인량(朴寅亮)은 ‘해동화엄시조부석존자찬병서’를 지어 의상의 수학과 귀국의 사실을 간명하게 표현해 주었다. “위없는 스승을 구하여(求無上師), 종남산 (지엄의) 문하에 들어갔네(入終南室). 학업을 마치고 스승이 입적하매(學了師亡), 비어 가서 채워 돌아왔네(往虛歸實).” 박인량은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1080년 송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지은 시문을 모은 ‘소화집(小華集)’은 송의 문인들에게 문명을 떨친 바도 있었는데 ‘부석존자찬’은 4언16구의 적은 분량이지만, 당에 유학하여 지엄에게 수학한 사실 이외에도 의지(義持)·선묘(善妙)·부석(浮石)·십산(十山)·십성(十聖)·법계도(法界圖) 등 의상의 주요한 행적과 업적을 간명하게 망라하여 주었다.

의상이 당 유학의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하여 귀국할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신라와 당 사이의 군사적 갈등은 그의 귀국을 앞당겨 주게 되었다. 그런데 자료에 따라 귀국 연도가 670년과 671년 등 1년 차이가 있으며, 귀국 동기나 계기도 당의 신라 침공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본국에 불법을 전하려는 의도였다고 서술되어 있는 등 다소 혼란이 있어 먼저 귀국의 연도와 동기에 관련된 자료를 제시하여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1) 본국의 승상 김흠순(金欽純, 혹은 金仁問이라고도 한다)과 양도(良圖) 등이 당에 가서 갇히고, (당의) 고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하려고 하였다. 흠순 등이 은밀히 의상에게 일러 앞서 가도록 권유하므로 함형 원년 경오(庚午, 670)에 귀국하여 그 사정을 왕에 알렸다. (왕은) 신인종의 대덕 명랑에게 명하여 임시로 밀단법(密壇法)을 설치하고 기도하여 이를 물리치게 하니, 이에 국난을 면하였다. (삼국유사 권4 의상전교조)

(2) 이때(668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의 유병(遊兵)과 여러 장병들이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를 습격하려고 계획하는 것을 왕이 알고 군사를 발하였다. 이듬해(669)에 당의 고종이 인문 등을 불러서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하고도 우리를 해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하고, 감옥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조련하여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의상법사가 서쪽 당으로 가서 유학하고 있었는데, 인문을 찾아보니, 인문이 그 사실을 알렸다. 의상이 곧 귀국하여 왕에게 아뢰니, 왕이 매우 염려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방어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金天存)이 아뢰기를 “근래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해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하였다. 명랑이 아뢰기를 “낭산 남쪽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함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삼국유사 권2 문무왕법민조)

(3) 부석사본비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 8년(625)에 탄생하여 관세(丱歲, 15세?)에 출가하여 영휘 원년 경술(650)에 원효와 함께 당에 들어가려고 고구려까지 이르렀으나 장애가 있어 돌아왔다. 용삭 원년 신유(661)에 당으로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나아가 배웠다. 총장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세상을 떠나자, 함형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서 장안 2년 임인(702)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78세였다.(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조)

(4) (명랑은)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 9년 을미(635)에 돌아왔다. 총장 원년 무진(668)에 당장 이적(李勣)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군사를 남겨 백제에 머물게 하고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신라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 고종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치려고 하였다. 문무왕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하여 비법으로써 이를 물리쳤다.(삼국유사 권5 명랑신인조)

(5) 의상은 ‘화엄경’에 대해 깊은 뜻과 드러난 상을 알았으며, 질서와 강요가 있었으니, 덕의 병이 가득 차서 불법의 바다에서 즐겁게 놀았다고 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의상은 왔던 길로 돌아가 불법을 전하고 교화를 펼쳐야겠다고 생각하였다.(송고승전 권4 의상전)  

이상 의상의 귀국 연도와 동기에 관련된 자료들을 인용하였는데, 의상·문무왕·명랑·찬영(贊寧) 등 각각의 다른 입장이 반영되어 서술되었기 때문에 귀국의 연대와 동기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여주었다. 먼저 의상의 귀국 연대에 대해서 의상전교조에서는 670년이라고 한 반면, 부석사본비에서는 671년이라고 하여 1년 차이가 나는데, 어느 쪽이 정확한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의상전교조에서는 연대 표기에서 다소 혼란을 보이는 데 반하여 부석사본비에서는 연대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되었다는 점이 유의된다. 그러나 의상의 귀국 연대에서만은 의상전교조의 기록이 함형 원년과 아울러 경오년이라는 간지를 명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670년설이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음 귀국의 동기와 계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국내에서의 전승 자료가 모두 당의 신라 침공 소식을 알리려는 내용으로 서술된 반면에 중국측의 자료인 ‘송고승전’에서만은 불법을 전하려는 것으로 다르게 기록되었다. 국내 측과 중국 측의 입장차이로 이해되지만, 두 주장 모두 타당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본다. 의상은 원래 귀국하여 불법을 전하고 교화를 펼칠 뜻을 세우고 있었는데, 당의 신라 침공이라는 급박한 국가적 위기 상황이 급거 귀국케 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경주 낭산 사천왕사지 당간지주.  [문화재청]

의상이 귀국한 연대와 담당한 역할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 좀 더 정확한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 신라와 당의 양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함락한 때는 668년 9월21일인데, 공교롭게도 의상이 ‘일승법계도’를 지은 7월15일부터 약 2개월이 지난 뒤였고, 지엄이 입적하는 10월29일의 약 1개월 전이었다. 그런데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백제 영역의 점유를 둘러싼 나당전쟁이 전개됨으로서 삼국통일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원래 삼국통일전쟁은 648년 김춘추(뒷날의 태종무열왕)가 당에 가서 당 태종과 군사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 협정 내용의 골자는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다음 평양 이남의 백제 영역은 신라가 영유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은 협정을 위반해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지역을 점유하였을 뿐 아니라 계림도독부를 두어 신라 지역까지 지배하려고 하였다. 더욱이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 당장 소정방은 군사와 외교 양면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김유신·김인문·김양도 3인에게 백제 땅을 식읍으로 나누어 주겠다고 제의하는 등 신라의 지배세력을 분열시켜서 통치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는 공동의 강적 앞에서 나당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되면서 양군의 대립은 마침내 무력 충돌로 폭발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면서 당군의 축출을 기도함으로서 6~7년간의 나당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신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당군을 대동강 이북으로 축출하는 한편 대당외교를 전담하던 김인문 이외에도 김흠순·김양도를 급거 당에 파견하여 해명하는 등 군사와 외교,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구사하였다.

한편 648년부터 시작된 삼국통일전쟁은 고구려·백제·신라 사이의 항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 백제를 지원하는 왜, 그리고 고구려와 당의 분쟁에 개입한 거란과 말갈 등 동양 여러 세력의 개입으로 국제적인 성격의 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는 외교와 군사의 능력이었는데, 신라에서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역할을 분담하여 먼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에는 김춘추를 이어 아들 김인문이 대당외교를 전담하였고, 노령으로 출전하지 못한 김유신을 대신하여 그 동생 김흠순이 김인문과 함께 고구려 정벌군을 이끌었다. 특히 김인문(629~694)은 김춘추의 둘째 아들로서 7번이나 당에 들어갔으며, 당에 체류한 기간을 합하면 22년이 되었을 정도로 평생 대당외교에 전념하였는데, 668년 고구려의 멸망 뒤에는 당군을 따라 다시 당으로 돌아갔다. 669년부터 신라는 당군을 축출하면서 백제 영역을 점유하는 한편 김흠순과 김양도를 당에 파견하여 해명하였다. 급기야 674년 당은 문무왕을 폐위시키고 당에 머물고 있던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시키려고 한 적도 있었으나, 신라의 적극적인 외교로 당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김인문은 당에서 계속 체류하다가 694년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그리고 김인문의 대당외교를 도운 인물이 김양도(?~670)였는데, 그는 강수 등과 함께 6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서 6번이나 당에 들어갔고, 마침내 당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이었다. 김양도는 일찍이 660년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당장 소정방으로부터 김유신·김인문과 함께 백제 땅을 식읍으로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한 바 있으며, 668년 고구려 정벌전에 김인문·김흠순과 함께 참여하였고, 669년 백제 토지를 점유하면서 당에 해명하기 위해 사신으로 급거 당에 파견되었다가 다음해 장안에서 옥사하였다. 다음 김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으로 660년 백제를 멸망사킬 때 김유신을 도와 출전하였는데, 장렬한 사투로 신라군의 사기를 높인 반굴이 그 아들이었다. 661년 이후에는 백제의 부흥군을 진압하여 그 영역을 점유하였고, 668년 고구려 정벌전에는 김인문과 함께 신라군을 이끌었고, 669년에는 백제 영역의 점유 사실을 해명하기 위하여 김양도와 함께 당에 갔다가 다음 해 귀국하였다. 결론적으로 670년 의상을 급거 귀국시켜 당군의 신라 침공 소식을 본국에 알리게 한 인물들이 바로 당에 머물던 김인문, 그리고 사신으로 급파된 김흠순과 김양도 등 삼국통일전쟁의 주역들이었고, 반면 의상은 그에 부응하여 즉시 귀국, 왕에 알려서 토착신앙의 신성지역인 신유림에서 신인종의 문두루비법을 설행케 함으로서 민심의 결집을 이루게 하였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84호 / 2023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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