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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월〈중〉

기자명 법보신문

열두살짜리 동승을 큰스님으로 모셔


<사진설명>양산 내원사에 주석할 당시에도 혜월 스님은 손수 밭을 일궜다.

혜월스님은 그의 스승 경허선사를 그대로 빼어 닮은 듯 무심도인(無心道人)이었고 천진무구, 그 자체였다. 스님은 티없이 맑은 어린애를 지극히 좋아했고 끔찍이 사랑했다. 혜월스님이 팔공산 파계사의 미타암에 머물고 계실 때는 열두살짜리 동자승을 “큰스님”이라 부르며 아침 저녁 문안까지 드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출타할 적에도 반드시 동자승에게 “어디 어디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올릴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스님들이 하도 민망해서 왜 나이 어린 동자에게 ‘큰스님’ 대접을 하느냐고 따졌더니 혜월스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하시기를 좋아한 ‘개간선사’

“생각이 티없이 맑고 깨끗한 동자승이야말로 천진불(天眞佛)이니 그래서 큰스님이지.”
천성이 천진무구했던 혜월스님은 아이 뿐만 아니라 들짐승 날짐승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까마귀, 까치들도 혜월스님의 마음을 헤아렸던지 스님의 어깨 위에 내려 앉기도 하고 팔뚝에 앉아 스님이 주는 모이를 먹기도 했다.

혜월스님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를 철저히 지킨 스님이셨다.

1920 ~ 1930년대, 덕숭산의 만공스님은 사찰중창불사에 으뜸이요, 혜월스님은 개간(開墾)하는데 으뜸이라는 말이 퍼질 정도로 틈만 나면 스님은 괭이를 들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다. 비가 오거나 밤이 되면 스님은 짚신을 삼고 새끼줄을 꼬았고, 날이 개이면 괭이를 들고 땅을 팠다. 이렇듯 쉴틈없이 일을 좋아했고 농사를 즐겼던 스님은 자연히 절에서 소를 키웠고 지극정성으로 소를 보살폈다.

낮에 쟁기질이라도 시킨 날에는, 스님은 소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낀 나머지 맛있는 여물을 손수 쑤어서 푸짐히 먹이면서 소에게 말했다.

“우순(于順)아, 미안하다. 그대신 농사철만 지나면 편안히 잘 모실테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우순이 니는 이생에서 부지런히 잘 닦아서 요 다음 생에는 소의 몸을 벗어야 한다.”
스님은 늘 이렇게 소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을 나누었고 설법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스님이 금정산 선암사에 계실 적에 있었던 일이었다. 어느 날 밤, 절에 소도둑이 들어 스님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소 우순이가 사라져버렸다. 이른 새벽에 이 사실을 알게된 혜월스님은 절에 있던 모든 스님들을 깨워 소도둑을 잡도록 했다. 그리고 스님은 허겁지겁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절에 있던 스님들이 이 산, 저 산, 아무리 뒤져보았지만 소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산등성이에 올라간 혜월 스님은 두 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애절한 목속리로 소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와 대화하며 설법까지

“우순아 - 우순아 - 우순아 - ”
혜월스님이 소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해하자 옆에 있던 스님이 한마디 했다.
“아이구 참 스님은, 소가 제 이름을 어찌 어찌 알아먹겠습니까? 그만 하시고 내려 가입시더.”
“아니다. 우순이는 제 이름을 알아 먹는다. 우순아 - 우순아 - 우순아 --”
스님은 더욱 목청을 높여 우순이를 불렀다. 바로 그때였다. 저 산 아래쪽 계곡에서 “움머어~” 소 울음소리가 들여오기 시작했다.
“우순아 - 우순아 - ”
“움머어 - 움머어 - ”
“봐라. 저 아래 골짜기에 우순이가 있다!”
소를 찾던 젊은 스님들이 소 울음소리가 들려온 계곡으로 우루루 쫓아 내려갔다. 절에서 키우던 소 우순이를 끌고 가던 소도둑은 소를 소나무 기둥에 묶어둔 채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우순이가 “움머어 - ” 울어대는 바람에 소재가 발각되어 꼼짝없이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젊은 스님들이 소도둑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했다. 혜월스님은 젊은 스님들을 가로 막았다.

“소를 찾았으면 됐지 사람을 왜 패느냐?”
스님은 소도둑을 일으켜 세워 어디 다친대는 없느냐고 위로까지 해준뒤 어서 달아나라고 길을 열어 주었다.

무심도인 혜월스님은 소를 무사히 찾은 것만 반가웠을 뿐, 도둑에 대한 미움이나 처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토록 일을 즐겼고 농사 짓는 것을 좋아했던 혜월스님은 양산의 내원사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여전히 또 ‘개간선사(開墾禪師)’였다. 조실스님이 틈만 나면 괭이를 들고 땅을 파시니, 자연 그 절에 있던 젊은 스님들도 별수없이 호된 대중울력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혜월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고된 울력을 시키면서도 먹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보리밥에 된장, 간장, 시레기국이 고작이였다. 조실인 혜월스님은 평생토록 그 정도면 대만족이었지만, 한창 나이의 젊은 스님들은 그런 부실한 공양만으로 고된 울력을 감당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월스님이 절을 비우고 부산에 나가셨다. 바로 그날, 고봉(高峰)이라는 젊은 스님이 몇몇 스님들과 작당하여 혜월조실스님이 애지중지 키워온 소를 끌고 내려가 양산시장에 내다 팔아버렸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곡차를 마시고 절로 돌아와 뭉칫돈을 원주에게 내놓으며 대중공양에 맛있는 반찬을 장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덕분에 내원사 대중들은 오랜만에 푸짐한 반찬에 그야말로 멋진 공양상을 받아먹게 되었다.

“내가 찾는 건 송아지가 아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부산에 출타하셨던 조실 혜월스님이 내원사로 돌아와 보니 그토록 애지중지 키워온 소가 없었다.

혜월스님은 “누가 내 소를 어디로 가져갔느냐, 당장 내 소를 찾아오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대중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때, 소를 팔자고 제안했던 고봉이 느닷없이 옷을 홀랑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조실스님 방으로 들어가더니 ‘음메에... 음메에...’ 하면서 송아지 울음소리를 내며 방안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혜월스님은 단박에 고봉이 저지른 일임을 알아차리시고 고봉의 발가벗은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이 녀석아, 내가 찾는 소는 어미소지, 너같은 송아지가 아니다.”
그 한마디로 그만이었다. 더 이상 소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나이든 무심도인과 아직 젊은 무심도인. 그분들은 그렇게 말없는 큰 가르침을 주고 받았다.

윤청광〈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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