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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4념처명상과 담마 테라피

기자명 일중 스님

담마를 통한 심신과 심리 치유

묵은 업도 소거해 중생 청정
마음 본성 통찰해 고뇌 극복
몸 고통도 어느 순간 사라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명상

위빠사나명상은 통찰명상, 지혜명상, 관찰명상이다. 즉 찰라생·찰라멸하는 몸과 마음의 모든 현상을 예리한 마음챙김으로 관찰하여 통찰과 지혜를 얻는 명상이기 때문이다. 사마타명상이 현재 의식에서 작용하는 탐진치 번뇌들을 다루고 제거한다면, 위빠사나명상은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된 미세번뇌와 무명을 다루고 제거한다. 그래서 위빠사나명상은 지혜로써 무명을 밝히고 열반과 깨달음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지난번에는 ‘대념처경’ 제목의 의미를 짚어보았는데, 이번에는 ‘대념처경’ 서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부처님은 대념처경 서문에서 법의 핵심 메시지를 아주 간결한 문구로 그러나 확정적인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이 길은 유일한 길(道)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옮은 방법을 터득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그렇다. 4념처 명상이 ‘유일한 길(ekāyano maggo)’이라고 했고, 그 길이 무엇을 위한 길인지 이어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어떤 의미에서 4념처 명상을 ‘유일한 길’이라고 했을까. 다른 수행법들은 예외로 해야 한다는 말일까. 그런 의미와 뉘앙스는 아니다. 다만 사띠(正念)와 삼빠자나(正智)를 최대치로 계발하는 4념처명상의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아니라 한 길이라는 것, 무리 지어서 왁자지껄하게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니고 혼자서 가는 길이라는 것, 뛰어나신 세존 그 한 분이 가르친 수승한 길이라는 것 그리고 열반인 하나로 가는 길이기에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고 주석서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럼 유일한 길인 4념처명상을 닦는 이유와 목적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의미가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반복을 통한 강조의 의미로 해석을 하면 좋을 것이다. 

첫째, 4념처명상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것’이라 했다. 탐진치, 무명과 갈애 같은 번뇌 때문에 인간은 생사윤회를 반복하며 고통받는다. 그런데 4념처 명상을 하게 되면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와 오염원들을 새롭게 만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묵은 업들까지 소거시켜 중생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둘째, 4념처명상은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함’이라고 했다. 근심과 탄식이란 슬픔이나 비탄, 고뇌와 절망 등의 정신적 괴로움이다. 이런 고통스런 감정과 느낌을 인간은 수시로 느끼고 겪는다. 그런데 4념처 명상을 통해 느낌이나 감정, 마음과 생각의 본성을 무상·고·무아로 통찰하여 궁극적으로 정신적 고뇌들을 다 극복하게 된다. 

셋째, 4념처명상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한다’고 했다. 인간은 생로병사 등 다양한 육체적 고통을 경험한다. 그러나 명상을 통해 몸을 조복받고 정신적 희열이나 행복감이 일어나면 몸의 고통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극복이 된다. 명상은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육체적 고통도 사라지게 한다. 

넷째, 4념처명상은 ‘옳은 방법을 터득하게 한다’고 했다. 옳은 방법이란 8정도를 의미한다. 4념처 명상을 한다는 것은 8정도와 계정혜 3학을 통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는 의미이기에 궁극적으로 출세간의 8정도를 터득하게 된다. 

다섯 번째, 4념처명상은 ‘열반을 실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열반(涅槃)은 출세간 도과(道果)의 마음이고 최상의 행복이라고 불리는 무위법(無爲法)의 경지이다. 부처님이 45년간 법을 설한 이유도, 제자들이 한평생 수행을 하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열반을 증득하기 위함이다. 열반을 증득할 때가 바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고 견성의 순간이며, 범부종성에서 성자 종성, 부처님 종성으로 변환과 전환이 일어나는 중요한 시점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대념처경 서문의 이 내용에 대해 ‘담마테라피(Dhamma- Theraphy)’라고 했다. 4념처명상이 담마(法)를 통한 심리치료, 심신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근본적인 치료이자 궁극적인 치유이다.
 
일중 스님 동국대 강사  satiupekkha@hanmail.net

[1685호 / 2023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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