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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승의 희생’ 외면하는 대한민국

기자명 명오 스님
  • 법보시론
  • 입력 2023.06.26 14:41
  • 수정 2023.06.26 14:49
  • 호수 1686
  • 댓글 9

고대 인도,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국 비유리왕은 군사를 일으켜 카필라국을 향했다. 부처님은 그 소식을 듣고, 국경 지역의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멀리서 부처님을 본 비유리왕은 수레에서 내려 부처님께 공손히 예배했다. 왕은 부처님께 가지와 잎이 무성한 좋은 나무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이 메마른 나무 밑에 앉아 계시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친족의 그늘이 그래도 바깥사람보다 낫다”고 답했다. 석가종족을 지키기 위한 부처님의 뜻을 알고 비유리왕은 카필라국 정벌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본국의 멸망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부처님은 이렇게 코살라국의 침공을 세 번이나 막아냈다. 그렇지만 비유리왕은 끝내 카필라국을 침공해 석가족을 참혹하게 도륙했다. 자신의 나라, 자신의 종족이 몰살당하자 부처님은 심한 두통을 느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발우에 가득 물을 떠 오게 했다. 그 물을 이마에 뿌리자, 마치 달아오른 쇳덩이에 물을 뿌린 것과 같이 연기 나며 소리 내 끓었다. 

부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경전 이야기이다. 비유리왕은 석가족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에 차 침략했고, 부처님은 전쟁을 막고 무수한 생명을 구하고자 몸소 나섰다. 땡볕에 홀로 앉아 강력한 반전시위를 한 셈이었다. 나라를 잃고 동족이 없는 것을 뙤약볕에 비유해 화평을 역설했다. 그렇게 호전적인 비유리왕을 세 번이나 돌려세웠다.

부처님의 정신은 한국불교에서도 잘 나타났다. 스님들은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수행자인 동시에 한민족의 일원임을 호국불교로 증명해 왔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부터 승군, 승병이 있었다. 거란족·여진족·몽고·왜구 등 외세의 침략과 전쟁에 수시로 나섰다. 심지어 국가가 불교를 모질게 탄압했던 시대에도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나라의 백성들이 무참히 도륙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님들은 목숨을 걸고 앞장섰다. 나라와 동포는 땡볕을 막아주는 그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에 분연히 일어났다. 

조선의 최대 난국에서 불교는 크게 빛났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는 73세의 노령으로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거병했다. 조정 대신들은 당쟁 속에 헤매고 군관들은 전선에서 도주하는 치욕스러운 현실에 구국을 독려했다. 조국이 사라지고 백성이 괴로운데 홀로 살아남는다면 중생을 구제해야 할 수행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임을 일깨웠다. 사명대사는 장군이자 협상가이며 영웅이었다. 승리로 이끈 전장들은 물론, 조선이 배제된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 그리고 일본 에도막부와의 협상에서 보인 탁월함은 경외심을 일으켰다. 일본에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3000명을 환국시킨 것도 사명대사였다. 영규대사는 최초의 의승장이었다. 그가 이끄는 800의승은 조헌의 700의병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왜군의 호남 진입을 저지할 수 있었다. 

승병들은 불살생계를 범한 것을 참회하고, 임란에서 죽은 모든 생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선의 논공행상에서 승병들은 철저히 제외되었다. 전사자를 기리는 의식에서도 의승 전사자는 외면받았다. 금산전투에 대해서도 의병 전사자만 수습해 700의총을 만들고, 의승 전사자 800명은 외면받았다. ‘억불숭유’ 조선은 의승의 희생조차 억불의 굴레 아래 묻어버렸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헌신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국가가 그들을 존경하고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누구에게 애국과 충성을 요구할 수 있을까. 그들의 희생을 추모하지 않았던 옛 시대의 잘못을 바로 잡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조선과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겠나. 이제라도 대한민국은 승병의 희생과 그들의 호국정신을 기려야 한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구함이 불법(佛法)이었던 의승들을 이제는 기억하고 그들의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

명오 스님 sati348@daum.net

[1686호 / 2023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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