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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친구의 ‘도장깨기’

복싱 체육관에서 ‘도장깨기’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알아보니 일본에서는 제법 역사가 있는 뒷골목 용어인 모양이다. 뭐 그렇다 치고. 요즘에는 방송용어로도 흔하게 사용되는 핫(hot)한 유행어가 된 듯하다. 장윤정의 도장깨기나 지역 맛집 도장깨기란 프로그램도 있으니까 말이다. 재밌는 것은 도장깨기가 선객들이 서로의 공부 머리를 가늠해보던 이른바 ‘법거량’과 정확하게 같은 취지의 말이라는 점이다. 힘으로 누가 더 센지를 겨뤄보는 것이나 말로 누가 더 깨쳤는가를 시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얼마 전에 당한 사회적 도장깨기의 후유증 때문이다.

생김새마저 가물가물한 어느 고향 친구의 느닷없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을지가 궁금할 정도로 전혀 뜻밖이었다. 워낙 성실하고 공부도 잘했던 친구라서 남들보다 성공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48여년만의 직접 대화. 무조건 반가웠고 긴말은 따로 필요 없었다. 우린 고향 친구였으니까. 통화가 끝날 무렵 한번 찾아오겠다고 하길래 인사치레로 그냥 하는 소리인가보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다시 내가 있는 연구실 위치를 묻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어릴 적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는 듯한 반백의 중년 신사가 들어왔다. 우리는 두 손을 맞잡고 한참이나 흔들다가 자리에 앉았다.

친구는 아들과 딸 둘을 뒀고 강남에 산다고 했다. 나는 아들이 하나 있고 일산에서 출퇴근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아들이 뭐하냐고 묻길래 외국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말해줬다. 그의 아들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며 은근히 목소리에 힘을 넣는 눈치였다. 너는 어떤 일을 하느냐고 슬쩍 떠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문분야를 살려 전기설비업체를 창업했고 시절 인연을 제대로 만나 꽤 많은 돈을 벌었다는, 뉘앙스의 말을 중저음의 묵직한 톤으로 아주 세련되게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더니 다른 고향 친구들을 만난 후일담을 조곤조곤 들려주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누구누구는 어떻게 살고, 또 다른 아무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지낸다는 등등…. 나보고 정년이 언제냐고 묻길래 1년 남았다고 했더니 퇴직 후엔 뭐 할 거냐고 물었다. 굳이, 기어코. 나는 즉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고. 친구는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겼다는 말과 함께 여생은 주식지분이나 관리하면서 속 편하게 살 계획이라고 했다. 돈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투로. 부러우면 진다고 했던가, 드러내놓고 부러워하지도 못했다. 그날 우리는 학교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앞으로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는 다짐의 말을 서로에게 건네면서. 

이튿날 아침 나는 자네가 너무 자랑스럽다는, 내 딴엔 정성을 가득 담은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도록 일언반구 답장 한마디가 없다. 그러던 어느날 체육관에서 무심코 샌드백을 두드리다가 문득, 내가 바로 말로만 듣던 그 도장깨기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응답이 없는 이유도 저절로 풀렸다. 그는 나를 도장깨기하러 왔던 것일 뿐. 지금쯤 그 친구는 동향 출신 중에서 본인이 가장 잘나간다는 자부심에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타켓이 된 도장을 찾아다니며 관장이나 제자들을 쓰러뜨리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뒷골목 도장깨기 선배들이 그랬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고향 친구의 성공담에다 기꺼이 ‘좋아요’를 아낌없이 눌렀다. 고향 친구의 성공은 곧 나의 기쁨이기도 했으므로.

부모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운 사람들과 시공간을 공유하는 고향은 누구에게나 가슴 먹먹한 밤하늘이다. 그래서 더 그랬던가 보다. 고향의 옛친구에게 영문도 모른 채 의문의 일패를 당했다는 섭섭한 마음에 얼마간 우울했었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했고. 그래도 친구야,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는 말은 꼭 전해 주고 싶구나. 진심이고 말고다.

허남결 교수 hnk@dongguk.edu

[1686호 / 2023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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