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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55)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11)

의상 스님은 귀족적인 불교와 거리 두며 청빈한 수행자로 일관

당의 침공 알리려 귀국했으나 세속적인 사건 참여에는 소극적
세 벌 옷과 물병‧발우만을 소유하며 평생 제자 양성에만 나서
문무왕의 토지와 노비 보시 거절…교단운영 탁발에 의지 밝혀

영주 부석사 전경. 의상 스님은 여러 곳을 떠돌다 문무왕 16년 태백산 부석사를 창건해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법보신문 DB] 
영주 부석사 전경. 의상 스님은 여러 곳을 떠돌다 문무왕 16년 태백산 부석사를 창건해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법보신문 DB]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하였는데, 마침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이 전면적인 전쟁으로 폭발하는 위기 상황이 발생, 당군의 해상 침공 계획을 본국에 전해주기 위하여 급히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당군 침입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는 가운데 불교적인 면에서는 밀교계통인 신인종 승려인 명랑의 문두루법(文豆婁法)으로 당군의 격퇴를 기원하였고, 다음 해에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기원하였다. 

   처음 당군의 침공 사실을 전해왔던 의상은 그 기원 법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상에게 당의 침공 계획 정보를 갖고 급거 귀국케 하였던 김인문·김흠순·김양도 등 3인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뒤이어 외교와 군사 양면을 주도하였는데, 의상과의 밀접한 관계가 계속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의상의 귀국 이후 문무왕 16년(676)까지 7년 동안 신라와 당 사이에는 육상과 해상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는데, 전쟁에 관련된 의상의 활동 사실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의상은 귀국 이후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교화 활동에만 전념하면서 문무왕의 각별한 호의와 지원을 받았으면서도 정치권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고, 세속적인 사건 참여에는 소극적 자세를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의 스승 지엄이 만년인 659년을 전후해서 종남산 지상사에서 장안의 운화사와 청정사로 옮겼을 때 황족인 패왕(沛王) 현(賢)의 강주가 된 것 이외에는 자기의 수행과 제자의 양성으로 인생의 태반을 보냈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한편 밀교의 문두루법을 설행한 명랑은 신라 중고기 왕권을 상징하는 황룡사9층탑을 창건케 하였던 자장의 생질이었다. 자장의 누이인 남간부인(南澗夫人,法乘娘)에게는 세 아들이 있어 모두 출가하였는데, 국교(國敎)·의안(義安), 신인종의 명랑 등이었다. 명랑이 문두루법을 설행한 자리(神遊林)에는 뒤에 사천왕사가 설립되어 통일 직후 대표적인 호국사찰이 되었다. 그리고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불교정책의 자문과 교단의 관리를 담당하는 승직으로 정관대서성(政官大書省)을 설치하고, 문무왕 9년(669)에 신혜(信惠) 14년(674)에 의안(義安)을 연이어 대서성에 임명하였는데, 의안은 바로 명랑의 형이었다. 또한 신라와 당의 외교사절에는 승려들이 참여하기도 하였고, 두 나라의 군대에도 승려들이 소속되어 전령이나 군사 자문, 때로는 첩자 역할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문무왕 9년(669) 정월 당의 승려 법안(法安)이 당 황제의 명으로 신라에 자석을 요구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평양에 머물던 중 다음 해 신라로 귀부하려던 고구려 부흥군을 이끌던 검모잠(劍牟岑)에게 당의 다른 관리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승려 임윤(琳潤)은 문무왕 11년(671) 대당총관 설인귀가 신라군의 당군 공격을 항의하는 서신을 문무왕에게 가져오는 전령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의 법안과 신라의 임윤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당 전쟁 가운데 승려들이 수행한 군사나 외교 분야에서의 역할은 다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세기 후반 신라 불교계에는 문무왕의 측근 가운데 문무왕으로부터 다음 대의 신문왕에게 국사(國師)로 책봉할 것을 유언 받고, 귀족적인 생활을 즐기다가 관음보살의 현신으로부터 경책받았다는 설화를 남긴 유식학승 경흥(憬興), 문무왕으로부터 사후에 호국 대룡이 되겠다는 유언을 들은 지의(智義), 문무왕의 누이인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거사 신분으로 무애한 교화행을 전개한 원효 등 실로 다양한 모습의 승려들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계에서 유독 평생 성실한 수행자로서 제자를 양성하여 교단을 조직하고, 청정한 교단 운영의 모범을 보인 의상은 다소 이색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원효도 의상과 함께 새로운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은 평생 도반의 관계였으면서도 행적과 사상 면에서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음이 주목된다.

의상의 수행과 교화, 제자 양성과 교단 조직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실들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서술한 ‘송고승전’ 의상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이 편리하다. ‘송고승전’에서는 우선 의상의 근엄 성실한 수행 자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의상은 말한 대로 행동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강의하고 교화하는 시간 이외에는 수행하고 시방세계를 장엄하는 데 힘썼는데, 덥고 춥고를 꺼리지 않았다. 또한 항상 의정(義淨)의 세예법(洗穢法)을 행하여 수건을 사용하지 않고 선채로 마르기를 기다렸다. 삼법의(三法衣)와 물병·발우를 지니는 것 외에는 일찍이 어떤 다른 물건도 소유하지 않았다.” 이로써 의상은 언행이 일치하였고, 세벌의 옷(僧伽梨·鬱多羅僧安陀會)과 물병·발우 등 세 가지의 필수 지물만을 소유한 청정한 수행자였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한 수행자로서의 자세가 뒷날 토지와 노비를 희사하겠다는 문무왕의 제의를 거절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근엄 성실한 수행자상이 남녀 사이의 연모의 정을 순수한 불심으로 승화시켜 한 여인으로 하여금 호국대룡(護國大龍)으로 변신케 하였다는 아름다운 선묘설화를 탄생시키는 신앙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위 인용문 가운데 의정(635~713)은 계율종 도선의 제자로서 671년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는데, 그 앞서 도선과 교류하던 의상과 직접 만났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그의 세예법은 니까야 경전이나 비나야율 등의 경론에서 인도 고대 수행자의 목욕법으로 기술되어 있음을 보아 수행자의 목욕법으로 널리 시행되어 왔던 것 같다.

다음 의상이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던 사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여러 제자들이 가르침을 청해 오면, 의상은 급히 서두르지 않고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린 다음에 계발해 주었는데, 의문에 따라서 막힌 것을 풀어주어 반드시 미진한 것이 없게 하였다. 이때부터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는데, 마음에 들어서 지팡이를 세워놓고 머물면, 배우는 무리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진을 쳤다. 어떤 이는 붓을 잡고 큰 띠(紳)에 쓰고, 어떤 이는 벼루를 쥐고 조목별로 기록(札葉)하였으니, 초기(抄記)하는 것이 (경전을) 결집하는 것과 같았고, (조목별로) 기록하는 것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하여 (기록된) 의문(義門)을 (기록한) 제자에 따라 제목을 삼았으니, 예를 들면 도신장(道身章)이 이것이었다. 혹은 (강의한) 처소에 따라 이름을 삼았으니, 예를 들면 추혈문답(錐穴問答)과 같은 것이다. 여러 장소(章疏)들은 모두 화엄의 성해(性海)와 비로자나의 무변(無邊)함과 경전의 의례(義例)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의상은 제자들을 열심히 교육한 결과 수많은 제자들이 모였으며, 제자들에 의해 그의 화엄 강의 내용이 기록되었는데, 기록한 제자의 이름이나 강의 장소의 이름을 책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간명하게 전해주었다. 또한 ‘송고승전’ 의상전에서는 의상이 강의를 통하여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의상의 강의는 나무에 꽃이 피게 하였고, 의상의 말씀은 나무 덤불(叢)에 열매를 맺게 하였다. 당에 올라 심오한 뜻을 깨달은 제자가 지통·표훈·범체·도신 등 여러 명이었다. 모두 큰 알껍데기를 깨고 날아오른 금시조(迦留羅鳥)라고 할 만하였다.” 의상의 강의를 들은 문도들이 번성하였음을 말하고, 그 제자들 가운데서 특히 4인의 이름을 들고 있는데, 의상의 문도들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검토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의상은 문무왕 10년(670) 귀국한 이후 처음에는 출가 본사인 도성의 황복사(皇福寺)를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강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법계도기총수록’ 권상에서는 “문무왕 14년(674)에 황복사에서 표훈과 진정 등 10여인의 제자들이 의상을 따라 ‘법계도인’을 배우고 있었다”고 하며,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는 황복사에서 의상이 제자들과 함께 탑돌이하였다는 사실 등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의상은 이곳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여러 곳을 떠돌았던 것으로 보이며, 마침내 문무왕 16년(676)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화엄의 근본 도량으로 삼고 주석하였다. 

그런데 이 해는 7~8년간의 나당전쟁에 승리하여 사실상 삼국통일을 완성한 시점이었다. 삼국통일이 완성된 것을 계기로 하여 의상은 중앙의 정치권력과 거리를 두면서 지방에서 새로운 교단의 발전을 모색하였던 것 같다. ‘송고승전’ 의상전에서는 부석사의 창건설화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의상이 신라에 돌아온 이후 산천을 두루 돌아다녔다. 고구려나 백제의 풍진이나 우마(牛馬)가 미치지 못하는 땅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 가운데는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여 참으로 법륜을 굴릴 만한 장소이다. 그런데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가 가히 500여명이나 되니 어찌한단 말인가?’ (선묘룡의 신변으로) 여러 승려(群僧)들이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의상이 마침내 절에 들어가 ‘화엄경’을 널리 펼쳤다. 겨울에는 산의 남쪽에서, 여름에는 산의 북쪽에서 강의하니,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찾아오는 자가 많았다.” 의상이 전법의 근본도량인 부석사를 창건하고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여 화엄종을 창립하게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한 것인데, 특히 부석사가 소재한 영주 지역은 일찍이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비롯한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던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10찰의 문제는 10대 제자를 비롯한 문도의 문제와 함께 다시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의상으로 하여금 태백산에 화엄의 근본 도량을 개설케 하고, 문도들이 크게 번성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문무왕은 단월의 역할을 자임하였다. ‘송고승전’ 의상전에서는 그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국왕이 의상을 흠모하고 중히 여겨 전장(田莊)과 노복(奴僕)을 보시하자, 의상이 왕에게 말하였다. 우리 법은 평등하여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모두 균등하고, 신분이 귀하거나 천하거나 똑같습니다. ‘열반경’에서 팔부정재(八不淨財)를 말하였거늘, 어찌 전장을 소유하며 노복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를 집으로 삼고 탁발로 농사를 지어 익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법신의 지혜는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문무왕은 즉위 4년(664)에 함부로 재화와 전지를 불사에 희사함을 금하는 영을 내려 사원의 경제력 증대를 억제하려고 한 바 있었는데, 의상에게 전지와 노비를 시납하겠다고 한 제의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교단의 구성원은 평등한 관계이고, 경제생활은 탁발에 의지하겠다는 의상의 거절 사유는 부처님 당시 인도 초기불교 교단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의 현실, 또한 왕실과 귀족들의 시주를 받아 도성의 대찰에서 귀족적인 생활을 즐기던 당시 불교계 상황에 비춰볼 때, 의상의 무소유의 청빈한 생활과 함께 교단 구성원의 평등한 관계, 전장과 노복의 소유 사양, 그리고 교단의 운영을 탁발에 의지하겠다는 의지 등의 사실은 의상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초기 화엄종 교단의 사회적 성격을 재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보이는, 문무왕 21년(681) 경성의 신축 공사 중지를 건의하여 관철시켰다는 의상의 행적도 아울러 유의할 만한 사실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86호 / 2023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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