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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16세기 사찰의 불서간행

기자명 민순의

전란 없이 성장한 경제, 불교 활성화로 이어져

15세기 왕실이 발행한 불서, 16세기 들어 사찰이 간행 주체
기초지식 없이 출가한 피역인 교육 위해 출판 수 비약 추정
내원당 확대도 영향…승정제 폐지 이후 활발한 간행 원동력

충남 보원사는 16~17세기 다량의 불서가 간행된 지역 거점 사찰이었다. 오늘날 개심사에 소장된 불서 중 다수가 보원사에서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1571년 보원사에서 목판 인쇄한 ‘영산회상변상도'
충남 보원사는 16~17세기 다량의 불서가 간행된 지역 거점 사찰이었다. 오늘날 개심사에 소장된 불서 중 다수가 보원사에서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1571년 보원사에서 목판 인쇄한 ‘영산회상변상도'

16세기에 들어 불교서적의 간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국가나 왕실에서 주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사찰에서 이루어진 간행이었고, 그 지역적 범위는 전국을 아울렀다.

15세기에도 불서(佛書)의 간행은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천혜봉이 정리한 ‘조선전기 불서판본’(‘한국서지학연구’, 삼성출판사, 1991)에 따르면 15세기에는 국가와 왕실에서 간행한 불서가 목판본 57판종과 활자본 27판종 등 총 84건으로 확인된다. 한편 박상국은 현전하는 불서를 정리한 ‘유간기불서목판본목록’(‘전국사찰소장목판집’, 문화재관리국, 1987)에서 같은 시기 사찰에서 간행한 불서를 목판본 64판종으로 보고하고 있어, 이 두 자료를 비교하였을 때 관판(官版)·왕실판(王室版) 불서가 사찰판(寺刹版)보다 더 높은 비율을 점유했던 것으로 파악된다.(손성필, ‘16세기 사찰판 불서 간행의 증대와 그 서지사적 의의’ ‘서지학연구’ 54, 2013에서 재인용.) 그런데 16세기가 되자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관판・왕실판 불서는 더 이상 간행되지 않았고, 대신 사찰에서 간행되는 불서가 현전하는 것으로만 300판종을 상회하는 것으로 헤아리게 되었다. 물론 사찰의 불서 발간에 왕실 인사의 발원이나 보시가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간행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사찰이었다.

16세기 사찰판 불서의 간행 회수를 시기별로 들여다보면 더욱 흥미로운 추이가 발견된다. 먼저 중종 재위기 39년(1506~1544) 중 전반기 20년 동안에는 15판종이 간행되었으나, 재위 후반 19년과 인종이 재위한 1545년까지 무려 70판종으로 간행 수가 치솟았다. 이후 명종 재위기(1546~1567)에 73판종의 불서가 간행되어 중종 후반기부터의 추세를 이어가다가, 선조가 즉위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해까지(1568~1591)는 무려 138판종이나 간행되어 비슷한 기간인 명종 재위기에 비해 배에 가까운 사찰판 불서가 간행되었다.

명종 대는 대비인 문정왕후의 지원과 보우 스님의 활약으로 중종 대에 폐지되었던 각종 승정(僧政)이 복구된 시기였으므로 15세기에 비해 사찰에서 불서 간행이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정작 승정이 폐지되어 나갔던 중종 대에 사찰판 불서 간행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경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사찰에서는 어떠한 목적으로 그 많은 불서를 간행했으며, 또 그 사업에 소용되는 인적, 물적 자원은 어떻게 마련했던 것일까?

앞선 호의 글에서 세조 10년(1464) 군역제도가 개편되어 군역의 부담이 커지자 이를 이기지 못하고 달아난 사람 중 다수가 스님이 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거론한 바 있다.(32호. ‘성종 대 피역인(避役人)의 출가 경향’.) 또 성종 말부터 도첩의 발급이 원활하지 않다가 중종 11년(1516) ‘경국대전’의 ‘도승(度僧)’ 조항의 삭제로 도첩과 승과의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으나, 이것이 피역인들의 출가 경향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으리라 추정하였다. 도첩과 승과는 국가 공인승의 양성과 그들의 행정적 활용에 목적이 있었기에 공인 사찰 이외의 지역 사찰에 출가하는 것이 국가제도의 폐지로 제약받을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종 후반기 전국의 사찰에는 적지 않은 스님이 거주하며 수행과 교화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을 터. 다만 군역을 피하여 스님이 된 이들은 학문적 소양이 깊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에 이들을 위한 기초적인 학습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한편 개국 후 큰 전란을 겪지 않은 조선은 신분 간 또는 개인 간 빈부의 격차는 있었을지언정 사족뿐 아니라 민간 계층에서도 종교적 활동을 영위할 정도의 경제적 총량을 보유하게 되었다. 예종과 성종 대에 생업을 버리고 염불과 범패 등 종교 활동에 헌신했다고 묘사되는 사장(社長)의 출현이나, 중종 대에 “근일 이래로 두세 승니(僧尼)가…산중에 있는 절에 출입하면서 쌀과 재물을 많이 가져다가 재승(齋僧)을 공양하고, 당개(幢蓋)를 만들어 산골에 이리저리 늘어놓고 또 시왕(十王)의 화상을 설치하여 각각 전번(牋幡)을 두며, 한 곳에 종이 100여 속(束)을 쌓아두었다가 법회를 설행하는 저녁에 다 태워 버리고는 ‘소번재(燒幡齋)’라고 부릅니다.”(‘중종실록’ 34권, 13년 7월 17일)라고 하며 영산재의 전신으로 보이는 불교 의례의 양상이 강원도에서부터 보고되는 것 등은 모두 전국적으로 불교 의례가 활성화되어 가던 시대 분위기와 함께 그 실행을 위한 경제력이 이 시기 조선 사회에 갖추어져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16세기에 다량의 불교서적을 간행한 것으로 두드러진 사찰로는 황해도 귀진사(歸眞寺), 평안도 보현사(普賢寺), 경상도 신흥사(神興寺), 경상도 광흥사(廣興寺), 전라도 안심사(安心寺), 충청도 보원사(普願寺) 등이 있다. 

그런데 특히 명종 대의 본격적인 승정제 복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들 사찰에서는 ‘법화경’(광흥사 1527, 귀진사 1535, 안심사 1545, 신흥사 1545), ‘금강경’(광흥사 1530), ‘미타경’(광흥사 1525), ‘지장경’(신흥사 1537), ‘원각경’(보현사 1545), ‘수능엄경’(신흥사 1527) 등 대중적인 대승불교 경전과 ‘부모은중경’(귀진사 1548) 등이 간행되고 있어, 스님의 교육과 신도 법회를 위한 기본서가 요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신흥사에서 간행된 ‘승가일용식시묵언작법’(1531)과 ‘시식의문’(1550), 그리고 광흥사에서 간행된 ‘북두칠성공양문’(제반문, 1534),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1538),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1538) 등은 이 시기 지방 사찰별로 약진하는 불교 의례의 흥성을 잘 보여준다. 한편 이렇듯 다량의 불교서적 간행을 주도했던 사찰들이 전국적으로 비교적 고르게 분포된 데에서 사찰판 불서 간행을 요하는 교육 및 의례의 필요성이 전국적으로 제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이들 사찰이 각 지역의 출판 거점 사찰로 기능했을 가능성도 추정케 한다. 이후 명종 대 승정의 복설과 내원당의 전국적 확대는 불사를 위한 인적, 물적 인프라의 전국적 확대에 크게 기여하여, 명종 대 불서 간행이 중종 후반기와 동등한 수준으로 지속될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 대에 다시금 승정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더욱 활발한 불서 간행을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86호 / 2023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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