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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오온 공한 도리는 실제

기자명 혜민 스님

13. 생로병사를 넘어서는 법

무아‧오온이 공함을 삶과 다른
이상적인 목표로 느끼면 안 돼
있는 그대로 볼 때 깨달음 생겨
무엇을 해서 새로 얻으려 말라

‘법화경’의 ‘상불경보살품’을 보면 위음왕 부처님께서 성문들에게 사성제를 가르치시어 생로병사를 넘어 구경열반에 이르게 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오늘은 도대체 우리가 어떤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생로병사를 넘게 되는지 부족하지만 내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면서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우선 많은 분들이 처음 부처님 법을 배우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나 열반이라는 궁극적인 실상의 이야기가 참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절에 다니면서 다들 외우게 되는 ‘반야심경’에도 보면, 관자재보살님께서 오온이 공한 것을 보시고 온갖 고통을 건너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이 이야기 역시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 실제 삶이 그럴 수도 있다고는 잘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무아에 대한 깨달음이나 오온이 공한 것을 보는 것이 절에 다녀도 보통 사람인 나와는 별 상관없는 머나먼 이상적인 목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문제는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나에게 무한한 괴로움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여기에 치이고 저기에 치이면서 깨달음은 모르겠지만 제발 지금 느끼는 심적 괴로움으로부터 좀 편안해 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찾게 된다. 특히 괴로움의 강도가 심하거나, 아니면 삶이 좀 나아져도 항상 나를 따라오는 불만족스러운 이 느낌으로부터 좀 해방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무늬만 불자였던 자신이 좀 더 진중한 불자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수행을 해야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의 깨달음, 열반의 해방감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많은 노력을 하게 되는데 나의 경우도 보면 대학생 시절부터 깨달음이란 것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참 많이 한 것 같다. 기도 독경도 많이 하고, 절도 많이 하고, 티베트 밀교 수행법이나 쿤달리니 각성 체험, 내면의 소리와 빛을 보는 수행이나 간화선 수행을 간절하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체의 신비로운 체험들이 오래가지 않고 무상하다는 점이다. 독경 기도 중에 보살님들이 오시는 것도, 쿤달리니가 열려 몸 안과 밖이 빛의 에너지로 가득한 것도, 천상에서 들리는 내면의 음악 소리도, 간화선 수행 중 밑동이 쑥 빠져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시원 청정한 온 우주와의 일체감도 모두가 다 무상했다. 

왜냐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새로 생겨난 것은 연기된 것이기에 인연과 조건이 변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즉 내가 찾는 것은 연기된 어떤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다. 더불어 노력을 해야지만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생각은 마구니 같이 아주 어리석은 가르침이었다. 오히려 모든 추구하는 마음이 다 쉬었을 때 연기하지 않는, 생로병사에서 벗어난 무아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지, 내가 노력을 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려는 마음으로 수행을 한다면 천년만년을 해도 완전 헛수고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로 무아의 진리라든가, 오온이 공한 도리는 이미 실제이기 때문이다. 애를 쓰고 노력해야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체 추구하는 마음을 쉬었을 때 실상이 무아이고, 모든 상의 실체가 없는 공성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일어난다. 즉 지금 이미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에서 깨달음이 생기지, 내가 무언가를 해서 그 결과로 새롭게 얻게 되는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렇다면 애쓰지 않았을 때 생로병사에서 벗어난 실상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과연 무엇일까? 애쓰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분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력을 들인다는 것은 지금 이대로는 아직 아니라는 분별을 하고 있는 것이고, 좀 더 나은 것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것, 나쁜 것, 옳은 것, 틀린 것의 모든 분별을 다 쉬고, 마음이 아무런 기대 없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평범한 세상을 조용히 봐 보자. 세상이 여러 가지 대상들로 나뉘어 보이는가 아니면 각각의 실체가 없는 텅 빈 하나로 보이는가? 그 보면서 아는 것은 내가 노력해야지 아는가 아니면 노력 없이도 저절로 앎이 일어나는가? 그 아는 것은 모양이 있는가? 더불어 눈앞에 보이는 세상 밖에 아는 것이 따로 존재하나 아니면 보이는 세상과 하나인가?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687호 / 2023년 7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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