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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56)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12)

태백산 변방에서 화엄종 창립해 한국불교사 주류를 바꿔

화엄이 주류 종단되면서 의상교학 계승된 반면 원효는 잊혀
소백산 추동에서 3000명에게 화엄강의, 교단조직 성공 사례
당에서 동문수학했던 법장의 서신, 귀족 승려들 비난 잠재워

 

부석사 창건을 전후로 의상은 중앙귀족 출신의 승려들에게 경계와 질시의 대상이 됐다. 사진은 부석사 전경.                                      [법보신문DB]
부석사 창건을 전후로 의상은 중앙귀족 출신의 승려들에게 경계와 질시의 대상이 됐다. 사진은 부석사 전경.                                      [법보신문DB]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화엄종 교단의 조직에 전념하였다. 의상의 교화 활동은 근엄 성실한 출가 수행자로 일관하면서 저술이나 개인적 수행에 머물지 않고 제자 양성을 통한 교단 조직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교화 활동은 평생 도반이었던 원효(617~686)와 비교할 때 특히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원효는 환속한 거사의 신분으로서 저술과 개인적 교화 활동에 전념하고 제자의 양성이나 교단의 조직적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조적인 교화 활동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각기 시대적 과제에 부응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의상이 창립한 화엄종단은 뒷날 주류 종단으로 발전하면서 의상의 교학과 신앙이 법손들에 의해서 대대로 계승되고 훌륭하게 조술되어 왔던 반면, 원효의 행적과 저술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잊히고 사상은 단절되어, 교화 활동의 일부분만이 대중교화의 파격적인 설화로 전승되어 왔을 뿐이었다.

의상은 귀국 초기 왕경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출가 본사인 황복사에서 ‘일승법계도’와 ‘화엄경’을 강의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던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법손들의 주석을 모은 ‘법계도총수록’(권상)에서는 문무왕 14년(674) 표훈과 진정 등 10여인의 제자들이 의상을 따라 ‘법계도인’을 배우고 있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데, 의상이 귀국한 뒤 4년에는 벌써 10여인의 제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는 황복사에서 의상이 제자들과 함께 탑돌이를 하였다는 설화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제자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매번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계단으로 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가 설치되지 않았고, 그 무리들은 층계에서 세자나 떨어져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니, 세상에 가르칠 것은 못 된다’고 하였다.” 이 자료는 연대가 불명이고 내용도 신이한 설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없지 않으나, 의상이 황복사에 주석할 때 탑돌이가 행해졌을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삼국유사’ 김현감호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매년 2월 초여드렛날부터 보름까지 서울의 남녀들이 서로 다투어 흥륜사의 전탑을 도는 것으로 복회(福會)를 삼는 풍속이 있었다는 점을 보아 탑돌이가 널리 유행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 낙산이성조에서는 의상이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동해안의 낙산을 찾아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반면, 원효는 진신의 친견에 실패하였다는 설화를 전해주고 있는데, 의상의 찬술로 전해진 ‘백화도량발원문’과 함께 관음보살의 구도신앙 자료로서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백화도량발원문’이 의상의 진찬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나아가 관음보살 진신의 친견 설화 내용도 사실성이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화엄학의 강의와 제자의 양성에 주력하던 의상의 행적을 감안할 때, 의상이 귀국한 초기에 동해안 낙산의 관음굴을 찾았다는 설화 내용은 역사적 사실성이 극히 희박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의상은 귀국 초기부터 황복사를 중심으로 화엄학 강의와 제자 교육에 주력하던 끝에 마침내 문무왕 16년(676) 태백산에 화엄도량인 부석사를 창건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교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왕성에서 멀리 떨어진 태백산 지역에서 의상의 교단 활동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던 사실은 ‘삼국유사’ 진정사효선쌍미조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왕성 주변 편모 슬하의 가난한 서민 출신인 진정이 태백산에서 의상이 불법을 설하여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소식을 듣자, 홀어머니의 권유로 태백산을 찾아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眞定)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법계도총수록’에서는 문무왕 14년(674) 진정이 황복사에서 표훈 등 10여인의 제자들과 함께 의상의 ‘법계도인’을 배우고 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어서 진정이 태백산에서의 의상의 교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찾아갔다는 ‘삼국유사’에서의 출가 사실과는 차이를 나타내 주고 있다. 진정은 의상의 10대 제자(삼국유사 의상전교조)이자 4영(법장화상전) 가운데 1인으로 이른 시기에 의상 문하에 입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정이 의상의 중요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삼국유사’ 진정사효선쌍미조에 보이는 출가 이후 행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진정이 의상 문하에서 공부한 지 3년 만에 의상이 진정의 망모(亡母)를 위해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풀을 엮어 막사를 짓고 제자 3000명을 거느리고 약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으며, 문인인 지통이 강의 요지를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서 ‘추동기(錐洞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유통되었다는 것이다. ‘추동기’에 대해 뒤에 다시 검토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나, 추동에서의 ‘화엄경’ 강회가 시설의 미비에도 불구하고 성황이었다는 사실은 우선 제자 양성에 대한 의상의 열정, 그리고 부석사 창건 이후의 교화 활동과 교단 조직의 성과가 대단히 성공적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법계도총수록’에서는 의상이 부석사를 중심으로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을 무대로 하여 제자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모습을 다양하게 전해주고 있다. 앞에 들은 소백산 추동에서의 90일 간의 ‘화엄경’ 강의 사실 이외에도 연도는 불명이지만 10여명의 제자들에게 ‘법계도’를 강의한 바 있으며, 부석산 40일 강회에서는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해 문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태백산 대로방(大蘆房)에서는 행경십불(行境十佛)에 대해 강의했으며, 다른 자리에서는 “움직이지 아니한 나의 몸이 곧 법신 자체인 뜻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하는 표훈 등의 질문에 대해 의상은 4구게(모든 연의 근본은 나이며, 일체 법의 근원은 마음이며, 말은 매우 중요한 근본이니, 진실한 선지식이다)로 답한 뒤에, “그대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한다”고 당부했고, 또한 다른 기회에서도 자체불(自體佛)에 대해 설명한 다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니 항상 생각하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던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답들이 이루어졌던 시기와 장소 가운데는 부석사 창건 이전 황복사에서의 사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부석사 창건 이후에 강의 모임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고 더욱 활발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의상의 시종일관 화엄학 강의와 제자 교육에 기울인 열정을 나타내 주는 사례로서는 부족함이 없다.

한편 부석사 창건을 전후하여 의상의 적극적인 전교 활동과 새로운 불교기풍의 진작은 불교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귀족 출신의 승려들에게는 경계와 질시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송고승전’ 의상전에서 부석사의 창건 당시 반대하는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가 500명이나 되었는데, 선묘룡(善妙龍)이 큰 바위로 변하여 축출하여 버렸다는 설화를 전해준 것은 당시 불교계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반면 일반 서민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소식으로 전파되어 ‘삼국유사’ 진정사효선쌍미조에서 진정과 같은 가난한 서민을 출가케 한 설화를 남겨줄 수 있었다. 또한 삼국통일의 주체자로서의 긍지에 충만한 문무왕도 의상의 화엄종을 주목하여 토지와 노비의 보시를 제의한 바 있었고, 왕성의 신축공사에 대한 자문을 구하여 그의 중지 건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을 보아 삼국통일전쟁 뒤의 평화로운 사회를 고대하던 일반 서민들, 그리고 삼국통일의 주체자로서 통일국가의 운영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모색하던 국왕에게 새로운 불교인 의상의 화엄종에 대한 기대가 컸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의상의 교화 활동과 교단 융성의 소식은 신라 국내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당의 불교계에도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의상이 귀국한 지 20여년 후(692년?) 지엄의 문하에서 의상과 동문수학했고, 스승을 이어 화엄종을 대성시키고 있던 법장(643~712)이 의상에게 그의 교화 활동을 찬양하는 서신과 함께 자신의 저술들을 전해 왔다. 법장은 서신의 서두에서 의상과의 인연을 언급하고, 이어 의상의 교화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듣자오니, 상인께서는 귀국하신 이후 화엄을 천명하고 법계의 무진연기(無盡緣起)와 중중제망(重重帝網)을 선양하여,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롭게 하신다고 하니, 기쁨이 더욱 큽니다. 이로써 여래께서 돌아가신 이후 불일(佛日)이 밝게 빛나고 법륜(法輪)이 다시 굴러서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게 할 이는 오직 법사뿐임을 알겠나이다.” 물론 서신에서의 이러한 표현은 다소의 과장과 수식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지만, 실제 부석사를 중심으로 한 태백산과 소백산 일대에서의 문도 양성과 교화 활동은 얼마 안 돼 신라 불교 주류로 등장하게 하였음을 보아 지나친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편 법장의 서신과 함께 저술을 전해 받은 의상은 10일 동안 문을 닫고 검토한 다음, 특히 ‘탐현기’ 20권을 4인의 수제자들(眞定·相元·亮圓·表訓)에게 각기 5권씩 나누어 강하도록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식견을 넓혀 주는 이는 장공(법장)이요, 나를 일으켜 줄 이는 너희들이다. 문설주가 있음으로써 문설주를 나설 수 있는 것이요, 도끼자루를 가져야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벨 수 있는 것이니, 각기 힘써 자기를 속이지 말라.” 신라말기의 최치원은 ‘법장화상전’에서 법장이 의상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대저 해표(해동)의 각모(覺母)는 의상법사가 시조이다. 그러나 처음 귀국하였을 때는 동쪽 집의 공구(東家丘)라는 말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법신(法信)이 멀리서 전해오게 되자 뭇 미혹을 두루 깨칠 수 있었다. 이는 실로 촉룡(燭龍)의 눈을 떠서 단번에 광명을 놓고, 베 짜는 화서(火鼠)의 털이 더욱 기특함을 나타내는 듯하여 잘 인도함(善誘)은 한 나라에 미쳤고, (화엄)교학은 십산(十山: 華嚴十刹)에 두루 퍼졌으니, 화엄이 우리나라에 빛나게 된 것은 대개 법장 스님의 힘일 것이다.” 최치원은 법장의 전기를 집필하면서 법장을 과도하게 평가한 점이 없지 않으나, 법장의 서신이 의상의 위상을 높이는데 다소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특히 의상의 화엄종에 불만을 가졌던 중앙 불교계의 귀족 승려들의 비난을 잠재우는 데는 기여함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의상이 왕성에서 멀리 떨어진 태백산 지역을 무대로 하여 화엄교학의 홍포와 화엄종의 창립에 성공함으로써 이후 한국 불교사의 주류를 바꾸게 하였던 업적은 그보다 한 세대 앞서 태백산을 무대로 하여 문수보살의 친견을 염원하던 자장이 아상(我相)을 가진 자로 비난받으면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그쳤던 사실과 대조된다. 자장은 ‘중고’기 왕실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650년 즈음 태종무열왕의 집권을 계기로 하여 오대산의 수다사(水多寺)로 퇴거하였다가 태백산의 석남원(石南院)으로 옮겨 외롭게 생을 마감한 시기가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기 25~6년 전이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88호 / 2023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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