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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영원한 현재

시간이 무량하다 해도 한 찰나에 거두어지네

우리가 세계 경험할 때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함께 감지
무량한 시간 포함하는 한 찰나는 가장 충만하고 영원한 현재
지구 반대편에서라도 내 의견에 동의하면 하나의 시간 공유

불교에선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연을 따라 생하고 멸하는 무상한 법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pxfuel]
불교에선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연을 따라 생하고 멸하는 무상한 법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pxfuel]

나는 오랫동안 불교 문헌 속의 많은 철학적 주제를 넘나들면서 종종 시간에 대한 다양한 논증과 관념을 목격하였다. 그때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란 알려 하면 할수록 더욱 모르게 되는 것임을 되새기곤 하였다. 내가 끝내 시간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나는 여전히 시간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인간의 종(種)에 머물면서, 앞으로도 계속 ‘시간이 온다’거나 ‘시간이 간다’는 식의 말을 쓰며 살아갈 것이고, 가끔은 시간에 대해 나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어떤 견해를 늘어놓을 것이다. 요즘 나는 달력이나 시계를 보는 일이 점점 줄어들면서 시간에 대한 관념도 한쪽으로 기울었다. 말하자면 나는 해[日]와 달[月]과 시계의 초침과는 무관한 어떤 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내 생각을 말하기에 앞서, 시간에 대한 두 가지 관념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내 생각도 그 안에서 돌고 도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체적 시간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불교 학파 간의 차이는 없다. 세상에서 흔히 ‘시간이 오면 무르익고 시간이 가면 쇠락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라는 말을 하지만,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 생하고 멸하는 무상한 법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세계를 경험할 때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함께 감지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하지 않은가. 그 신비는 바로 지금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현재 속에 깊이 감춰져 있다. 불교도 중에는 그것을 가령 찰나처럼 ‘극히 짧은 시간[極促時]’에서 이해하려 했던 사람도 있고, 어느 정도 지속되는 ‘긴 시간[長時]’으로 간주했던 사람도 있다. 전자는 ‘구사론’과 같은 초기 불교 문헌에서 주로 보이고, 후자는 ‘유가사지론’과 같은 유식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종류 견해를 언급한 이유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현재에 대한 적절한 정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이미 사라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 낀 그 현재를 극히 짧은 한 찰나에서 정의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 ‘무(無)’와 같은 것으로 된다. 찰라 찰나 생하고 곧 멸하는 세계에서는 어떤 것이 생겨나는 바로 그 순간이 현재에 해당한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가 한 점도 뒤섞이지 않는 순수한 현재는 ‘0’은 아니면서 ‘0’에 수렴하는 극히 짧은 시간이며, 이성으로 추리되는 것일 뿐 우리에게 직접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촉박한 현재는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현재를 감지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는 어느 정도 지속되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 현재 속에 또 다른 작은 과거·현재·미래가 들어 있고, 그 작은 삼세 속에도 각기 더 작은 삼세가 들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가면, 하나의 현재는 무수한 삼세를 포함한다. 그래서 지속되는 현재를 말하는 사람도 현재 속에 포함된 현재 중에 가장 뛰어난 것[現在現在殊勝]은 바로 찰나라고 인정하게 된다(규기 ‘유가사지론약찬’ 제6권). 요컨대, 우리의 이성은 막다른 길에 이를 때마다 찰나적 현재와 지속되는 현재 사이를 끝없이 선회한다.

이제부터 나는 그처럼 돌아가는 쳇바퀴 안에서 또 다른 비밀스런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우선 저 초기 불교도의 찰나적 현재가 역설적으로 과거와 미래의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저 한 찰나의 순수한 현재는 붙잡기 힘든 ‘무’와 같고 그래서 변화와 무관한 ‘영원’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이 변화무쌍한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은 매 찰나 앞뒤로 수많은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예감들이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이리라. 또 저들의 흥미로운 생각 중 하나는, 찰나적 현재가 미래로부터 진입하여 과거로 물러난다는 것이다. 시간이 미래로부터 현재를 향해 흐른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예감과 설렘이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이런 것이다. “무언가를 하기 전날 밤이나 풍부한 기억은 불가해한 무형의 현재보다 사실적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은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의 유럽 여행은 사실상 그제, 즉 8월22일에 시작했지만, 18일의 그 저녁 식사 때 미리 나타났다.…임박해 보이던 여행은 이미 대화 속에서 존재했고, 그 식당의 여주인이 우리에게 준 뜻하지 않은 샴페인에도 존재했다.…결코 잊지 못할 밤이었다.”(보르헤스 ‘아틀라스’ 1983년 8월22일)

다음으로 저 지속되는 현재는 한 찰나의 충만하고 영원한 현재에 대한 관념으로 나를 이끌고 갔다. 지속되는 현재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온갖 기억과 예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현재 속의 현재 중 가장 뛰어난 것, 즉 찰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면서 원측 스님의 책을 뒤적이다가 이런 게송을 보았다. “꿈속에서 몇 해가 지났다고 하나 깨어보면 잠깐이라네. 따라서 시간이 무량하다 해도 한 찰나에 거두어지네.”(‘해심밀경소’의 ‘서품’) 나도 어릴 적 꿈속에서 달력과 시계가 무용해지는 그런 시간을 경험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어떤 과일을 찾아 산과 들의 어지러운 형상들 사이를 헤매다가 마침내 그것을 발견하고 막 깨물려던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자두로 내 입을 톡톡 쳤기 때문이다. 내가 꿈속에서 헤맨 오랜 시간은 내 입이 자두와 부딪혔던 몇 초와 상응한다. 또 흥미로운 탐정 영화를 보거나 주석서의 어떤 문구를 번역하면서 두세 시간을 순식간에 보낸 적도 많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무수한 시간을 한 찰나인 듯 굴리지 못한다. 그의 용맹스럽고 치열한 마음에서는 어떤 시간도 결코 지루할 만큼 길었던 적이 없었고 오히려 잠깐이었으리라. 그래서 무량한 시간을 한 찰나에 거둔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그 안에 무량한 시간을 포함하는 한 찰나는 가장 충만한 현재이자 또한 영원한 현재일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진 나의 단상은 실은 모든 경전의 서두에 쓰인 ‘한때[一時]’라는 문구에서 비롯되었다. 어째서 ‘성도하신 후 몇 년 몇 월 며칠 오후’라고 쓰지 않고 한결같이 ‘한때’라고만 했을까. 내 생각에, 부처님은 모든 시간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얻은 분이니, 그의 행적은 더 이상 연대기의 숫자와 상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곳에 모인 설자와 청자가 한마음이 되어 사견을 깨뜨리는 진리를 공유했다는 의미에서, 또는 하나의 경을 설하고 그것을 듣는 일이 모두 마무리되었다는 의미에서 ‘한때’라고 했을 것이다. 만약 세월이 흘러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나의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비록 수없이 해와 달이 뜨고 지길 반복했다 해도, 나와 그는 하나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리라.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688호 / 2023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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