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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사 주지 원오 스님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좋은 일 하고 오래 살아도 헛일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행복을 주지 못하니 무명중생
마음 속에서 행복과 불행 나오니 마음 찾도록 정진해야
행복과 불행‧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알아가도록 공부하길

원오 스님은 “마음을 찾으면 생사가 끊어져 하나인 줄 알게 되지만, 못 찾으면 기나긴 윤회를 해야 한다”며 공부하고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원오 스님은 “마음을 찾으면 생사가 끊어져 하나인 줄 알게 되지만, 못 찾으면 기나긴 윤회를 해야 한다”며 공부하고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화엄사라는 고찰을 방문해 법문을 하게 돼 영광입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습니다. 곧 여름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겨울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리고 봄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여러분 얼굴을 보니까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갔다’ ‘왔다’에 걸려서 둘로 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하나’라고 했습니다. 봄이 갔다고 했는데 내년에 또 옵니다. 매년 봄이 오는데, 그렇다면 봄이 간 것입니까, 온 것입니까. 불거불래(不去不來)입니다. 간 것도, 온 것도 아닌 이것이 실상입니다.

태양이 돌듯이 매년 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 적도 없고 온 적도 없는 것을 ‘갔다’ ‘왔다’ 그러면 허상에 끌려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속고 있는 것이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도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합니다. 봄은 간 것도 온 것도 아니고 그저 겨울이 봄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봄이 여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어디로 간 것이 아니고 가을이 겨울로 변하는 것이고 겨울이 봄으로 변하는 것뿐입니다. 이 사계절이 하나입니다. 겨울 속에 봄이 들어있고, 봄 속에 여름이 들어있는 것인데, 우리는 따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하고, 착각이라고 합니다.

어느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예쁜 소녀는 숙녀가 되고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됐습니다. 그러면 그 소녀와 할머니는 같은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일까요?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애초부터 이 소녀 속에 할머니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할머니 속에 소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와 소녀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데, 우리는 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늙은 것일까요, 젊은 것일까요?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닙니다. 변한 것입니다. 그것을 ‘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 적도 없고, 온 적도 없고 그저 변하는 것인데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이치를 아셔야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죽었다고 하고, 나면 태어났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을 둘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불생불멸, 생사가 하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올 때 어디서 오셨습니까? 오기는 왔는데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것이 무명중생입니다. 아무리 아는 것 같아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릅니다. 그토록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나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남편이건 아내건 성격을 알아야 기분 맞춰주고 할 텐데, 모르니 행복하게 해줄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딱 한마디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오래 살아도 다 헛일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왜 사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면 그냥 꿈속일 뿐입니다. 허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 벌고, 누굴 만나고, 출세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밖으로만 무언가를 찾아다닙니다.

여러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아시지요. 불교 경전 중에 최고의 경전이 ‘화엄경’입니다. 이 ‘화엄경’을 다섯 자로 요약하면 바로 ‘일체유심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내가 보는 대로 보이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보이고, 내가 아는 만큼 보이고, 내가 본만큼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만큼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음먹기에 달린 게 아닙니다. 겨울에 마당에 나가서 옷 벗고 있으면 춥기 마련입니다. 그걸 따뜻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따뜻해지는게 아닙니다. 

여러분 극락과 지옥이 따로 있는 줄 알고 있지요. 부처님은 그것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일체유심조를 제대로 이해를 못하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방이 상당히 큰데, 100명이 같이 잠을 잔다고 했을 때, 100명 모두에게 공간도 공기도 분위기도 풍광도 냄새도 똑같은 조건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밤에 대박이 나서 막춤을 추고, 어떤 사람은 밤새도록 쫓깁니다.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스님들이 선방에서 화두를 듭니다. 그것이 말씀 화(話)자에 머리 두(頭)자입니다. 말이 생기기 전입니다. 말이 바깥으로 나오기 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발점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 생각이 나는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화두라고 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는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 생각이 나오는 것을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거기서 행복과 불행이 다옵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찾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버드 박사도 찾아낼 수 없지만, 우리 불자님들은 찾아낼 방법이 있습니다.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눈이 좋아하는 거 보여주고, 귀가 좋아하는 거 들려주고, 입이 좋아하는 거 먹여주고, 손이 만지고 싶어 하는 거 만져주고 하면서 정작 나는 허수아비로 여기에 두고 돌아다니기만 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돌아다니니 나는 빈집입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늙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인생 도둑맞은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언제 나를 돌아보고 바라봐 준 적이 있습니까. 

옛날 한량들은 집안에 땟거리가 없어 가족이 굶는지도 모르고 돌아다녔습니다. 그것처럼 나를 팽개치고 바깥세상으로만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리고 결국 어딘지도 모르고 죽게 됩니다. 다음에 또 온다고 해도 또 이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까.

마음을 찾으면 생사가 끊어져 하나인 줄 알게 됩니다. 못 찾으면 기나긴 윤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캄캄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무명에 갇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사실 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무명중생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 바깥으로 돌아다닐 시간이 없습니다. 내생에 공부를 못하면 또 학원에 다니고, 시험마다 고생을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합니다. 내생의 준비도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가을에 수확을 하려면 봄에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경전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내 마음 속에서 행복과 불행이 다 나오는 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어떤 보살님이 남편 때문에 죽겠다고 합니다. 그냥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였던지 간에 좋았던 때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 좋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죽을 만큼 나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도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고 그런 것이 마음입니다. 고통 없이 오로지 즐거움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면, 이 사람은 불행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을 모르면서 행복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반대로 불행하다고 하면 역시 행복을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행복과 불행 역시 하나입니다.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화를 내면 ‘아이고 부처님이 또 기분이 언짢아 화를 내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고, 기분이 좋으면 ‘아이고 지금은 기분이 좋아 웃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세요. 화를 내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한 그 남편은 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 남편은 행복을 주기도 하고, 불행을 주기도 하는데 그냥 한 사람이지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막 화를 낼 때는 “아이고, 그래도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아닌가, 앞으로도 즐겁게 해줄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나와야 합니다. 또 반대로 지금 행복할 때는 “아이고, 조금 지나면 내 성질을 긁을 거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되면 일희일비하지 않게 됩니다. 행복할 때 불행을 보게 되고, 불행할 때 행복을 찾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若見) 제상비상(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릇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끝없이 변하는 것이니, 만일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줄을 알면 즉시 부처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컵이 있는데, 이것이 본래부터 이런 모양으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컵에서 모양이 없음을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즉견여래, 즉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 없어질 것이고, 또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있는데서 없는 것을 보고, 없는데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이 둘이 결코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것을 행복하다고 한다면 이미 그 사람은 불행을 알고 있으며 행복과 불행이 둘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불행과 행복이 둘이 아니고, 생사가 역시 둘이 아님을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행복과 불행이 하나이고, 생사가 하나임을 알아갈 수 있도록 공부하시고 기도합시다.

정리=신용훈 호남주재기자 boori13@beopbo.com

이 내용은 5월6일 제31대 군종감을 역임하고 유튜브 ‘원오 TV’를 운영 중인 원오사 주지 원오 스님이 화엄사 화엄법회에서 법문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688호 / 2023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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