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더 많은 청년들이 불교와 인연 맺는다면 그걸로 충분하죠”

  • 무진등
  • 입력 2023.07.10 15:09
  • 호수 1688
  • 댓글 1

인자 했던 청화 큰스님 만나 불교에 입문…태안사 등서 참선 수행 익혀
도반 20여명과 ‘선우선방’ 개원…청화 스님 초청 법회에는 2000명 운집
군법당 백호정사 건립부터 합창단·어린이법회 개설, 대학생 장학금 지원

유동숙 선원장은 “진리로 향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그 길에선 모두가 도반”이라고 했다.
유동숙 선원장은 “진리로 향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그 길에선 모두가 도반”이라고 했다.

서부 경남의 중심지 ‘진주’는 단연 불교도시다. 청담 큰스님의 고향이고, 전통사찰이 곳곳에서 위용을 뽐낸다.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감로수 삼아 뜻있는 불교도들은 크고 작은 모임을 결성했고 법등(法燈)을 밝혀 왔다. 

재가불자들을 위한 수행처로 손꼽히는 ‘선우선방(禪友禪房)’도 진주에 있다. 선우선방은 청화 큰스님 유지를 이어온 재단법인 성륜불교문화재단 소속의 재가 참선도량이다. 매일 30여명이 가부좌를 튼다. 정회원 100여명이 함께하는 이곳의 선원장은 여여화(如如華) 유동숙 보살(76). 선원장이라고 하면 잿빛 법복을 입은 스님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유 선원장은 거리에서 쉽게 만날 법한 은발의 할머니다. 
 

선우선방이 올해 참선 모임 30주년을 맞았다. 최근에는 ‘성륜불교문화재단 경남지회’로도 등록됐다. 연말에 있을 청화 스님 열반 20주기도 다가와, 서른 돌의 법연(法緣)을 돌아보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다. 선우선방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중심에는 유 선원장이 있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조계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고등학교가 있었지만, 좀처럼 발길이 닿지 않았다. 친구의 제안으로 기독교 모임에 가입한 적도 있다. 친구를 따라 모임에 자주 나가 봤지만 좀처럼 젖어들지 못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데, 천국에 가더라도 지옥에 간 다른 이들이 자꾸 떠오른다면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 집안의 약속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을 따라 경남 진주에 살림을 꾸렸다. 시댁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래도 교회에 가기를 강요받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가 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간병은 그의 중요한 일과로 자리 잡았다. 빠듯한 일상에서 유일한 휴식처는 시아버지의 서재였다. 그곳에서 낯선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선문촬요’였다. 유 선원장은 그 책을 꺼내 펼친 순간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 도리로 살면 지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책을 스승 삼아 참선을 시작했습니다. 그땐 화두, 염불을 몰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묵조(黙照)’ 공부를 했습니다.”

문득 중학교 시절 불교신자였던 친정 어머니에게 불교가 무엇인지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마음”이라고 짧게 답했다. 특별한 부연 설명도 없었다. ‘선문촬요’를 펼치고서야 어머니의 답에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집안일과 시어머니 간병으로 절에 다니는 것은 엄두를 못냈다. 스님을 만난다는 것도 더욱 어려웠다. 궁금증이 생길 땐 책에서 답을 구했다. 웬만한 불서는 물론 인도 성자들 이야기도 읽었다. 남편이 잠들면 누워서도 참선을 했다.

그러던 1990년 어느 날 신문에서 ‘청화 스님’의 사진과 짧은 약력을 읽으며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때마침 지인이 청화 스님을 뵈러 가자고 제안했다. 남편·지인과 함께 전남 곡성으로 나섰다. 

유 선원장이 처음 마주한 스님은 의외였다. ‘도인(道人)’은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청화 스님은 그저 인자한 동네 어른 같았다. 

“세상에서 이분보다 더 겸손한 분은 없겠구나 싶을 정도로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 겸손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도 겸손함을 배워야겠다.’ 그 생각만 들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해 청화 스님이 지도하는 염불선 정진에 동참했다. 법문을 듣기 위해 세 번째 찾아갔을 무렵 청화 스님을 평생 모셔야 겠다 확신했다. 좀처럼 부탁하는 일이 없었던 유 선원장은 처음으로 남편에게 차를 한 대 마련해달라고 했다. 그 차로 곡성 태안사와 성륜사를 셀 수 없이 오갔다. 그럴수록 공부도 깊어져 갔다. 

청화 큰스님을 뵌 지 3년이 흘렀을 무렵, 집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길을 물었다. 참선 모임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느덧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20명이 훌쩍 넘었다. 30평 남짓한 공간은 무릎이 닿을 정도로 비좁았다. 청화 스님의 제자 중 한 스님이 선방을 열 것을 권했다.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다. 

“공기처럼 살길 바랐어요. 그런데 선방이라니, 제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를 스님은 세 번이나 설득하셨습니다. 결국 집 가까운 곳에 선방을 열었습니다.”
 

선우선방 참선 모습.
선우선방 참선 모습.

도반이라는 의미로 ‘선우(禪友)’라 칭했고, 참선하는 공간이라고 해서 선방(禪房)이라는 이름을 붙여 ‘선우선방’이라고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선방에 모인 이들은 좌선에 들었고 경전을 펼쳤다. 주부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왔고, 직장인들은 업무를 마치고 왔다. 사업가, 공무원, 교수, 의사도 찾아와 가부좌를 틀었다.

“재가자들이 스님처럼 안거에 들기란 어렵습니다. 이렇게라도 조금씩 흉내 내는 겁니다. 언젠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말입니다. 참선의 방법도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도 불교의 회통을 당부하셨습니다. 간화, 묵조, 염불, 위빠사나 모두 가능했고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 길을 밝혀 주었습니다. 진리를 향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그 길에선 모두가 도반입니다.”

1999년경 시어머니는 투병 생활을 마치고 세연(世緣)을 마무리했다. 암4기 진단 후 30여년이 지났을 때다. 선우선방 회원들은 공간의 가치를 전법과 포교로 확장했다. 네 차례에 걸쳐 청화 큰스님 초청 법회를 개최했다. 최대 2000명이 운집할 정도로 매회 법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 사람이라도, 조금 더 일찍 부처님과 만나는 이가 늘길 기원했다. 유 선원장이 군포교에 나선 것도 그런 이유였다.

“청년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군부대입니다. 최소한 젊은이들이 불교를 미신적으로는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 깨치는 길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오해를 푸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규모가 큰 군부대를 수소문했고 경남 사천 곤양의 백호부대에 마침 군법당을 지을 장소도 정해졌는데 보시금이 부족해 삽을 뜨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군법당을 짓는 데 동참하자.’ 저절로 발원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일부 회원들의 반대도 있었다. “우리도 세들어 사는데 차라리 우리 절부터 짓자”는 목소리였다. 유 선원장은 말했다. 

“참선은 어디서든 할 수 있습니다. 추우면 집에 있는 담요를 가져와서 덮어써도 됩니다. 청년들은 군대에서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언제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힘든 환경에서 복무하는 그들이 지혜롭고 자비롭게 성장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2000년 경남 사천 곤양의 백호부대에 지은 법당(백호정사).
2000년 경남 사천 곤양의 백호부대에 지은 법당(백호정사).

유 선원장의 호소에 도반들 마음이 움직였다. 2000년 군법당 백호정사가 완성됐다. 불사에는 2억여원이 소요됐다. 선우선방은 군법당 마련에 그치지 않고 매주 일요일 간식을 준비해 군법당에서 법회를 진행했다. 군법당 법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군법당 불사를 회향한 뒤 선우선방에도 도량 건립의 인연이 찾아왔다. 셋방살이 몇 곳을 거친 뒤 다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던 중 넓은 주차장을 갖춘 단층 건물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집주인은 선뜻 그 장소를 사라고 제안했다.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말에 조금씩 갚아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마련된 공간이 지금의 선우선방이다. 도량 일체는 재단에 희사했다. 공간을 마련하니 부처님과 불화를 모시는 인연도 이어졌다. 

선우선방의 원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젊은 세대가 불교와 친숙해지는 방법으로 혼성 합창단을 창단했다. 합창단은 2018년 BBS 도솔전국합창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을 만큼 실력과 신심을 겸비하고 있다. 

선우선방의 어린이법회 찬불가 지도 모습.
선우선방의 어린이법회 찬불가 지도 모습.

불교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있다는 신념으로 어린이 법회도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어린이 법회는 코로나로 잠시 휴식했지만 올해 초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어린이 법회 출신들은 중·고등부, 중·고등부는 대학생, 대학생은 청년회에 소속돼 신행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진주교대 불교학생회 후원도 지속하고 있다. 올해도 개강 법회를 찾아 격려했다. 부처님오신날은 장학금을 전달했다. 지난해 재창립한 진주 경상국립대 불교학생회 후원에도 기꺼이 동참했다. 이처럼 선우선방은 어린이·청소년·대학생·청년 계층을 지원하는 등 진주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선우선방은 올해 참선모임 30주년을 맞아 재도약을 준비 중이다. 선방을 이끌 제2대 선원장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 없이 기다리면 인연이 나타나리라고 믿는다. 깨달음에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다. 

“일체중생의 밑바닥에는 ‘아미타불’이 있어서 근원인 동시에 화현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아미타불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지요. 말은 쉬운데 체득은 어렵습니다. 그래도 모양으로 앉다 보면 마음으로도 앉아지리라 믿습니다. 영원한 그 자리를 알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겁니다.”
 

선우선방은 진주교대 불교학생회와 진주 경상국립대 불교학생회 후원에 동참하는 등 어린이·청소년·대학생·청년 계층 포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사진은 선우선방 회원들의 제등행렬 모습.
선우선방은 진주교대 불교학생회와 진주 경상국립대 불교학생회 후원에 동참하는 등 어린이·청소년·대학생·청년 계층 포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사진은 선우선방 회원들의 제등행렬 모습.

선우선방 관음전에는 청화 큰스님의 진영과 사진이 정갈히 모셔져 있다. 스님의 천진한 미소를 바라보며 유 선원장도 밝게 미소 지어 본다. 그 미소는 한여름 햇살이 진주 도심을 가로지르는 듯 남강에 내려앉아 바다로 향하고 있다.

진주=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1688호 / 2023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