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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약탈자 오페르트가 K-문화 전파 선구자라니?

기자명 법보
  • 기고
  • 입력 2023.07.10 18:18
  • 수정 2023.07.10 18:19
  • 호수 1689
  • 댓글 2

기고-이기룡 조계종 포교사

오페르트는 오만방자한 문화약탈자
인도 시성 타고르까지 끌어들여 미화
임진왜란 종군 신부 미화 작업과 유사

남현군 묘를 파헤쳐 조선왕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가톨릭 탄압의 원인을 제공했던 오페르트.
남현군 묘를 파헤쳐 조선왕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가톨릭 탄압의 원인을 제공했던 오페르트. [위키피디아]

조선 왕실의 묘소 도굴범을 한국음악(K-뮤직)을 서양에 알린 문화교류의 선구자로 재평가하자는 학술논문이 발표되어 논란이 예상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성신여대 김 모 교수는 최근 발표된 전문 학술지 논문을 통해서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가 한국음악 평론가로서의 선구적 면모를 보였다”며 “재평가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느닷없이 등장한 오페르트는 누구이며, ‘K-문화 서양전파 선구자’란 무슨 관계인가? 또 문화재 도굴은 무슨 이야기인가?

잠시 역사의 타임머신을 뒤로 돌려 보자. 그렇게 멀지도 않은 150년쯤 전의 조선조 후기의 근세사로, ‘~카더라’식의 유언비어가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엄연히 실려 있다는 정사(正史)의 기록이라는데 주목하자.

‘덕산군 묘지에 양인(洋人, 서양사람)들이 침입해 사초를 훼손한 변고가 있기까지 했다고 하니 아주 놀랍고 황송한 일이다.’(고종실록 1868년 기록)

즉 1866년 5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행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며 왕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소(충남 해미현 서면 조금진/현재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는 내용으로, 흔히 말하는 ‘남연군묘 도굴사건’으로 3월과 8월 두 차례씩이나 시도했던 ‘대사건’이었다.

어느 나라의 ‘상인’이 남의 나라 왕족의 묘소를 제멋대로 파헤치겠다고 덤벼든단 말인가? 그것도 프랑스 신부 페롱, 미국 상인 젠킨스와 패거리를 지어, 현지 지리에 밝은 천주교도들을 앞세워 길안내를 받아가면서 두 번씩이나 말이다. 이쯤 되면 ‘상인’은 대외용 위장신분일 뿐, 실체는 남의 나라 문화와 정신쯤 짓밟아도 된다는 제국주의적 오만방자한 ‘문화약탈자’로 의심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김 교수는 오페르트가 귀국 후인 1880년 발간한 여행기 ‘금단의 나라 조선’(원제 A Forbidden Land: Voyages to the Corea)에서 한국 음악을 거론한 22개 문장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이 글속에는 오페르트가 1866년 해미현 서면 조금진(현재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에 도착했을 당시 현감(縣監·현의 수령) 일행이 베푼 연회에서 ‘음악 재생장치’를 선보인 내용 등이 담겨 있는데 이 장치가 곡을 미리 녹음해 재생하는 방식의 오르골이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가 전문가 3명과 연구한 결과 오페르트는 “한국인의 음악 애호심은 아시아의 어떤 민족보다도 강렬하다.” “한국인은 서양 음악의 감상법을 알고 있으며, 음악을 매우 즐겁게 듣는다.”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현대음악 평론의 수준과 체계성에 이르진 못했지만, 형식과 내용적 측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개항기에 오페르트가 남긴 음악평론이 갖는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한국음악 평론 기록을 남긴 최초의 서양인이자 한국인의 뛰어난 음악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국인의 음악성과 음악 사랑에 대해 예찬한 내용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1929년 ‘동방의 등불’에서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설파한 시점보다 49년 앞선다”고 설명하며 “기존 시각과 달리 음악사와 음악평론 차원에서는 오페르트를 재평가할 소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과연 그렇기만 할까!

남의 나라 왕실 묘소를 마구잡이로 야밤에 몰래 파헤친 ‘전문도굴꾼’ ‘상인’으로 위장했을 문화약탈자의 원죄는 어디 갔나? 더구나, 지금은 ‘K-00’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문화적 가치의 스탠다드로 대환영을 받는 대명천지에 살고 있는데 150여년 전의 문화약탈 전과자를 ‘K-문화 서양홍보’ 선구자쯤으로 추증(追贈)해서 무엇을, 얼마나 얻을게 있는가?

또, 깊은 사유와 철저한 작가주의적 문명비평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까지 끌어들여 도굴꾼의 신분을 미화하려는 숨은 의도는 순수한가!

포교사, 언론인
포교사, 언론인

어쩌면 진해시가 공공영역에 기념공원을 세워가면서까지 추모하는 가톨릭 신부의 사례를 벤치마킹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드는 까닭이다. 즉,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조선침략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종고문의 임무를 띠고 한국에온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1551-1611)를 ‘개항의 공로자’로 기리는 기념공원을 400여년이 지난 1993년 경남 진해시 사도마을에 일부의 반대여론 속에서도 밀어붙였던 사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1689호 / 2023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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