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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 훼불 아픔 담긴 복원 필요하다

기자명 법보
  • 사설
  • 입력 2023.07.17 13:06
  • 호수 1689
  • 댓글 0

고려불교 사상사 연구 중요 사찰
조선 초기까지도 번성했던 대찰
대웅전 허물고 사당 지은 흔적 역력
숭유억불 편승 유림계 폭거로 폐사

조계종이 숭유억불의 비운이 서린 서울 도봉산 영국사지(도봉서원 터)를 불교와 유교의 상생·해원 상징으로 복원하자는 대승적 의지를 표명했다. 영국사와 도봉서원이 함께 존재했던 문화유산 공간이 향후 어떻게 조성되고 활용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도봉서원은 조광조를 추존하기 위해 세워졌다.(1573) 도봉서원이 시문화재(기념물)로 지정(2009)되자 도봉구는 45억원을 투입해 2016년까지 복원한다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지표‧발굴조사에서 불교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금강저·금강령 등 10점의 공양구는 보물로 지정됐다.(2021) 복원에 앞서 유적의 역사성부터 고찰해야 한다는 조계종의 요구에 힘이 실리며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2011∼2013년 시·발굴조사(서울문화유산연구원), 2016년 지표조사(고려문화재연구원), 2017년 하층 발굴조사(불교문화재연구소) 등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됐고, 출토된 공예품과 금석문 등을 토대로 영국사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영국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 고려의 고승 혜거(慧炬)국사가 주석하며 법안종의 선 사상을 펼쳤다. 혜거 국사는 10세기 중국 오월 지역으로 유학 가서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스님에게 공부하고 돌아와 고려에 처음으로 법안종을 전파한 고승이다. 도봉산의 신정(神靖) 선사의 제자이며 적연(寂然) 국사의 스승이다. 제자 적연 국사도 영국사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영국사는 석경의 역사도 이었다. 우리나라 석경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 경주 창림사 법화석경, 남산 칠불암 금강석경뿐이었다. 여기에 영국사 묘법연화경 석경이 더해졌다. 통일신라의 석경 전통을 이은 고려의 석경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실물 천자문(千字文)도 영국사터에서 발견됐다. 천자문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판본은 1575년 펴낸 ‘광주판 천자문’(일본 도쿄대학 소장)이었다. 영국사 천자문 석각본은 이보다 최소 500년 이상 올라간다. 영국사 스님들의 한자 교육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대찰이었던 영국사는 왕실의 지원에 힘입어 조선 중기 직전까지도 번성했다. 고려시대 계림공과 조선시대 효령대군이 중창을 위해 시주했다. 조선의 세종 대에는 진관사에서 거행하는 왕실의 수륙재(水陸齋)를 영국사로 옮기는 것이 논의되었으며 세조의 축수재(祝壽齋)를 봉행할 정도로 위상도 높았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 즉 세조(재위 1455∼1468) 때까지도 번성했던 영국사는 왜 폐사 지경에 이르렀을까? 도봉서원(1573)이 영국사 위에 세워지기까지의 10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숭유억불 정책에 편승한 유림계의 폭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세조(재위 1455∼1468) 대를 지나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대에 이르면서 불교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1468∼1544) 덕망 높은 스님이라는 소문이 들려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려 했다. 각돈, 계엄, 상명, 월심, 의철, 죽변, 지성, 학선, 해초, 등 수많은 스님이 정법을 펴다가 고문을 받거나 참수됐다. 일례로 설잠 김시습의 스승이었던 설준 스님도 유생들의 표적이 되어 끌려가 참사를 당했다.

유생들은 절에 와서는 고기와 술을 요구했다. 산을 오를 때면 스님에게 가마를 매개했다. 사찰에 불을 지른 유생은 영웅처럼 떠받들어지기도 했다. 불태워진 고찰 자리에 유생들은 서원을 세웠고 때로는 양반가의 무덤으로 썼다. 한양에 있던 영국사가 무사할 리 없다. 지표‧발굴조사 결과 도봉서원을 건립할 때 영국사의 일부 건물과 기단을 재활용했고, 기존 사찰의 석축과 도량 배수시설 위에 서원 건물을 축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웅전을 헐고 사당을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사터(도봉서원)가 어떻게 복원‧조성될지는 구체적인 계획이 나와 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숭유억불의 탄압 속에서 영국사의 법등이 꺼졌고, 그 자리에 유림의 서원이 조성됐다는 역사적 진실을 담은 설계를 바탕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불교계와 유림계는 물론 그곳을 찾을 시민들도 올바른 역사‧문화관을 인식‧확립할 수 있다. 불교계와 유림계 상생‧해원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1689호 / 2023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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