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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눈앞의 실상은 여여하다

기자명 혜민 스님

14. 법이 따로 있다고 오해한 대가

자신이 붙잡은 법에 대한 상
놓지 못하면 허송세월일 뿐
색과 공이 따로 있지 않듯이
‘공’이라는 상도 내려 놓아야 

7월에는 ‘법화경’의 ‘화성유품’을 선원 신도님들과 함께 독경하며 기도한다. ‘화성유품’은 참으로 신묘한 내용으로 대통지승 부처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라고 하면 ‘크게 통해서 지혜로써 모든 것을 이기는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아미타부처님이라든가, 석가모니부처님 전생의 아버지였다는 내용도 나온다. 처음 경 공부를 했을 때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그냥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로만 들렸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참으로도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먼저 대통지승불은 ‘셀 수도 없는 무량한 아승지겁 이전에 이미 성불하신 부처님이다’라고 적혀있다. 이 뜻은 대통지승불의 깨달음이 어느 시작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시간을 초월한 영원 속에서 항상 있는 부처라는 뜻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즉, 교학적으로 이야기 하면 법신 부처님을 대통지승이라고 표한 것인데, 이름에서 보듯 세상 안팎으로 걸림 없이 훤하게 통해서 둘이 없는 우리 마음을 지칭한 것이다. 이 마음은 그렇다고 특별한 부처의 모양이 있거나, 세상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지금 이 마음이다. 

그런데 지금 이 마음이 대통지승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 안에 분별심이라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상은 분별심 자체도 바로 대통지승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고 아무런 실체가 없지만, 처음 발심해서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분별심을 자꾸 따라가서 세상을 여러 개로 쪼개서 보면서 실체시하기 때문에 장애가 된다. 그래서 분별심이 일단 뚝하고 떨어져 나간 공적한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고 나면 대통지승 부처님이 전설속의 머나먼 옛적 분이 아니고, 지금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살아있는 바로 이것이 대통지승을 지칭하는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더불어, 모든 것에 원융하게 통한 마음은 굳이 내가 일부러 노력해서 생각으로 지어내지 않아도 지금 눈앞 인연과 상황에 맞게 지혜가 알아서 바로바로 응답을 한다. 이 지혜는 얻어야 되고 지켜야 되는 지식과는 달리, 얻을 것이 하나도 없는 텅 빈 대통의 마음에서 즉각적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이 지혜의 눈으로 보면 세상과 마음이 하나인 것이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 어떤 세상일에도 물들거나 훼손되거나 하는 경우 없이 텅 빈 채로 청정하기에 ‘이긴다(勝)’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대통지승께서 마군을 다 파하신 후에도 불법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무려 십소겁을 결가부좌한 상태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셨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왜 불법이 대통지승 부처님 눈앞에 그 오랜 시간동안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미 마군을 다 파했다고 했으면 석가모니부처님처럼 바로 깨달아서 열반의 대 자유를 만끽해야지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 아버지라는 분이 아들보다도 훨씬 더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다른 것이 아니고, 눈앞에 불법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즉, 대통지승불은 지금 당신 눈앞에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니고, 뭔가 위대한 부처님의 법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분별한 결과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기다리시게 된 것이다. 그 기다리는 동안 천신들이 만다라 꽃을 하늘에서 내리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공양을 했다고 하는데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만다라 꽃과 아름다운 음악이 불법이지 그것 너머에 또 다른 불법은 없다. 수행자들 가운데에서도 이 도리를 모르면, 자기가 붙잡고 있는 법에 대한 상을 놓지 못해 오랫동안 고생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즉, ‘반야심경’에도 보면 색즉시공이라고 했지 색이 따로 있고 공이 또 따로 있어서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파도를 보면서 물을 보는 것이지 파도를 떠나서 물이 따로 있지 않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면 파도를 떠난 물에 대한 상을 집착해서 계속해서 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된다. 특히 공부 초반에 분별심이 떨어져 나간 텅 빈 상태를 처음 맛 본 경우, 공한 이 상태가 너무 편해 그곳에 안주하면서 이 법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공이라는 법에 대한 상을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라 이것마저도 다 내려놓으면, 공이라는 방편을 넘어선 자유로운 눈 앞 실상이 여여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689호 / 2023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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