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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깊은 불자 교도관, 수용자 포교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 무진등
  • 입력 2023.07.24 10:11
  • 수정 2023.07.26 13:02
  • 호수 1690
  • 댓글 0

어윤식 전국교정인불자연합회장

군대서 불교와 첫 인연…포교사 품수 후 불교담당 소임도 맡아
교도소 내 기초교리반·붓다 아카데미 개설해 교정 포교 앞장
봉사활동부터 민간성직자로 위촉돼 2002년부터 군포교도

전국교정인불자연합회 창립 30년을 앞두고 취임한 어윤식 회장은 포교사, 교도관, 지원단 수석부단장, 봉사단원 등 맡고 있는 소임만해도 수두룩하다. 몸이 열개라도 부족하지만 전법의 사명으로, 불제자라는 자부심으로 모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전국교정인불자연합회 창립 30년을 앞두고 취임한 어윤식 회장은 포교사, 교도관, 지원단 수석부단장, 봉사단원 등 맡고 있는 소임만해도 수두룩하다. 몸이 열개라도 부족하지만 전법의 사명으로, 불제자라는 자부심으로 모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소년의 세계는 우정과 사랑이 전부인 듯했다. 함께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웃음이 넘실댔다. 어딜가든 늘 함께였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은 우정이 전부였던 소년 어윤식만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종교에 관심이 없던 그가 눈을 뜨게 된 이유에도 친구가 있었다. 시작은 기독교였다. 고등학교 1학년,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신앙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주말마다 친구들과 교회에 모인다는 것이 좋았다. 소년부에 소속돼 성경 공부는 물론 함께 봉사를 하고, 연극도 준비했다. 목사님에게서도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취업을 위해 상경하면서 자연스레 교회와는 멀어지게 됐다.

강릉서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온 그에게 도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청년의 열정과 패기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 어떻게 해서든 자리를 잡아야 했다. 이를 악물고 세무직 공무원 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외로움에 사무칠 때면 다시 내려갈까 싶기도 했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가슴 속이 일순간 공허해졌다. 몇날 며칠을 고시원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다 같이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와 함께 종교에 위로받기 위해 교회, 성당 등을 찾았다.

입대 후로도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종교로 위로 받고 싶었던 그는 자대배치 후 종교 활동이 시작되면서 곧바로 기독교를 찾았다. 가장 친숙했기에 고민도 없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니 생각과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박수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고 흥겨운 분위기였다.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그러다 불자였던 선임의 권유로 불교를 찾게 됐다. 법당이란 곳은 낯설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스님의 지도에 따라 기도하고, 명상을 하면서 조금씩 평온을 찾아갔다. 그때였다. 불교가 그의 삶 속에 깊숙하게 스며든 것이. 어윤식(혜도.54) 전국교정인불자연합회장은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심취했다는 표현이 맞겠죠. 기도하고 명상하는 것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하고 싶었죠. 전역 후 공무원 준비를 하면서 화성 신흥사를 찾아갔어요. 제대로 기도 방법도 배웠죠. 100일 기도를 했죠. 신기하게도 교정 공무원에 합격했어요. 1993년 수원교도소로 발령받았습니다.”

교도관의 업무는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도 불교담당을 하고 싶었다.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만큼 평생 부처님 일을 해야겠다고 원을 세운 후였다. 어 회장은 “‘모든 이들에게 불성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고, 그걸 발아시키는 건 우리들의 몫’이라고 항상 강조한다”며 “부처님 말씀으로 교화시키고 새사람 만드는 건 우리의 책무였다”고 설명했다. 선배들에게 물어물어 직장인 불자모임인 ‘불심회’를 찾아 가입했고 전국교정인불자연합회 창립 멤버로도 활동했다. 계속 신흥사를 찾아 기도를 올리고 도반들과 성지순례를 떠나며 신행활동을 이어갔다. 보문사 해수관음상 앞에서 또 한번 다짐했다. ‘불교를 위해 살아갈 것이며, 그 가르침으로 수용자들을 교화해 바른 길로 인도하겠습니다.’

기초교리교육을 받았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부처님의 깊고 넓은 가르침을 배우기엔 3개월이란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마침 수원포교당 부설 경기불교대학이 설립됐고, 1기로 입학했다. 업무 특성상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터라 힘에 부칠 때가 종종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고 싶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다. 심지어 몸 담고 있던 거사회에서도 별도로 경전을 수학했다. 수료 후 당시 수원포교당 주지였던 성관 스님의 권유로 포교사 고시에 응시해 품수를 받았다. 전문 분야인 교도소 팀에 소속돼 활동을 시작했다. 나이 서른, 그는 자신이 세운 원을 이루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2000년, 그토록 원하던 불교담당업무 소임을 보게 됐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탄식만 흘러나왔다. 프로그램은 없었고, 법회, 상담 정도가 끝이었다. 수용자들이 불교반 활동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불교의 맛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교도관이자 포교사였다. 수용자 관리·교화 의무도 있지만 전법의 의무도 있었다. 이래서는 포교가 될 수 없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법. 교도소 내 기초교리강좌를 만들었다. 스님과 포교사들을 초청해 부처님의 생애에서부터 교리, 불교문화 등을 가르쳤다. 어 회장도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교리 교육을 실시했다. 수용자들이 불교에 대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갈 즈음 교무과장은 강의 중단을 지시했다. 교도관이 직접 나서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아쉬웠지만 아쉬운 대로 다른 포교사를 불러 기초교리반을 운영했다. 그러다 수원교도소가 구치소와 여주교도소로 분리되면서 여주교도소에서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하게 됐다.

교리반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불교 입문반을 개설했다. 스님과 불자들의 후원을 받아 운동장에 관세음보살상을, 불교반에 석가모니불도 모셨다. 비로소 제대로 된 법당의 모습이 갖춰질 수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계식도 열어주었고, 교도소 방학 기간을 이용한 ‘붓다 아카데미 교육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참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마음에 숨겨진 불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발우공양, 참선, 요가, 교리, 임사 체험, 사경, 연등 만들기 등 커리큘럼을 구성했다. 이를 위해 수의, 관을 구매하고 신륵사로부터 발우등 물품을 빌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교정포교에 나섰다. ‘붓다 아카데미 교육프로그램’은 어 회장이 불교담당 업무를 맡은 10여년동안 지속됐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수용자들 교화, 포교는 어림도 없어요. 기독교에서는 ‘아버지 학교’를 운영하고 있더군요. 불교도 이런 체험 프로그램을 해보면 좋겠다 해서 도입을 했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수용자들도 있는 등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불교담당이 바뀌면서 지금은 없어졌죠. 제일 아쉬운 부분입니다.”

사경책을 구해 수용자들에게 사경을 권하기도 하고, 기도법을 가르쳐주며 그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는 “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들어왔기에 자신을 낮추고 업장을 소멸할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라고 권한다”며 “기도를 통해 참회하고 욕심·갈등을 떨쳐낼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출소한 수용자들과의 인연도 놓지 않았다. 어렵게 튼 싹이 죽어가게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출소 전 연락처를 나눠주고 가까운 절에 꼭 찾아가야 한다고 당부한다. 수용자 교화, 포교를 위해서라면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내주었고, 기꺼이 자신의 손을 잡고 같은 길로 나아가자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지극함은 2016년 조계종 포교대상 원력상이란 큰 상으로 돌아왔다.

2021년 근무지를 원주로 옮기면서 그곳에도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그동안 원주교도소는 불교의 영향력이 미미했다. 포교사는 포교사 대로, 스님은 스님 대로 각자 활동하고 있었다. 불교반 수용자 수가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기만 했다. 이대로 손 놓고 바라볼 수 없었다. 원주 지역포교사들과 불교분과 스님들과의 교류를 주도했다. 분기별로 모임을 갖고 수계법회, 부처님오신날 행사 및 연등달기, 수용자 교화 프로그램 등을 논의하며 효과적인 포교활동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코로나19 여파로 외부인 출입이 전면 통제됐을 때에도 이를 기회로 여겼다. 불교반에 있는 1000여권에 달하는 불교서적을 수용자들에게 빌려주고 독송하라고 했다. 불교성전 공부모임도 별도로 조직해 수용자들에게 불교성전 학습 기회도 마련했다. 경전 대회까지 실시했다. 어 회장은 “사이클을 계속 타면 근육이 유지가 되지만 그만 두는 순간 근육은 빠지기 시작한다.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불교공부도 마찬가지다. 수용자들에게 사경을 권하는 것도, 불서를 읽으라 하는 것도, 교리공부를 하라는 것도 신심 유지를 위해서다”고 했다.

포교사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았다. 2014년 전문포교사 품수를 받았고, 포교사단 서울·경기지역 교정교화4팀장, 교정교화분과위원장 소임도 맡았다. 전문적인 명상 교육을 위해 불교명상지도자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교정교화전법지원 수석부단장을 맡아 전법단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민간성직자로 위촉돼 군포교일선에서도 활약 중이다. 2002년부터 매주 1회씩 군법당을 찾아 법문이 아닌 교리 및 경전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초보자들에게는 법문보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더 시급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어 회장이 포교를 시작했을 때부터 세운 철칙이다. 법당을 찾는 장병들의 숫자는 적지만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불자가 나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웃음짓는다.

어 회장은 여주교소도 재직시절 시작한 봉사활동도 매주 빠지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 2002년 보라미봉사회를 조직해 직원들과 도배, 연탄봉사, 배식봉사는 물론 물품, 현금 지원 등 끊없는 자비행을 펼쳤다. 그 후원 누적금앤만 1200여만원에 달한다. 그 봉사원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6월25일 공주 마곡사에서 진행된 전국교정인불자연합회 수련회에서 11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회원 수 감소로 위기감이 감도는 상황이지만 2024년 창립 30년을 앞둔 만큼 그가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신한다. 교정인불자회가 고꾸라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오로지 비상만 있을 뿐이라고. 새로운 선장이 이끄는 전국교정인불자연합회라는 배는 오늘도 목적지를 향해 순항 중이다.

김민아 기자 kkkma@beopbo.com

[1690호 / 2023년 7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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