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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57)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13)

의상은 문무왕 사후 중앙과 거리 뒀으나 제자 표훈은 왕경 진출

표훈은 흥륜사 금당의 ‘신라10성’에 스승인 의상과 함께 봉안
불국사는 표훈의 창건 관여 계기로 의상 법손들 대대로 주석 
의상 3대손 신림이 화엄교단 크게 확장…왕경‧지방으로 넓혀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신라 경덕왕 8년 조성. [문화재청]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신라 경덕왕 8년 조성. [문화재청]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교단 조직에 전념하였다. 귀국 초기에는 출가본사인 왕경의 황복사(皇福寺)에서 소수 제자들을 대상으로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강의했다. ‘일승법계도’에 대한 의상 법손들의 주석을 집성한 ‘법계도총수록’(권상1)에 의하면, 문무왕 14년(674) 표훈과 진정 등 10여 인에게 ‘일승법계도’를 강의했다는 기록에서 제자 양성에 대한 열의와 사제 사이의 진지한 면학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 의하면, 황복사에서 도중(徒衆)들과 탑돌이를 할 때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허공으로 석자나 떠올라 돌았는데, 이에 의상이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기이하게 여길 것이니 세상에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설화를 전해주는데, 이를 통하여 대중 교화의 의지와 어려움이 컸던 사정을 추측케 한다. 황복사는 8세기 중엽 의상의 대표 제자인 표훈이 머물고 있었고, 9세기 중엽에 의상의 법손들에 의해 화엄결사가 조직되고 있었던 것을 보아 의상의 화엄종에 전속된 사찰은 아니었지만, 일정한 관계는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의상이 태백산의 부석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은 이후에도 문무왕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과 함께 화엄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

의상의 제자양성과 전교활동은 문무왕 16년(676) 국왕의 허락을 받고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태백산에 새로 부석사를 창건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 의상은 부석사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고, 화엄교학을 탐구하면서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양성하였다. 의상은 제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일승법계도’를 익히게 하여 이를 체득한 경우에는 전법의 상징으로 ‘법계도인’을 수여하여 독자적인 학풍을 수립하였다. 의상은 가난한 서민이나 노비 출신을 구분하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최측근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지통(智通)은 노비 출신이었으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품팔이로 생활하던 진정(眞定)은 의상 문하로 출가한 뒤 모친상을 당하자, 의상이 문도를 이끌고 소백산 추동으로 옮겨 초려를 짓고 90일간이나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전하는데, 3천명이나 운집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과장된 것이겠지만, 신분을 뛰어넘은 제자에 대한 깊은 애정은 의상 문도의 번성함을 나타내주는 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의상은 왕경에서 벗어나 문도를 이끌고 태백산과 소백산 일대의 천연동굴과 초려(草廬)에서 제자들과 화엄교학을 강론하였는데, 이러한 소식을 접한 문무왕이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겠다고 하자, 의상은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하였다. 

“우리 불법은 평등하여 위아래 사람이 함께 나누어 쓰고 귀하고 천한 사람이 함께 지키고 있습니다. ‘열반경’에서 팔부정재(八不淨財)를 이야기했는데, 어찌 장전(莊田)을 가질 것이며, 노복을 부릴 것입니까? 빈도는 법계로 집을 삼고 발우로 농사지어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의상의 교단은 부처님 당시의 그것에 매우 가까웠던 모습으로 보이는데, 교단의 구성원은 신분차별이 없는 평등한 관계를 이루었고, 무소유와 탁발로 생활하였으며, 정치권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상의 의지를 읽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귀족적 생활을 즐기고 있던 중앙불교계 분위기와는 상당히 대조적이었음을 나타내준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의상 당시의 화엄종 교단의 이러한 분위기는 8세기 중엽 이후 중앙귀족이나 왕실과 연결되고 왕경으로 다시 진출하게 되면서 퇴색되어 갔다는 점인데, 뒤에 별도로 다루게 될 것이다. 

의상 문하에서는 실로 많은 제자가 양성되고 있었는데, 소백산 추동에서 ‘화엄경’을 강의할 때 운집한 문도가 3천명으로 헤아려질 정도로 의상의 교화는 컸고, 종단은 크게 융성하여 갔다. 의상의 문도들 가운데서는 특히 아성(亞聖)이라 일컬어졌던 10대 제자가 유명하다. 그러나 10대 제자는 반드시 10명의 제자를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10이라는 숫자는 화엄교학의 숫자 개념에서 부족함이 없는 충만 된 수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부처님의 10대 제자에 비견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10성(十聖)’이라는 표현은 균여의 ‘지귀장원통초’(권하)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지만, 10대덕의 구체적인 이름은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으로 열거되었다. 또한 ‘송고승전’ 의상전에서는 지통·표훈과 함께 범체(梵體)와 도신(道身) 등 4인을 “당에 올라 심오한 뜻을 깨달은 자(登堂覩奧者)”라고 하여 뛰어난 제자로 거명하고, 의상의 강의록을 정리한 도신의 ‘도신장’(일승문답)과 지통의 ‘추동기’(추혈문답)를 특기하였다. 이상 두 자료에서 열거된 제자들은 모두 12인이 되는데, 그 가운데 의적은 유식학의 승려로 추정되고, 범체는 의상의 4대 법손의 인물로서 직제자로 볼 수 없어 이들 2인을 빼면 10인이 남는다. 그런데 10인 가운데 진장·도융·능인 등은 그 이름만 보일 뿐 그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머지 7인 가운데서는 진정·상원·양원·표훈 등 4인이 더욱 뛰어났던 것 같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서 이 4인을 특히 ‘4영(四英)’으로 칭하고 있으며, 의상은 법장이 보내온 ‘화엄탐현기’를 10일간 검토한 끝에 이들 4인에게 나누어 강의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상의 10대 제자와 그 법손들의 계보와 활약상에 대해서는 이미 균여의 화엄 관계 저술들과 ‘법계도총수록’의 내용을 검토하여 정리된 성과들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화엄종의 발전에 특히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에만 한정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10대 제자 가운데서 특히 표훈은 의상의 문도를 대표하는 제자로서 가장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표훈은 앞에서 들은 ‘삼국유사’ ‘송고승전’ ‘법장화상전’ 등 모든 자료에서 빠지지 않고 대표적인 제자로 거명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더욱 8세기말~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흥륜사 금당의 신라 10성 가운데 화엄종의 승려로서 표훈은 의상과 함께 봉안되었다. 신라 10성은 불교공인의 아도·염촉, 왕실불교의 안함·자장, 불교대중화의 혜숙·혜공, 종합적인 불교사상과 화엄행자의 원효·사파(사복), 화엄종의 의상·표훈 등 8세기 중엽까지 신라불교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인데, 특히 원효·사파와 함께 의상·표훈은 신라불교의 전성기인 ‘중대’의 불교를 대성시킨 인물로 추앙받았다. 표훈은 진정과 함께 일찍이 의상 문하에 입문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문무왕 14년(674) 진정 등 초기제자인 10여 대덕과 더불어 황복사에서 의상으로부터 ‘법계도’를 배웠는데, 표훈은 의상의 사구게에 따라 ‘오관석(五觀釋)’을 지어 스승의 인정을 받았다. 이 글은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을 집성한 ‘법계도총수록’ 가운데 ‘대기(大記)’에 인용되었다. 이밖에도 표훈의 학설들은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에 4회, ‘석화엄지귀장원통초’에 1회, ‘화엄경삼보장원통기’에 2회가 인용되었고, ‘법계도총수록’ 가운데 ‘고기(古記)’에 1회, ‘대기’에 3회가 인용되어 있어, 화엄종의 교학을 정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표훈은 의상이 입적한 후 왕경의 황복사에 한때 주석하였는데, 대정(大正:金大城) 각간에게 화엄학의 3본정(三本定)을 해석해 주었다는 사실은 표훈이 김대성의 불국사와 석굴암의 조성에 관계하였음을 추정케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은 집사부 중시를 역임한 김대성에 의해 시작되고 왕실에 의해 완성되었고, 표훈과 신림(神琳)이 초청되어 주석하였던 사실이 전해진다. 불국사의 창건공사가 시작되는 경덕왕 10년(751)에는 표훈의 나이가 이미 90세의 고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뒤 불국사에는 의상의 법손들이 대대로 주석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9세기말경에는 표훈·유가(瑜伽)·원측(圓測)의 3성강원(三聖講院)이 설치되어 있어 표훈이 불국사 3성의 한 사람으로 숭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표훈이 천제에게 청하여 경덕왕의 대를 이을 아들을 얻게 해주었다는 혜공왕의 탄생 설화를 전해주는데,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할때 표훈이 김대성 같은 중앙귀족, 경덕왕 같은 왕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돌이켜 보면 의상은 문무왕의 지원을 받거나 간언을 하는 등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문무왕의 사후 왕권강화와 지배체제 정비에 주력한 중대왕실과는 거리를 두고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태백산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화엄교학 강의와 문도 양성의 교단 활동에 치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경덕왕 대에 이르러 불국사 창건을 계기로 하여 그의 법손들이 중앙귀족 및 왕실과 직접 연결되면서 왕경 가까이 다시 진출하게 되었고, 이때 그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한 중심인물이 바로 표훈이었다.

그런데 표훈을 계승하여 800년 전후에 화엄종의 교학과 교단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던 인물은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칭해졌던 신림(神琳)이었다. 신림은 그의 전기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법계도총수록’에 의하면, 의상의 직계 제자인 상원에게 배웠던 것으로 보아 의상의 3세 법손임을 알 수 있다. 상원은 ‘삼국유사’에서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설이 ‘법계총수록’에 수록된 ‘도신장’ ‘법융기’ ‘고기’ ‘십구장’ 등 여러 자료에 인용되어 있다. 또한 부석사 40일 법회에 참석하여 의상에게 수업하였고, 또한 여러 자리에서 질문하였던 사실들로 보아 뛰어난 화엄학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림은 상원에게 성불의 뜻을 질문한 적이 있고, 상원을 스승으로 칭했던 사실 등을 보아 상원을 계승한 제자로 추정되며, 또한 균여의 저술들과 ‘법계도총수록’에 의하면, 당에도 유학하여 융순(融順)에게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뒤에 신림은 부석사에 모인 1천여명의 대중을 상대로 하여 법장의 ‘화엄교분기’를 강의했다는 사실을 전하는데, 신라의 화엄교학을 진흥하고, 교단을 융성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신림의 학설은 균여의 저술들에 20여 회, ‘법계도총수록’에 10여 회 인용될 정도로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의 활동의 중심 무대는 물론 부석사였으나, 그 밖에 불국사·월유사·세달사 등지에도 주석하거나 법회를 주관하여 왕경과 지방으로 화엄종의 활동 지역을 크게 넓히었다. 

그런데 신림이 화엄종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했던 점은 무엇보다도 그의 문하에서 상당수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함으로써 명실공히 신라불교의 주류 종파로 정립시킨 것이었다. 신림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법융(法融)은 의상의 ‘법계도’의 대표적 주석서의 하나인 ‘법융기’를 저술하여 ‘법계도’를 중심으로 하는 의상 화엄교학의 정통성을 확립케 하는데 기여했고, 지엄의 ‘십구(十句)’의 주석서인 ‘십구장’을 저술하였다는 설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순응(順應)은 혜공왕 12년(766) 당에 유학하였으며, 애장왕 3년(802)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창건하여 의상 화엄종단의 대표적 화엄도량이 되게 하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90호 / 2023년 7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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