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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아산 두방사 주지 본오 스님

“신도 쉼터‧사회와의 소통 창구 지향…진주에 새 활력 불어넣을 터!”

스님과 나선 만행길에서
출가 원력 세우고 단행

상월결사 인도성지 순례 
“길을 걷는 내내 행복!”

“열암곡 부처님 세우는 날
남산은 불산으로 대 승화

종단서 법회 주간 설정 
남산 전역 불보살 친견 

1만명 운집 ‘사회 메시지’
전 국민에게 ‘큰 울림’

오솔길‧등산로 걸으며
월아산 풍경 오롯이 감상

세속 번뇌 덜어 놓을
‘달빛 스테이’로 초대

 진주 형평운동‧불교 평등
인권‧환경 화두 풀 열쇠

“두방사만의 ‘달빛 스테이’도 준비하고 있다”는 본오 스님은 “달빛을 따라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세속의 번뇌 하나쯤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두방사만의 ‘달빛 스테이’도 준비하고 있다”는 본오 스님은 “달빛을 따라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세속의 번뇌 하나쯤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산에 사는 스님 달빛 탐내(山僧貪月色)/ 병 속에 물과 달을 길었네(幷汲一甁中)/ 절에 돌아와 깨달았으리(到寺方應覺)/ 병을 기울이면 달도 따라 비게 되는 것을(甁傾月亦空)’ (이규보의 ‘영정중월(詠井中月’)

찻물 길러 갔다가 때마침 우물에 뜬 둥근 달도 담았더랬다. 물병을 기울여 다관에 물 따르니 달은 어디로 새었는지 없다. 그래도 스님은 낙담하지 않고 되레 미소를 보인다. 진짜 달은 우물이 아닌 하늘에 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산사 속 무욕(無慾)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려냈다. 
 

금오지에서 바라본 월아산 일출. [진주시 관광진흥과]

진주 월아산에도 멋진 달이 떠오른다. 산의 형상이 치열을 닮아 ‘어금니 아’ 자를 써 월아산(月牙山)이라 한다. 이 산의 산등성이 질매재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노라면 마치 산이 달을 토해내는 듯(아산토월·牙山吐月)하다고 해 ‘달엄산’ ‘달음산’이라고도 했다. 그 달빛 유난히 곱게 내려앉는 절 하나 있다. 월아산 중턱에 자리한 두방사(杜芳寺)다.

신라 49대 헌강왕 4년(878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선조 36년(1603년) 계형 대사가 중건하고 불법을 계승해 오다가 청담 스님이 수행도량의 조건을 구비하고 시설을 개수했다.(1946) 청곡사 암자에서 해인사 말사로 등록(1962)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때 칠성기도 도량으로 정평 났던 산사다. 이 절에 불심을 더해 새로운 전법의 활기를 불어넣는 스님이 있다. 주지 본오(本悟) 스님이다.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친 어느 날 서울 도봉산 망월사에서 정진하던 스님을 광주에서 만났다. 고향 선배였던 그 스님이 대뜸 물었다.

“너는 누구냐? 네 이름 하나로 너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느냐?”

처음 듣는 선문답이었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스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고(1981) 그해 12월20일 바랑 하나 맨 채 스님과 함께 길을 떠났다. 장호원을 거쳐 음성을 지나 대전에 닿으니 2월 초순이었다. 눈바람은 아직 매서웠고, 발이 너무 아파 고통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버스에 의지해 남해로 내려갔다. 서울서 무작정 떠난 길은 남해 법흥사로 이어졌다. 

그 절에 바랑을 내려놓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결국 9개월 만에 끝났다. 어찌 알아냈는지 가족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출가 원력은 꺾이지 않고 되레 깊어졌다. 1986년 해인사로 정식 출가했고 은사는 종성 스님과 맺어졌다. 

선배 스님과 떠난 만행이지만 고등학생이 감내하기엔 너무 긴 여정이 아니었을까. 더욱이 고무신을 신고 한겨울의 추위를 뚫어야 했던 길이다.

“저는 모르고 있었으나 처음부터 최종 목적지는 법흥사였던 듯싶습니다. 그때 저는 ‘천수경’을 독송하며 걸었습니다. 불교학생회 활동 중에 습득했는데 ‘제법 한다’라는 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태어나 처음 가 보는 마을임에도 정겨웠습니다. 다소의 낯섦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남해 법흥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던 아들을 다시 광주로 불러왔다는 건 출가를 반대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4년 후 해인사로 출가했다. 누구보다 어머니의 마음이 편치 않았을 듯싶다.

“부친은 사업 실패 후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 홀로 보따리 장사를 해가시며 5남매를 키우셨습니다. 행자‧사미 시절부터 속가의 인연은 철저히 끊어내야 한다고 배웠기에 출가 후 한 번도 고향을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초파일 무렵 어머니가 기별도 없이 찾아오셨습니다, 홍제암 앞마당에서 13년 만에 만났음에도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돌아가시라!’ 했습니다. ‘독경이라도 녹음해 보내달라’는 말씀에 건성으로 ‘예’라고 답하고는 돌아섰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수행의 ‘모자람’으로 알았을 터다. 수승한 경지에 올라 초연함을 체득했을 때 만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어머님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홍제암에서 헤어진 지 두 해 만에 아들의 독경 소리는 끝내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2001) 

“원달재에서 사흘을 머물렀습니다. 순천과 곡성을 잇는 그 고개는 어머니가 시집을 오며 넘었던 길입니다.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한 기도를 길가에 서서 온종일 올렸습니다.”

허망함이 파도처럼 밀려왔을 터다. 그 파고를 넘기 위해서라도 길을 떠나야 했다.

“태국을 거쳐 미얀마로 넘어갔습니다. 하루에 3000원 이상을 쓰지 않겠다고 작심했기에 하루 한 끼 공양만으로 버텼습니다. 공원에서 자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밥을 먹었다.’ ‘사찰을 참배했다.’ ‘탑돌이를 했다.’ ‘공원 의자에 앉았다.’ 등 하루의 행위를 적었습니다.”

어머니를 냉대했던 송구함이 가라앉은 건 43일간 1167km를 걷는 ‘상월결사 인도 성지순례’ 길을 걸으면서다.

“도반인 원명 스님의 권유로 ‘삼보사찰 천리순례’에 동참하며 인도 성지순례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생전에 다시 없을 지중한 기회였습니다. 벌레, 먼지, 매연, 소음 등이 몸을 힘들게 했으나 그 고통을 견뎌내는 자체가 정진임을 순례 대중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걷는 내내 저 스스로에 묻고 또 물었습니다. 한 걸음도 내딛지 않으면서 허공도 걸을 수 있듯이 말한 적은 없는가? 부처님께서 당부하신 전법에 얼마나 매진했는가? 답은 늘 같았습니다. ‘안일하게 살았구나!’” 

자책하는 자신을 말없이 위로해 준 건 인도 들녘의 새벽 풍경이었다고 한다.

“순례길에서 바라본 땅은 비옥했습니다. 갠지스 강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대지를 적셔준 덕입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냇물에 스민 여명이 물길을 따라 흐르는 풍광은 황홀하게 다가왔습니다. 부처님의 자비심도 저 여명의 물길을 따라 흐르며 중생들의 가슴을 적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환희가 차올랐습니다.” 
 

상월결사 인도성지순례 길에서 부처님을 이운하고 있는 본오 스님. 
상월결사 인도성지순례 길에서 부처님을 이운하고 있는 본오 스님. 

이 길을 열어 선연(善緣)을 맺게 해 준 상월결사 회주 자승 스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본오 스님은 이제는 누구에게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새벽마다 홀로 일어나 대중들의 원만 회향을 위한 절을 올렸는데 쿠시나가르에 다다른 새벽에는 어머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어머님, 이제는 법복을 입은 제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신도님들에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부처님께서 걸으신 길을 온전히 걸었습니다.’ 상좌들에게도 권할 수 있습니다. ‘너희들도 그 길을 걸어 보라.’ 걷는 내내 참 행복했습니다!”

오전 행선에서 순례 대중을 이끈 건 불상을 품에 안고 선두에 선 스님이다. 처음엔 조별 순서를 정해 진행했는데 본오 스님이 매일 맡겠다고 자청하면서 방식이 바뀌었다. 특별한 원력이 있을 터였다. ‘열암곡 부처님 바로세우기’ 도감을 맡고 있는 본오 스님이다.

“경주 남산에는 150개에 이르는 절터가 있습니다. 불상과 탑, 부도만도 260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국민에게는 ‘천년고도의 노천박물관’이고, 불자들에게는 성산(聖山)이자 불산(佛山)입니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그의 제자 윤경렬에게 “신라를 알고프면 경주에 가 살아라. 겨레의 혼을 알고 싶으면 서라벌(徐羅代)의 흙냄새를 맡으라.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고자 한다면 경주 남산에 가 보아라”라고 했다. 아쉽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남산의 가치는 퇴색되어 가고 있다.

“열암곡 부처님이 바로 세워지면 남산의 주불이 될 겁니다. 불자들의 온 정성이 담겼기에 불자 자긍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한 달, 혹은 100일을 ‘남산 불보살님 친견 법회 주간’으로 정하고, 1년에 한 번은 1만 명이 동참하는 대대적인 법회를 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대법회를 통해 불교의 대사회적 메시지를 전한다면 울림은 크리라 확신합니다.”
 

비 내리는 두방사 전경.
비 내리는 두방사 전경.

대구 용문사 주지, 불교중앙박물관 사무국장 소임을 지낸 본오 스님은 2019년부터 두방사 주지를 맡았다. 지자체와의 협의를 통해 마을에서 절로 이어지는 길을 포장했고 상수도 시설도 완비했다. 절의 식수가 모자라 대법회를 준비하려면 소방차를 통해 물을 공급받아야 했을 정도다. 

“물 문제가 해결되며 3층 규모의 요사채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원래는 요양원으로 쓰려 지은 건물인데 신도님들이 언제든 찾아와 마음 편히 법담을 나눌 수 있는 쉼터로 활용하려 합니다.” 

불교와 사회가 소통하는 공간도 마련했다.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 즉 신분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형평운동(衡平運動)’이 처음으로 일어난 곳이 진주입니다.(1923) 남녀노소‧빈부귀천‧인종에 상관없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다 귀하다는 불교의 평등사상과 맥이 같습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종교‧정치‧문화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권, 환경, 상생 등의 사회적 화두를 함께 풀어가 보려 합니다.”

아울러 템플스테이관으로 활용할 계획도 세워 놓았다.

“두방사와 연결된 다양한 산책로가 있습니다. 청곡사로 이어진 오솔길은 한적하여 사유의 길로 손색이 없습니다. 진주의 명소로 손꼽히는 금호지와 우드랜드로 이어진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어 월아산이 빚어내는 풍광을 온전히 감상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두방사만의 ‘달빛 스테이’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달빛을 따라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세속의 번뇌 하나쯤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겁니다.”
 

진주 명소로 손꼽히는 금호지. [진주시 관광진흥과]
진주 명소로 손꼽히는 금호지. [진주시 관광진흥과]

나옹 스님의 ‘달밤에 적선지(積善池)에 노닐며(月夜遊積善池)’가 스쳐 간다.

‘한밤중에 발 가는 대로 노닐다 보니(信步來遊半夜時)/ 그 가운데 참된 맛을 누가 능히 알리오(箇中眞味孰能知)/ 세상도 고요하고 마음도 고요하니 온몸이 상쾌한데(境空心寂通身爽)/ 연못엔 바람이 가득하고 시냇물엔 달빛이 가득하네.(風滿池塘月滿溪)’

월아산에 뜬 달도 두방사를 찾은 모든 이들 상쾌하게 할 터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본오 스님은
1986년 해인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종성 스님과 맺어졌다. 1988년 혜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91년 범어사에서 석주 스님을 은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불교중앙박물관 사무국장, 대구 용문사 주지 소임을 보았다. 현재 ‘열암곡 부처님 바로세우기’ 도감이자 월아산 두방사 주지이다.

[1691호 / 2023년 8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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