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을 둥글게 껴안고
스스로의 깊은 생각에 잠긴다
더 이 상 튀어오를 수 없는 건가
바람이 빠지자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졌다
제 몸의 생각을 숨쉬게 되었다
숱한 발길질에도 구겨지지 않고
둥글게 살려고 하던 공
세게 얻어맞을수록 더 높이
더 멀리 더 오래 날아가던 공
고통이 그를 움직이던 에너지였다
생각하며 사는 게 괴로울 때도 많았다
골대 밖으로 튕겨 나와 발버둥치고
벽을 넘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퍽, 공은 마침내 늪에 처박혔다
뿌리 잃은 삶의 구렁텅이를 딛듯
제 몸의 숨구멍을 더듬게 되었다
(안명옥 시집, ‘뜨거운 자작나무 숲’, 리토피아, 2016)
우리말을 발음하다 보면 감탄할 때가 있다. 참으로 작명 잘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공’이라고 발음해보자. 그야말로 공이 튀어오를 것 같지 않는가? ‘공’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한자어로는 구(球), 영어나 독일어로는 ball, 빠알리어로는 guḷa, 산스끄리뜨어로는 gola이다. 여러 언어권에서 나름대로 작명을 잘했지만, 그중 ‘공’이 최고다.
둥근 공이 쉽게 튀어오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둥근 몸 안에 공기를 넣어서이기도 하지만, 제 몸의 최소한을 바닥에 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중력의 명령을 최소한으로만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튀어오를 수 있는 성격 덕분에 공은 사람들의 훌륭한 놀이 수단이 된다. 둥근 공으로 하는 운동경기를 열거해 보면 참으로 많다. 구기종목 모두 중력에 최소한으로만 굴복하는 공의 성질 덕분에 생긴 운동경기다.
시인의 눈에 띈 ‘공’은 바람(공기)이 빠진 공, 또는 바람이 빠져가는 공이다. 아직 둥근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공은 제 몸을 둥글게 껴안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이젠 더 이상 튀어오르지 못하는 것일까?’ 얻어맞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얻어맞음으로써 존재가치가 있었던 공이었다. 튀어오르거나 날아가거나 벽에 부딪히는 것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것이 희열이기도 했다.
숱한 발길질을 받아도 명랑했던 공이었다. 세게 얻어맞으면 더 높이 더 멀리 더 오래 날아가서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기도 했다. 고통이 공의 에너지였다. 사람들은 골대 안으로 공을 차넣으려고 했지만, 공은 더 멀리멀리 날아가는 게 꿈이었다. 사람들은 그물 속으로 공을 넣으려 했지만, 공은 자유롭게 벽을 넘어서 하늘 너머까지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공은 자신을 차거나 던지거나 치는 사람들의 의도를 벗어나 더 멀리 가거나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아예 못 미치기도 했다.
어떤 것이든 세월이 가면 점차 제 기능을 잃어가는 법, 바람이 서서히 빠져가던 공은 어느 날 퍽, 늪에 처박혔다. 쉬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처박힌 공을 사람들은 찾지 않았고, 공은 그곳에서 차츰 남아 있던 바람마저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공이 아님을 알았다. 평생 공일 줄 알았는데, 잘 생각해보니 원래가 공이 아니었고, 결국은 공이 아니었다.
공의 한살이나 사람의 일생이나 비슷하다. 사람은 힘들어 쓰러져도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 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렇게 일어서서 일생을 버티지만, 나이 들면 늪 같은 요양원이나 독거 주택이나 아파트에 고립되었다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고 원래가 사람이 아니었음이 증명된다.
그러나 하나의 공이 바람이 빠지면 새로운 공이 튀어오르듯이, 한 사람이 사라지면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는 법, 사라지거나 튀어오르는 공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이야말로 “쓰러지는 법이 없는 ‘거대한’ 공”(정현종, 앞의 시)이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692호 / 2023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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